추인 (4)

바보도, 영웅도 되지 마라.
이것이 지금의 삶을 사는 방법이었다.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다 싶었다. 언제는 안 그랬을까? 아닐 터였다. 아마 과거에도 그랬을 테고, 미래에도 그럴 터였다. 바보와 영웅은 언제든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바보는 이치를 몰라 사람들에게 뜯긴다.
영웅은 정의를 알아 사람들에게 베푼다.
천재와 천치는 고작 종이 한 장 차이라 말하지만, 바보와 영웅은 그조차도 아니었다.
둘은 동일했다. 제 몫을 가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그들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에게 골수까지 다 빨린 뒤에야 말라비틀어져, 자신이 묻힐 고작 한 뼘의 땅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늘 노출되어 덮일 줄 모르는 묘혈, 그 속에 누워있는 선대의 바보들. 그 위로 시체가 던져지고, 시체의 위로 또 다른 시체가 더해지기까지 약간의 석회가루가 다인 그런 시체더미에 투기되었다.
아, 생각해보니 바보와 영웅은 달랐다.
옆집 백치 총각의 등을 후려쳐 먹을 것을 구해온 아비는, 적어도 그의 자식에게만큼은 영웅이라 불릴 테니까.
영웅보다 바보 되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일엽이었다.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내 얼굴에서 심마의 흔적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영웅을 위한 세상은 있어도, 바보를 위한 세상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놈의 얼굴이 더 요상하게 변했다. 한쪽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다른 한쪽은 아래로 잔뜩 구겨졌다. 그새 표정이 더 다양해졌구나 싶었다. 놈에게 농을 건넸다.
“그래서 우리 첫째 엽이는 어쩌나, 이놈만큼 둔한 놈이 또 없으니 필시 큰일이겠거니, 뭐 그런 걱정을 했다.”
얼굴이 제법 표독스러웠다. 역시 오랜만이지만 놀리는 맛이 있었다. 이놈만큼 놀려서 재밌는 놈이 없었다. 엽도 내 얼굴을 보더니 골치 아프단 듯이 미간을 박박 문질러댔다.
“제 육아에 스승님을 추가하게끔 하진 마십시오.”
눈으로 슬쩍 뒤를 가리켰다. 소란스러웠다. 어쩌면 제일 위험한 적을 만나러 가야 할지도 몰랐는데도 모두 조잘조잘, 재잘재잘 거리며 쉼 없이 떠들었다. 미전을 태운 말이나, 정백을 태운 범이나. 그 소음에 질렸는지 틈날 때마다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내 너 아니면 누구랑 농을 주고받더냐?”
“...하. 그래서 진짜 신경 쓰시는 게 뭡니까?”
‘눈치만 늘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는 스승은 더 눈치 없이 뻔뻔해졌다’라고 받아쳤다. 말 빨일지, 독함일지 뭐가 더 늘긴 했다.
“역시 지고 어르신과의 대화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간 네가 고생이 많긴 했구나.”
“흐흐. 스승님이 좀 우둔해지신 거란 생각이 안 듭니까?”
왼 주먹을 내질렀다. 놈이 상체를 숙였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지만, 놈의 움직임은 거기서 멎지를 않았다. 비어버린 복부를 향해 반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 속력을 틀어버려 회전력으로 삼았다. 몸이 반 바퀴 돌았다. 엽의 옆면이 내게 정면이 되었다. 왼손을 거둬들였다. 대신 오른손으로 장법을 내질렀다.
“허? 이놈 봐라.”
내공을 보려는 심산이었다. 허나 놈은 내 생각에 어울려 주지를 않았다. 엽은 내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누더기였다. 그 중에서도 어렵사리 기운 곳이었다. 언제 떨어져 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역시 옷에 애착을 가지십니까?”
음흉한 웃음이 보였다. 딱 환관의 그것과 같았다. 손목을 빙그르 돌렸다. 놈도 세게 잡진 않았기에 맞붙인 소매가 풀려났다.
곧바로 손끝에 한기를 불어넣었다. 하얀 얼음이 얼어붙어 발톱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그제야 엽도 제대로 내공을 불어넣은 장법을 펼쳐 내 손을 쳐냈다. 손끝에 적당한 우리함이 있었다.
“육아만 한 것은 아닌가 보구나.”
엽은 씨익 웃었다. 얼굴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달리는 와중임에도 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고, 속도도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가는 길이 워낙 고생이었어야 말입니다.”
차분했다. 연계도 자연스러웠고, 심계나 내공의 운용까지 모두 다 생각 이상이었다. 거기에 입담까지 더해진 상태였다.
이놈이 첫 제자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 말버릇대로 알아서 잘 했으니까.
딱, 녀석에게만 들리게끔 말을 걸었다.
- 어르신이 걱정하신 건 하나다. 보호받을 자는 많은데, 그걸 보호할 사람은 너무 적다는 거였다. 조직으로서의 최소한의 자립조차 힘들다는 거다.
중원 전국의 거지가 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족히 십만은 되지 않을까 했다. 평범한 이들 중에서 인재를 꼽아도 쓸 만한 무재를 가진 이가 천이 될까 말까한 숫자였고, 그 중에서 또 인정을 받을만한 이들은 겨우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터였다.
애초에 싹수 좀 있는 것들을 받아서 무인으로 기르는 일반적인 문파와는 경쟁조차 되지 않았다.
“거기에... 그들은 거지 아닙니까?”
엽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입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도 정면을 향했다.
- 네 말대로다. 사람으로 치면 허리라 할 만한 튼튼한 조직력의 강군(强軍)을 기대할 수가 없다. 오래지 않아 무너지겠지.
정보조직으로 개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정보는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는다. 양지의 정보는 돈이 되고, 음지의 정보는 치부가 된다. 그러니 누군가는 침을 흘릴 테고, 누군가는 이를 갈 터였다.
무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국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수에 전력의 대부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거구요.”
현실에 대해 이상이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이었다.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재능이 있다고 할 만한 놈들을 싹싹 긁어모으는 것.
경지가 다르다고 할 만한 이가 하나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나, 지고 그리고 천광 같은 사람이 은밀히 움직이면 한 지역을 초토화 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뛰어다니는 전략 병기였고, 감정을 가진 신병이기였다. 그 자체로 억제력이 있었다.
- 문제는... 그만한 고수들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거지만.
힘이 있다. 그들에게 악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요구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들에게 선, 그것도 자신을 불태워야 만들 수 있는 적극적인 선을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당장 나만해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저들을 향해 그 길을 걸으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실로 바보 같은 짓인 까닭이었고,
내가 그들의 사부(師父)인 까닭이었다.
『三四九. 추인』
해는 졌으나, 아직 밤은 오지 않은 공터의 중심이었다. 그곳에 내가 서 있었다.
“캬, 또 어디 가서 이런 걸 보겠나?”
“얘들아! 저놈 새끼 봐주지 마라!”
미전과 정백, 그리고 오견과 구견은 조금 떨어진 바위의 위에서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들을 팔자 좋게 늘여놓은 상태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딱 재미난 것을 찾은 구경꾼들의 모습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내가 너희를 모두 제압하면 나의 승.”
제자 다섯이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다. 붉은 살기들이 끌어올라 피부를 찔러댔고, 피부는 피대신 소름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구경이란 게 별게 아니었다. 지금의 이게 구경거리였다. 괴물 스승 하나와, 그 스승을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을 제자들 간의 비무.
“반면 내가 우공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게 만들면 너희의 승리다.”
허리춤에 묶여 있는 우공을 가리켰다. 우공은 변함없이 검고 무겁게 자리를 지켰다. 단지, 붉은 매듭 장식만이 조금은 가벼워진 채 발그레한 몸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만약, 스승님이 역으로 제압이라도 당하면 어떡합니까?”
‘흐흐’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그 뒤를 심정이 받았다. 심정은 딱 당려 놈의 기분 나쁜 웃음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우공에 손도 못 대고 기절해 버려도... 참 문제 아닙니까?”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도발이 참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오견이었다면 그대로 출수를 했을 정도였으니까. 허나 나는 놈이 아니었다.
“나를 누구라 생각하더냐.”
내공을 끌어올렸다. 단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진신사리를 두레박 삼아, 맑고 검은 내공들을 온 몸으로 보냈다. 폭소가 죽어갔다. 주위가 침묵으로 잠식되어 갔다.
“다시없을 만악의 귀요, 다시없을 천의의 선이니.”
제자리에서 발을 굴렸다. 침묵이 땅을 가르며 나를 중심으로 한 거미줄을 새겼다. 모두가 먹이의 발목을 잡을 검은 거미줄이었고, 모두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흑사(黑蛇)와 같은 것들이었다.
“고작 너희가 나를 상대로 승리를 점치더냐?”
맑은 쇳소리와 함께 뱀들이 달려들었다. 다섯의 제자는 모두가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손바닥을 펼쳤다. 거대한 진동이 시야를 흔들고, 뇌를 흔들었다. 그렇게 녀석들을 도로 땅에다가 처박아버렸다.
- 오만하구나.
***
삼도천의 풍경이 그러할까. 넘실거리는 어둠이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바라는 망자들의 손길처럼 땅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땅에 처박힌 제자들의 몸을 붙잡았다. 하나씩, 또 하나씩 아직 살아서 그 기회를 누리는 너희들이 너무도 부럽다는 듯이 그들의 몸을 덮어나가고 있었다.
“와... 씨....”
“이게 맞냐?”
어둠이 폭발했다. 선명한 빛과 함께 이송이 서 있었다. 반대로 다른 누군가는 어둠에 완전히 잡아 먹혔다. 허나 꿇리거나 소화시키진 못했다. 곧 한 점 점이 되어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바스라졌다. 남명은 그렇게 서 있었다.
“....허, 어이가 없을 지경이네.”
“구씨 아저씨는 아무것도 아니었네.”
발 빠른 도망과 필사적인 검술이 어둠을 갈라냈다. 사향은 그렇게 서 있었다. 붉고 강렬한 기세가 어둠들을 거칠게 토막 냈다. 심정은 그렇게 서 있었다.
“그나저나 일형은 초격에 뻗은 거-”
“시끄럽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들아.”
공터 주위의 숲속이었다.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일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서 있었다.
“저거 반칙 아냐?”
“몰라.”
“사제들을 고기방패 삼는 거 아닙니까?”
“저 형한테 뭘 기대해.”
다들 뭐라고 떠들어댔다. 일엽은 반박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에 가까웠다. 스승이란 자가 그런 잡담을 그냥 내버려둘 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오만히도 서 있던 그들의 스승은 그들 사이에 잡담을 그대로 죽여 버렸다. 그의 손이 휘저어졌다. 모두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온다!”
“흩어져? 아님 모여?”
“...흩어져라 이것들아.”
일엽의 지시였다. 누군가 ‘알겠다’라고 하려 했다. 첫 음절을 뗐다. 그게 얼어붙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뒷글자를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얼어붙는 것을 넘어 그 숨으로부터 범과 웅의 가죽도 뚫어버릴 섬뜩한 얼음 꽃이 피어났다.
“진짜는 얼음 꽃이다! 모여! 모여서 한꺼번에 쓸어 내버려!”
지시에 따라 넷이 모여들었다. 손발이 잘 맞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로 다른 사형제의 무구가 날아와도 놀라질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사각에 있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꽃들이 빠르게 저물어 갔다.
“송, 더 붙어라.”
“명, 넌 너무 빠르다. 속도 줄이고.”
“향과 정. 너희는 너무 붙어있지 말고.”
일엽의 지시가 빠르게 날아왔다. 그가 날린 게 지시만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암기나 활을 날려서 넷 사이의 빈틈을 메웠다.
그러면서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사제들이 ‘예’하는 소리에 맞춰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꼭 자신이 있던 곳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제들의 상황을 살폈다.
“꽃들은 거의 다 처리했다. 명, 네 봉술로 나머지를 처리하고. 검은 물결은 송과 정이 처리해라. 향은 다른 녀석들 뒤를 봐주고.”
남명의 봉이 머리 위에서 돌았다. 바람이 불어나가며 다가오던 수련들을 잠시 멈춰 세었다. 그러곤 뒤편으로 물러나갔다.
사향이 조그마한 쇠구슬들을 던져 꽃들을 깨버렸다. 그 사이 명은 봉을 짧고, 길게 잡아가며 쉼 없이 흔들어 위협이 될 만한 파편들을 처리해버렸다.
꽃의 죽음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아니었다. 한낱 꽃가루였다.
모두 하나같이 창백했다. 더 어두워져감에도. 그것들은 남아있는 빛을 머금고, 더 밝게 뱉어냈다. 황혼의 비명과 같았다.
허나 그것도 길지 않았다. 땅에 가라앉을수록, 그래서 기어오는 거대한 구렁이의 몸에 가까워질수록 그 모든 비명과 빛남을 상실당하고 있었다.
꽃의 주인이 보낸 놈이었다. 뱀은 소득 없이 저물어버린 꽃들을 대신해서 한껏 차가워진 혀를 낼름거리며 기어왔다.
“송, 정! 지금!”
칼이 칼집을 갈아냈다. 연묵을 뚝뚝 흘려대는 칼이 제 집을 벗어났다. 그게 수평의 일자를 그어냈다.
짧은 채도도 움직였다. 그것은 위로 향했다. 짧지만, 무게는 이송의 장검에 뒤지지 않았다. 소녀의 팔에 핏줄이 돋았다.
핏줄은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손목과 손등에도 핏줄이 돋았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채도에도 돋으려 올라갔다. 허나 소녀의 피부도 견뎠던 것을 쇠는 견디지 못했다. 핏줄은 거기서 터져버렸다. 붉은 기운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소녀가 채도를 아래로 그어버렸다. 그게 수직의 일자였다.
그렇게 완성된 조용하고, 또한 흉폭한 십(十)자가 나아갔다.
십자가 뱀과 충돌했다. 뱀의 대가리는 십자를 뚫지 못했다. 하여 타고 올랐다. 그 뒤 몸을 감아 십자를 부서트리려 했다. 힘이 부족했다. 거기에 몸을 칭칭 감을수록, 이질감이 들어왔다. 그제야 뱀은 알 수 있었다. 정작 죽어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가시나무로 만든 것 같은 뾰족함이 십자의 곳곳에 돋아있었다. 못이 살점을 꿰뚫었다. 그 안의 검음을 토해냈다. 뱀은 그렇게 죽었다.
무른 것이 땅에 떨어져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박제는 없었다. 검은 뱀은 얼마 되지 않을 허물만을 남긴 채 완전히 소실되었다.
십자는 이제 그 허물을 자랑스레 두른 채 이젠 사내에게로 개선하고 있었다.
“금쇄공,”
사내가 팔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검은 묵이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에서도 검은 묵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하얬다. 그의 하얀 손이 오므라들었다.
“삼라(森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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