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인 (15)

“내려, 이 새끼야.”
등에 업혀 있던 놈을 내려놓았다. 령은 뭔가를 보기라도 한 듯 눈이 초롱초롱했다. 그런 놈을 경이만이 이해한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런 경의 눈에 잠깐 어둠이 일렁였다.
곧 녀석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네, 네. 여기서요? 네.”
“......”
“추격은 없대. 일단은 여기서 좀 쉬고 다시 출발하래.”
그러자 앙과 아린 언니가 이마에 맺혀 있던 땀들을 닦아냈다. 앙은 육체적으로, 언니는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모양이었다.
땔감을 모아 불을 지필까 하다가도, 혹여 몰랐기에 그러진 않았다. 챙겨온 짐들 중에서 좀 두꺼운 천이나 옷가지들을 모았다.
“앙아, 언니. 이것들 좀 덮어.”
“...너흰 어쩌고?”
“나는 원체 튼튼하고, 령이 저것도 실컷 업혀 와서 괜찮을 거야. 아, 경이만 좀 끼워주라.”
언니는 뭐라고 하려 했다. 필시 ‘자기가 챙겨야 할 일’이란 말을 할 게 뻔했다. 무시하곤 경이를 불렀다.
“경! 너도 이리로 와서 어서 자라.”
여름이었다. 산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해도 이 정도면 괜찮지 싶었다. 그렇게 잔옷가지들을 조금 정리해 주었다. 곧 조용한 고로롱 소리가 들렸다. 언니의 것이었다.
“경아, 너 뭐하니?”
맏언니에 이어 막내도 피곤했는지 얼마 되지 않아 곯아 떨어졌다. 하지만 조그만 수다쟁이는 아직까지 잠자리에 들지를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령과 경은, 둘 만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기 보단 끄덕임을 나누고 있었다.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신기한 경험이니?”
“언니가 안 겪어봐서 그래.”
“확실히. 겪어봐야 알 문제긴 하지.”
경은 그럴 수 있었다. 조금만이라도 신기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부풀려 말하는 게 녀석의 특징이었으니까.
하지만 령의 반응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성의 등불 같은 녀석이었다.
경이 몰고 오는 신비를 모두 몰아내는 게 령이었다. 좋게 말하면 그런 거였지만, 툭하면 ‘그게 말이 되냐’며 초치는 게 녀석의 역할이었다. 그런 주제에 지금은 둘이서 말도 아닌 끄덕임으로 소통을 해대자 답답할 지경이었다. 녀석의 중얼거림을 곱씹어 보았다.
[...혐오감이 읽힌다면 제 착각입니까?]
[그럼에도 미련이 느껴집니다.]
[저희에게서 믿음을 바라십니까?]
[거짓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한숨을 내쉬었다. 맥락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얘기들을 나눴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 헤매길 원하십니까?]
이런 것들을 보면, 십견이란 사람도 굉장히 골치 아픈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둘처럼 생각이 풍부한 놈들에겐 몰라, 난 별로 만나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조금, 궁금하긴 했다.
녀석들에게 물었다. 십견이란 사람과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거였다. 둘도 대답했다.
“거짓 없는 현재?” 경의 말이었다.
“부조리를 뚫고, 별을 향해서?” 령의 말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이번엔 아예 ‘십견’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했다.
경이 먼저 대답했다.
“굉장히 깊고, 어둡지. 만약 저 밤하늘에 달도, 별도 없었으면 나타날 색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이 잘 읽히지 않는다’는 뜻인 듯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뒤를 령이 덧붙였다.
“굉장히 엄한데.... 또 한편으론 굉장히 자비로운 느낌도 있지. 또 뭐랄까 굉장히 노인 같으면서도... 애 같은 짓궂음도 있고.”
“아, 확실히.”
“역시 종합하면-”
“우리도 잘 모르겠어.”
둘의 사이좋은 협격이었다. 그러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꿀밤을 한 대씩 때릴까 싶다가도, 한숨과 함께 녀석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꼬맹이들아.”
“......”
“이제 그만 자라.”
경이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언니는 안 자게?”
“불은 없어도, 누군가 번은 서야지.”
“그걸 왜 언니가-”
“그 대화라는 거. 생각보다 피곤하지?”
경이 흠칫했다. 녀석은 눈 밑이 검었다. 여기까지 길 안내를 전담했으니 피곤 할 만도 했다. 등을 말없이 밀었다. ‘잘 자라’는 말 한 마디에 몸 작은 소녀도 잠에 들었다.
“혀-...누나보단 내가 서는 게-”
“넌 말번이다. 제일 좆같고, 피곤하지.”
꼬시다는 것처럼 키득거렸다. 령이 녀석도 피식거렸다. 반쯤 자다시피 왔으니 아직 잠이 다 깨진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깨서 번을 서는 것보단, 쭈욱 이어자는 게 피로가 덜할 터였다. 녀석의 잘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너른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업혀 오느라 좀이 쑤셨을 테니 저 정도면 괜찮을 터였다.
“좀 있다 보자.”
“...누나도 피곤하면 말하고.”
“일 없다. 나약한 놈아.”
녀석은 바위에 누웠다. 십견이란 사람도 말을 걸지 않았는지 더 이상 중얼거림도, 잠꼬대도 없었다. 호흡이 길어졌을 뿐이었다. 넷 중에 자는 건 제일 얌전했다.
“하.... 다 재워놓고 보니, 배고프네.”
조그마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고갤 들어 밤하늘을 봤다.
[굉장히 깊고, 어둡지. 만약 저 밤하늘에 달도, 별도 없었으면 나타날 색이라고 해야 할까?]
녀석의 말이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왜냐면, 지금 내가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세 개의 별이 요란히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三六零. 추인』
“별을 보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놀랐다. 바로 지척이었다. 적의가 없었다. 아니, 다가온다는 인기척마저 없었다. 숟가락을 갈아 만든 흉기를 쥔 채, 재빨리 일어서 뒤를 돌아봤다.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그림자의 형상을 취한 무엇이 있었다. 그런데도 묘한 생명력이 있었다. 윤기 나는 머릿결, 값져 보이는 무복. 형태는 흐릿하지만 얇은 붓으로 정성들여 그렸을 것 같은 손과 얼굴이 보였다.
이목구비는 없었지만, 그것만 빼면 사람에게서 딱 색만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십니까?”
“십견이다.”
“...목소리가 아닌-”
“너희가 충분히 가까워졌단 뜻이지.”
그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그저 한겨울 냇가의 물을 벤 듯한 오싹한 감촉과 함께 그의 형상이 잠시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현이라고 했지?”
“...예.”
“조심성이 많은 것은 좋다만, 지금은 좀 자제해 주거라.”
“왜 그리 해야 합니까?”
“쉬고 있는 너희와 달리, 난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그게 가능합니까?”
본체는 지금도 산을 타고 있는 듯 했다. 반면 그의 분신은 나와 차분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두 개가 아닌 이상, 하기 힘든 기예였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고개가 잠시 들렸다가 숙여진 것을 보니 한숨을 쉰 듯 했다. 그는 내 맞은 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네 오라비보단, 구태 녀석의 동생이라고 해야 할 정도구나.”
그가 손을 뻗었다. 활짝 핀 손바닥이었다. 그게 잠시 오므라들더니, 주위에서 잔가지나 마른 잎사귀 같은 것들이 날아와 그와 나의 중심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딱 들어보기만 한 종류의 기예였다.
“경이의 얘기가 다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군요.”
“잔재주지. 이렇게 해봐야 난 불은 못 붙이거든. 그러니 네가 좀 해주거라.”
자기는 양기(陽氣)가 별로 없다 했다. 그래서 화(火)의 성질도 다루지 못한다고.
불을 붙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위치가 노출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이걸 경고하려 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별은 못 보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에게서 더 많은 그림자가 뻗어나갔다. 식충 식물이 벌레를 잡아먹는 것처럼, 곧 이 주변이 통째로 둥근 암막에 휩싸였다.
그러자 그에게서 시선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두 개를 쥐었다. 그것들을 맞부딪쳤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불똥 수십이 튀었다. 대부분은 다시 차가워질 뿐이었지만, 그 중 딱 하나가 마른 잎에 붙어 세를 키웠다. 불의 세는 점점 커져갔다. 적당한 온기가 주위를 감쌌다.
“손재주가 좋구나.”
“십견님만 하겠습니까?”
“말했다시피 난 잔재주다.”
“천하 무인들이 모두 울겠습니다.”
‘그러하더냐?’란 말이 들렸다. 그걸로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짙은 그림자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볼 뿐이었다. 모닥불의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몸도 조금씩 흐트러졌다가 수복되는 것을 반복했다.
“내 재주가 좋았으면, 네 오라비가 어둠에 갇혀 살 필요는 없었을 거다.”
“......”
“이름이 뭐더냐?”
“원..이었습니다.”
“무슨 원?”
“으뜸 원(元)자를 썼습니다.”
‘송원’이란 이름을 그는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마치 경(經)을 외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좀 불편했다.
“내가 미운가 보구나.”
“예.”
“솔직해서 좋다.”
“......”
“원이는, 네게 어떤 사람이었더냐?”
입술을 깨물었다. 코로 공기를 발아들이고, 입으로 내뱉었다. 그러고도 혀를 한 번 더 깨물었다. 그제야 말을 좀 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묵직한 오라비였습니다.”
말이 없었다. 입은 거의가 닫혀 있었다. 먹을 때조차 잘 열리지 않았다. 크게 베어 물고, 오래 씹었다. 말은 눈으로 했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예, 적어도 제게는요.”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나날들. 그런 나날들 속에서 오라비는 뒷골목에서 나름 알아주는 인사였었다. 나이가 많지 않았음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
“꼬맹이들 모아다가 대장질 한 겁니다.”
“...먹잇감...이었겠군.”
“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나, 우릴 노리던 어른들에게나.
두 세력 모두 참 더럽게 싸웠었다.
“원이...가 생각보다 성깔이 있긴 했지.”
“그걸 알 정도면 친하셨나 봅니다.”
“내가 녀석에게 많은 걸 가르쳤으니까.”
기초적인 전투법을 비롯해서 암기, 은신, 심리전, 탐색, 추적 등 무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고 했다. 살수로서의 스승이라 부를 만 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살수로서의 형이라 부를 만 했고.
“...입이 너무 무거운 게 아쉬웠지만.”
그림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얼굴도, 표정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오라비의 침묵에 뭔가 상처를 입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저 내 과거를 계속해서 풀 뿐이었다.
“그러다가 눈에 띈 모양이었습니다.”
“......”
“한 열흘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열 하루째 되던 날, 오라비가 돌아왔다. 비가 참 많이도 오던 날이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했을 겁니다.”
말은 없었다. 젖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오라비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우릴 애새끼 취급하던 놈들도 갓난아기로 만들어 버릴 흉적들이 골목을 물들였다.
“오라비도 잡혀가고, 저도 잡혀갔습니다. 서로 다른 곳으로요. 그제야 전 오라비가 열흘 동안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습니다.
쫓기고, 쫓기다 결국 포기했을 겁니다. 어차피 이렇게 죽든, 잡혀가든. 안 좋게 될지는 뻔하니 딱 한 번만이라도 제 얼굴 보고 죽자 싶었을 겁니다. 뭐, 본인 딴엔 꼬리 밟히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절 찾아왔겠지만...”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붙잡힌 뒤에 적들에게 ‘동생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란 말 따위를 지껄일 리 없었다.
십견이 말했다.
“녀석을 원망하는구나.”
“예, 오라비를 미워합니다.”
“그 원망이 무엇을 향하더냐?”
“하. 진짜 신이라도 되십니까?”
그림자의 얼굴이 날 향했다. 계속 불을 보던 것이었다. 기괴해야 했건만, 그런 게 없었다. 대답을 종용한다고 해야 할지, 아님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동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 모를 모순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의 뜻대로 해주었다. 어찌되었든 털어 넣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제게서 말없이 떠나려 한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림자의 얼굴은 돌아가지 않았다.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말을 계속 했다.
“차라리 같이 싸우자고 했으면, 그랬으면 잡혀가더라도 같은 곳으로 잡혀갈 순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같이 나가고, 같이 싸우고, 같이 잡혀가고, 같이 시간을 견디고. 그러다 같이 죽을 수라도 있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린이란 처자랑 다퉜더냐?”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경이가 얘기해주더구나.”
“...아휴, 저 뇬 저거는....”
경이를 확인했다. 잘도 자고 있었다. 아린 언니처럼 코는 안 골아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무슨 얘기를 하고픈지, 이를 박박 갈아댔다. ‘뽀드득’하는 조그만 소리가 모닥불에 장작 타는 소리처럼 울렸다.
“뭐, 하도 듣다보니 말이다. 저 처자도 네 동생이랑 비슷한 면이 있더구나.”
“예, 말이 없죠. 늘상, 입을 꾹 다물고 모든 걸 자기 혼자서 다 하려고 하죠. 자기가 말이라도 하면 옆에 있는 동생들이 무서워 할까봐, 또 힘들어 할까봐. 그렇게 입을 다문 채 눈으로만 울부짖을 뿐입니다.”
고개를 숙였다.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언니와의 다툼이 생각났다.
[난 제정신이야. 너희에 비하면 말이지.]
[미친 세상에 혼자 순응했을 뿐이야.]
“제가 순응하게 만들었겠죠. 예전 오라비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엔 언니에게요.”
[내게 어둠이 찾아온 건, 딱 한 번이면 족해.]
‘나도 그래’란 말을 했어야 했다. 그 대신 내가 뭐라 했더라? 아, ‘언니 없음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떼를 썼다. 아님 행패를 부렸다고 해야 하나?
“경이가 아니었다면, 언니는 고사하고 저도 밖으로 못 나갈 뻔 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꺾이는 줄 알았거든요.”
그는 내게 직접 나와 보니 어떻냐고 물었다. 난 생각보다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흥분과 두려움 같은 건 있는데... 꿈속에서 괴물을 만났을 때의 그런 감정과 같달까? 여튼 현실 같지가 않았다.
“...여긴 장녀가 두 명이구나.”
“예...?”
“너도 저 처자랑 비슷하단 소리다.”
그럴 리 없었다. 언니는 ‘참하다’는 표현에 딱 알맞은 사람이었다. 반면 난 제 성질에 못 이겨 말보다도 주먹이 앞서는-
“너도 비가 싫지 않았더냐?”
아. 이제야 경이와 령이가 십견이란 사람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조금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원이 떠나간 날, 그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네 오라비가 안 잡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더냐?”
“......”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과 이별을 한 날이다. 그런 날은 참으로 싫을 수밖에 없다.”
“......”
“그래도 원이 녀석은 비오는 날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을 거다.”
그제야 난 그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었다. 그는 답했다.
“비가 자신을 두드리는 소리에, 진창이 된 길을 자신의 발이 두드리는 소리에. 네가 깨고, 그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쳐다볼 수 있었을 거니까. 그래도 얼굴 보고 한 작별이 아니더냐. 녀석은 그걸로 족했겠지.”
세상엔 그조차 허용되지 않는 작별이 많았다. 나를 빼곤 다들 그랬다. 특히나 령이는 더더욱.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미안했다.
“조금 살살 때릴 걸 그랬습니다.”
“재밌구나. 그러니 하나 묻자.”
“말씀하십시오.”
“‘난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란 문장에 대해 어찌 생각하더냐.”
“......?”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왜 묻냐며 그림자를 쳐다봤다. 그도 답했다. 둘과 나눈 대화의 주제가 ‘거짓말’이었다는 거였다.
그걸로 긴 대화를 나눴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말해보거라.”
주먹을 치켜들었다.
“개소리 집어쳐.”
“......?”
“이게 제 대답입니다.”
그림자가 요동쳤다. 특히나 눈이 있을 위치에서 극심한 혼란이 느껴졌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서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법 폭력적인 접근법이구나.”
“혼자 돌아버릴 바엔 이 편이 낫습니다.”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기대를 깨버린 것 같지만, 그는 이 조차도 재밌어 하는 듯 했다. 과연, 짓궂은 느낌이 있었다.
“‘혼자 돌아버릴 바엔’.”
“예.”
“무서운 직관이구나.”
“그런 면은 경이와 비슷합니다.”
“너희는... 서로가 서로와 영향을 주고받은 게 눈에 보인다. 그게 신기하다.”
“생물 관찰일지라도 쓰십니까?”
그러고도 그는 한참을 더 웃었다.
내가 불쾌하다는 듯이 조금씩 씩씩거려서야 그는 웃는 걸 멈췄다.
“사과하마. 대신 좋은 얘기를-”
“저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그럼 이건 어떠냐?”
“......”
“내 얘길 들으면, 대신 불침번을 서마.”
제법 구미가 당겼다. 생각보다 피곤한 성격인 것 치곤, 거래를 할 줄 알았다. 눈을 감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에 관한 얘기는 결국 하나의 귀결에 이른다. 바로 전지(全知)란 없다는 거다.”
“......”
“나도 원이를 몰랐고, 너도 네 오라비를 몰랐다. 네 오라비도 일이 그리 될 줄은 몰랐겠지. 그리고 우린 지금도 모른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뭐냐고 했다. 다소 공격적인 투였다. 주먹이라도 통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랬음 좀 후련하기도, 또 단순하기라도 했을 테니까.
복잡함 속에서 그가 답했다.
이번엔 꽤나 단순한 말이었다.
“하니, 알아야지.”
“...뭐를요?”
“지금 네 옆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
“말했을 텐데? 전지란 없다고.”
그러니 ‘충분’이란 말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십견이란 사람이 하고픈 말은 하나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거라.”
“......”
“또다시 전해지지 못할까 무서워 말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먹먹함에 목만 막혔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이제 네 최선을 다하거라.”
“...그게 뭡니까?”
그의 손이 움직였다.
어둠이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내게로 다가와 눈을 가리고, 몸을 덮었다. 몸이 잠시 뜨는 것 같더니, 뒤로 천천히 기울었다. 화기를 다루지 못하다는 말치곤 묘한 따뜻함과, 포근함이 있었다.
“잘 자거라.”
묘한 사내의 묘한 말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그게,
자장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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