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인 (7)

“이봐, 시간이 아깝지 않나?”
놀림 받던 오견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곤히 자고 있던 제자 몇이 얼굴을 찌푸렸다. 사내는 오견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 버렸다.
“쯧쯧, 소인배 같으니라고.”
“정말이지 딱 지 좆만큼 아량이 넓군.”
오견은 화를 삭혔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프진 않았다. 되려 화가 조금 가라앉은 느낌마저 있었다. 한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시월. 곧 있으면 개주인이랑 한바탕 해야 해. 이렇게 우리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할 시간에 차라리-”
“차라리 무를 닦든, 전략을 세우든 해란 말이군.”
“그놈은 한 때 우리 스승이었으니까.”
모든 개들의 무공이 온전히 개주인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근간이 될 법한 것들은 모두 그로부터 온 거였다.
“강자야. 본신도 그렇지만, 이어온 역사도 짧지 않았겠지.”
모두 개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역사가 긴 만큼 요상한 것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어쩌면 우리에게 전수하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지 혼자 그 좋다는 거 다 처먹었으니 내력도 적지 않겠지.”
두 명의 아재가 이를 갈았다. 그들의 청춘은 주인의 밑에서 노예로써 모두 보내버린 뒤였다.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둘을 향해 사내는 입을 열었다.
그닥 안심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나 역시 몸에 박아 넣은 금침 때문에 전력을 낼 수는 없겠지. 이젠 천하삼절은커녕 그 아래의 아랫줄에 속할 수도 있고.”
그는 옅게 웃었다. 구견은 몰라도 오견은 속이 탈 것만 같았다. 뭐라 하려고 했지만, 사내가 조금 더 빨랐다.
“그래서일세.”
“뭐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그 시간을 내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일세.”
하지 못했던 스승 노릇을 했다. 형제들과 농이나 따먹었다. 그렇게 지금에 충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돌이켜보니 나 죽을 때, 가지고 갈 행복한 기억들이 아주 많지는 않더군.”
그는 아재 둘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어떠하더냐?’란 물음이었다. 오견은 ‘잘 모르겠다’란 말을 했다. 구견은 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더니 무엇인가를 천천히 내뱉었다.
“아직 삶을 사랑하지는 못해. 그래도 그 짧은 기간 동안 대단히 즐거웠다는 것은 알 수 있었네.”
“그래서 죽어도 후회가 없나?”
“어쩌면.”
“구견, 다르게 생각해 보게.”
사내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짙은 먹이 떠올랐다.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도, 흔들릴 지언정 지워지진 않았다.
“자네에게 삶을 준 게 얼마 되지 않아.”
“반년도 되지 않았지.”
“그 짧은 사이에 죽어도 후회 없을 재미를 쌓아왔네.”
“.......”
“삶은 길어. 그럼 그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재미를 쌓을 수 있겠나?”
구견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지워지지 않을 먹의 선이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게 그의 한 판 놀음이었다.
사내는 이번에 오견을 가리켰다.
“오견 자네의 배움도 마찬가지네.”
“...나 죽기 전에 성과를 못 봐도?”
“자네 제자나 자식은 조금 더 볼 걸세.”
“......”
“자네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자네의 독이 이 정도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겠나?”
없었다. 단언컨대 그럴 수 없었다. 아비로부터 의술을 받지 못했더라도 그랬다.
“자네가 의술에 미련이 있는 것을 아네.”
“......”
“자네가 의술로부터 독을 쌓았듯, 자네 자식은 자네의 독으로부터 의술을 쌓을 수도 있겠지.”
오견은 마음에 독무가 낀 것 같았다. 뭔가에 중독되어 가는 듯 했다. 그래서 뭔가를 선택할 것만 같았다. 그 선택이 미래에 후회를 불러올지, 성취를 불러올지는 몰랐다.
“나의 시간도, 나의 지금도 자네들의 마음과 같아.”
사내는 풍류가가 아니었다. 생각 없이 삶을 즐기지 않았다. 과거에서 얻고, 미래에서 헤맸기에. 그는 여기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런 사내가 오견과 구견을 불렀다.
“하여 지금에 좀 더 충실해 볼까 하네.”
“...어우, 씨발. 또 뭐 어쩌려고?”
“자네들 이름을 한 번은 불러봐야지.”
삶을 달리 살겠다고 했다. 그런 주제에 여전히 오견과 구견이었다. 오견이 말했다.
“내가 덕기로 돌아갈 수 있겠나?”
사내는 옛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 형과 곽 형으로 불렀던 이들이 보였다. 부모가 주신 이름, 더 더럽혀지기 전에 버렸다고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난 판관이 아닐세.”
“그래서?”
“그러니 누가 나에게 살 자격을 주었나?”
한때 수많은 살해와 악업을 쌓았던 이었다. 죽어서 시왕들에게 갈 필요도 없었다. 당장 생자들의 법정에 들어선다 해도 모두가 사형을 선고하려 할 테니까. 위무(威武)조차 받지 못한 채로.
그런 사내는 덕기를 위한 북을 두드렸다.
“진정 효(孝)를 행하고 싶거든, 지금부터라도 더럽혀진 이름을 닦게. 닦다가도 도저히 안 될 것 같거든, 그땐 그 흉을 뼈대삼아 선(善)의 그림을 위에다가 그리게.”
“어째서?”
“그게 최선일 테니까.”
모호함에도 오견은 짜증내지 않았다.
그저 장 씨 성의 덕기라는 이름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럼 나는 뭐라고 부를 텐가?”
구견의 말이었다. 본디 받은 이름조차 없는 자신은 어쩌냐는 말이었다.
“자네 스스로 생각해 보게.”
“좋은 이름은 어딘가에서 따오지 않나?”
“그렇게 가진 이름대로 사람이 살던가?”
이름에 효(孝)자가 들어간다 한들 효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덕기(德器)가 제 안에 덕(德)대신 독을 담은 것처럼.
“그 어떤 경전과 시구에서 따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세. 왜 그런 줄 아나?”
“모르겠네.”
“스스로의 이름을 한낱 문자로 삼기 때문이야. 무(武)가 뜻을 잃은 것과 비슷하네.”
뜻도 없는 낙서에 가까운 나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뜻을 세운다면, 죽을 때 돼서는 되려 자네가 그들보다 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 수도 있네.”
구견은 폭소했다. 좋은 무구를 막 벼려냈을 때의 흥분감이 가슴을 달궜다. 그는 이제 자신을 벼려내려는 듯 했다.
“난 구(九)자가 좋아. 십(十)이 완성된 그것을 의미한다면, 구는 거기서 딱 한 걸음 부족한 것이니까.”
아직 산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내려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정상에서 볼 것들을 기대할 수 있었다. 걱정 없는 비움이 되려 충만하게 느껴졌다.
“견(犬)자도 솔직히 그리 싫어하진 않아. 내 삶은 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으니까. 쪽팔리긴 해도 그조차 안고 가야겠지.”
남이 먹고 남은 것을 주워 먹었다. 천장 없는 곳에서 잠을 청했다. 네 발로 땅을 기었다. 입이 있음에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삶이었다. 그는 그 모든 과거가 그저 허무하게 흘러가버리길 원하진 않았다.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으니까.
“하여 태(太)자 정도면 어떨까 하네.”
“견(犬)자에서 점의 위치만 바꿨군.”
“그래, 하지만 의미는 다르지.”
개와 크다. 그 자체론 반대되는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근간은 아주 달랐다. 태(太)는 대(大)로 부터 나왔고, 대는 또 사람의 형상에서 나왔다. 양팔을 크게 벌리는 사람의 모습이 대자를 의미했다.
반면 견자는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리는 개의 모습에서부터 나왔다. 우상단에 찍혀 있는 점이 원래는 개의 꼬리였다. 이걸 줄이다 보니 점이 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구견이란 사람이 이걸 알지는 못했다. 그는 조금 더 직관적인 사람이었다.
“태자의 점이 딱 거근 같지 않은가?”
덕기가 탄성을 내뱉었다. 끝까지 ‘좆’이냐는 거였다. 심하단 생각이었다. 허나 구태(九太)란 사람은 그걸 개의치 않았다. 되려 크게 아주 크게 말했다.
“사람은 역시 지 좆대로 살아야해.”
“.......”
“다른 누군가의 뜻이 아니라.”
덕기는 두 손을 들었다. 그래도 딱히 제지 하진 않았다. 과거 구견의 삶이 어땠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사내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경지가 높아서 그런지, 하나하나가 사찰의 종소리가 같았다. 그래도 너무 무겁진 않았다. 적당히 가볍고 빠른 것이, 늦은 오후의 만종(晩鐘)보단 아침을 알리는 조종(朝鐘)에 가까웠다.
종소리가 그쳤다. 사내가 다른 둘을 호명했다. 먼저 장 씨 성의 사내였다.
“덕기야.”
“왜? 이 이름 성애자야.”
불만이 많았다.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곤, 이젠 큰 사내를 불렀다.
“구태야.”
“좋군.”
짤막한 호명 뒤엔 웃음이 있었다. 그조차 잠깐 이어졌다. 구태가 웃다 말고 그르렁 거린 까닭이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시월. 내 경고하나 하지. 또 남들에게만 좋은 거 해주고, 얼마 못가서 지 혼자 심마에 휘말려 절룩거리면... 그땐 처맞는 걸로 절대 끝나지 않을 걸세.”
구태는 아직도 제 멋대로 뒈짖하려던 순두부 사내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부도 익히면 좀 단단해졌건만, 사내는 그럴 줄도 몰랐다. 그래서 구태는 바랐다. 두부와 닮은 것은 딱 하얗기만 한 게 다이길.
두부 같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강철도 쉬이 찢어버릴 만한 흉흉함이 함께 올라왔다.
그제야 구태와 덕기는 사내가 엄살을 잔뜩 피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로 수천을 참살했던 귀(鬼)는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실력과 경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가짐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둘 모두 걱정 말게.”
덕기와 태는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약한 척에 속아 넘어가는 것만큼, 그리고 거기에 낚여 쪽팔리는 짓을 했다는 것만큼 짜증나는 기만질도 없었다.
사내는 그조차 재밌는지 혼자 옅게 웃었다. 더 깊은 평온이 찾아왔다.
“오늘 자네들과의 잡담에서, 내 깨달음은 한층 더 깊어졌으니 말일세.”
구태는 코를 막았다. 그 채로 사내에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미 연꽃은 피지 않았던가?”
“약간의 이슬을 더한 것일세. 이 정도로 향이 바래진 않겠지.”
선문답 아닌 선문답이었다. 태는 한숨과 함께 코를 틀어막았다. 사내로부터 새어나오는 연꽃 내음이 너무 강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자제해 주게.”
“향이 없는 것 보단 나을 터인데?”
“...사내새끼로부터 아득한 달콤함을 맞고 싶진 않네.”
그제야 연(蓮)이 잎으로 속을 가렸다.
『三五二. 추인』
사람을 쫓고, 또한 좇았다.
나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그랬다.
제자들을 만났다. 좇음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내 추인(追人)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찾으러가는 이들은 내 가족의 가족들이었다. 따지자면 그들도 내 가족이었다. 아직 얼굴 한 번 본적은 없지만, 애틋함만은 진짜였다. 필시 그들에 얼굴에도 내 인연들이 새겨져 있을 테니까.
내가 기억하던 모습들이 얼굴에 새겨져 있을 것이고, 습관에서 그들의 모습이 나타날 터였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그들도 나의 옛 친구들을 기억할 테니까.
난 그들이 그저 잊히길 바라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나의 잊어감과 그들의 잊어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질 테니까.
그런 내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섬길 이 없으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충(忠)의 벌레들, 그러니 메뚜기들이었다.
*
“무엇이 그리들 공허하더냐?”
그들을 살폈다. 살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텅 빈 눈으로 내 쪽을 살피고 있었다. 승패를 가늠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내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승과 패를 논하는 게 무의미했다.
우공의 자루를 쥐었다. 매듭이 살랑거림에도 움직임 하나 없었다. 조금 늦고, 조금은 어리석은 이해가 찾아왔다.
“죽으러 왔구나.”
“......”
“비키거라.”
비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몇 놈이 더 다닥다닥 붙어서 앞을 막았다. 손을 들어올렸다. 내력으로 한 번에 쓸어버리려 하니 그제야 뒤쪽으로 살기를 보냈다.
다섯 제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해가 더 깊어지고, 불쾌해 졌다.
“제자들 앞에서 내가 어떤 놈인지를 보이란 거구나.”
살육의 귀(鬼).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 안 가리던 그 미친놈으로 돌아가란 말이었다.
어차피 막지도 못할 거, 정 지나가고 싶거든 이들을 모두 죽여 스스로를 증명하란 말이었다. 헛웃음만 났다. 주는 주였다.
“쯧, 하여튼 더러운 놈.”
“시월 비키게. 우리가 하지.”
전(前) 오견과 전(前) 구견이었다.
둘이 양옆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양손을 들어 그들을 막아 세웠다.
“새 사람이 된 첫 날부터, 이름에 피를 묻힐 생각인가?”
“그럼 자네가 하게?”
“애들 앞이다.”
일부러 강조해서 말했다. 큰 놈들은 알아먹은 듯 했다. 녀석들에게서 살기와 분노가 눈에 띄게 줄어갔다.
“그럼 저희가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저런-”
이번엔 작은 녀석들이 쫑알쫑알 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들어 올렸던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아무도 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했다.
“내 앞이다.”
그제야 작은 녀석들도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상태로 대략 오십 번의 호흡이 지났다. 이젠 씩씩거리는 것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놈들을 봤다. 그래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피하는 놈들이 있었다. 오래된 놈도, 신참도. 강한 놈도, 약한 놈도 모두 섞여 있었다. 잡다했다.
“너흰 제일 강하기에 개주인의 옆에 남은 게 아니다.”
“그렇습니다.”
한 놈이 대답했다. 몇 놈이 고개를 돌려 대답한 놈을 쳐다봤다. 살의는 없었다.
“충(忠)하기에 옆에 남은 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 맞습니다.”
“솔직하구나.”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그나마 최악은 아니었다. 자기들 상태를 알고 있었으니까.
“나와 잠시 얘기를 하겠느냐?”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상정하지 않은 듯 싶었다. 호흡을 골랐다.
“가장 오래된 놈. 내 앞에 서라.”
누군가 움찔거렸다. 맨 후열이었다. 손을 뻗어 녀석을 가리켰다. 지목받지 않은 녀석들을 아주 조금이지만, 내 손길을 피했다.
그래서 누가 움직였는지를 정확히 집어낼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놈이었다. 얼굴엔 주름 밖에 없었다. 적어도 오십은 넘겨 보이는 녀석이었다.
“나오거라.”
“......”
“그리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주마.”
그제야 늙은 무인이 걸어 나왔다. 걸음이 늦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다. 좌우의 균형감도 좋지 않았다. 더더욱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늙은 무인에게 물었다.
“몇 호더냐?”
“여기선 칠십 이호입니다.”
“몇 호까지 올라갔더냐?”
“십일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넌 네 나이를 기억하더냐?”
“......”
나이를 잊은 녀석이었다.
“왜 싸우더냐?”
“명령이기에 그러합니다.”
“왜 따르더냐?”
“그조차 잊었습니다.”
“날 알더냐?”
끄덕임이 돌아왔다. 녀석에게 내가 어찌 기억되고 있는 지를 물었다.
“믿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승리를.”
“지금도 그리 보이더냐?”
“지금은 다른 이유로 믿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충분히 답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난 여전히 과거였다.
그를 돌려보냈다. 이번엔 가장 신참을 불러냈다. 중간쯤에 있던 녀석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갓 자라난 수염이 연했다. 자르기도, 자르지 않기도 애매한 수염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녀석이었다. 녀석에게 물었다.
“몇 호더냐?”
“구십 칠호입니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더냐?”
“두 번째 여름을 맞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더냐?”
움찔거렸다. 고작 한 번의 사계를 거친 것으론, 그 이전의 세월을 모두 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것은 불안으로 나타났다.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고개가 숙어졌다. 손이 떨렸다. 입술이 안쪽으로 살짝 말려들어갔다. 호흡이 빨라졌다.
그런 녀석에게 말했다.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더냐?”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을?”
“‘패(敗)를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더 있을 것이다.”
녀석은 더 눈치를 봤다.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보다도,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이전보다도 더 심해진 불안이 온몸을 통해 들어났다.
“말해라.”
“...인(仁)을 모른다...들었습니다.”
“직접 보니 어떻더냐?
“생각보다...”
“네 생각보다?”
“아, 소문이 과소 된 듯 싶습니다.”
녀석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칼을 빼내려 했다. 메뚜기들도, 그리고 내 옆과 뒤의 이들도 모두. 나도 손을 들어 올렸다.
- 그만둬라.
가열되는 살기를 단 번에 식혀버렸다. 음(陰)과 한(寒)의 기운이 이런 때에 좋았다.
구십 칠호란 소년을 응시했다. 녀석도 내 눈을 쳐다봤다. 천천히 떨림이 진정되어가고 있었다. 계속 하란 뜻에서 손짓을 했다. 녀석은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는, 갓 아문 상처가 많은 손이 내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훨씬 위험하단 생각입니다.”
“왜?”
“본인이 인간인 줄 아는 신이니까요.”
아, 솔직히 웃음이 날 뻔 했다. 나도 녀석을 따라 입술을 씹었다. 따끔함에 겨우 진정하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무엇을 주재하는 신이냐?”
“인과와 벌입니다.”
“너희의 인과는 무엇이더냐?”
“이미 답했다 생각합니다.”
“누가 답했더냐?”
“저도, 그리고 칠십 이호도 그렇습니다.”
녀석을 돌려보냈다. 구십 칠호란 소년이 돌아갔다. 제일 막내보다도 약한 ‘백 호’를 불러냈다. 비교적 전열 쪽에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둘에 비해 평범했다.
“얼마나 되었더냐?”
“스무 해가 넘었습니다.”
“몇 살이었더냐?”
“잡일을 시작한 게 열 살이었습니다.”
“첫 살인으로부턴 몇 년이더냐?”
“그것이 열 살 때였습니다.”
“누굴 죽였더냐?”
“옆집의 의원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한 이었다. 공허한 살기가 잠시 스쳐갔다. 받은 게 있긴 한데, 그게 치료냐 처방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후회하지 않는구나.”
“예.”
“그래도 후회가 있다.”
“더 잔혹하지 못했기에 그러합니다.”
잠시 스쳐간 것을 불러 잡았다. 과거를 거꾸로 흐르게 하여 현재로 불러들였다.
“너의 끝은 어떻길 바라더냐?”
“...이젠 시월님이라 알고 있습니다.”
“맞다.”
“딱 제가 벌였던 잔혹함만큼만, 버려지지 않고 제게 돌아오길 바랍니다.”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줬다. ‘그리하마’란 말을 했다. 백 호는 목례와 함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일 호는 어디 있더냐?”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눈앞이었다. 전열, 그 중에서도 딱 중간. 내가 늘 서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제일 확고한 눈빛으로 부동한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망부석(望否石)이었다.
“너희는 날 살인자로 보는구나.”
“그러합니다. 그래서 바라는 게 하나일 뿐입니다.”
싱긋 웃었다. 웃음이 크질 않았다. 팔자 주름이 질 만큼 크게 웃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양손, 치켜든 검지로 볼을 찔렀다. 그리고 잔뜩 밀어 올렸다. 아예 고개도 조금 기울였다. 백색 머릿결이 부스스 움직였다.
거울이 없는 게 아쉬웠다.
제법, 상큼한 모습일 테니까.
일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만하구나.”
“그게? 그게 무슨-”
검지로 한기를 불어넣었다. 올라간 입꼬리를 얼리고선 떼어내었다. 그러곤 놈의 미간으로 주먹을 가져갔다. 권법은 아니었다. 지법이었다. 제일 약하고, 다루기 힘든 손가락을 펼쳤다. 새끼손가락이었다.
“너희가 개주인 옆에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다.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냐?”
놈이 얼어붙었다. 목숨을 끊기엔 적었고, 저항하기엔 많은 한기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심장조차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
“너희들 말대로 난 살인자다.”
“......”
“난 사람만 죽인단 말이다.”
침묵은 유지됐다.
경악도, 배신감도 없었다.
어찌할 바 모를 몽유병 환자들만이 남아서 날 스쳐가듯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이 어찌 죽을 수 없는 지를 선고했다.
“어딜 벌레들이 내 손에 죽으려 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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