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견추인록(殺犬追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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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금토
작품등록일 :
2023.06.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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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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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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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향이 아렸습니다.


어떻게 슬픈 것에서 단 향기가 나고, 또 그 단 향기에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 그에게서 흐르는 향은 참으로 아리고, 또 아렸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무가 있다.”


[가족의 얼굴은 못 봐도, 그들을 죽인 원수의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신 겁니까? 당신의 얼굴이라도 보라고? 그래서 복수라도 해 보라고?”


‘네가 원한다면 그리해도 좋다’. 그의 속삭임입니다. 마치 찬바람 같습니다.

그런 차가움을 건네는 그의 어두운 몸은, 점점 세세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불어옴에 색과 형체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묵으로 그린 한 점의 그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 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엉망이시군요.”


그건 꽃이라기 보단 짐승에 가까웠습니다. 너무도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고, 너무도 헤진 허물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옷이든, 방립이든요.


소란에 깨어나 눈치만 보던 동생들도 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습니다. 그를 향해 중얼거렸습니다. 볼멘소리였습니다.


“악인은 아니지만 거짓말쟁이는 맞군요.”

“너희의 상상 아니더냐?”

“...그렇긴 합니다.”


주위를 살폈습니다. 비슷한 경악, 하지만 그 세세함에서 차이가 나는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꼴이...”


경의 말이었습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황금 두른 위엄 넘치는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 눈앞의 누더기를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젊으시군요.”


령의 말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고루한 수훈이나 지켜야 할 계명 같은 것을 내려줄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 눈앞의 백색 청년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뭐, 괴물은 아니네.”


현의 말이었습니다.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뒤따랐습니다. 그것을 보니 녀석도 상상한 바가 있었나 보지만, 빗나간 것은 빗나간 대로 괜찮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냥 어른이네요. 딱 아린 누나 같은.”


앙의 말이었습니다. 이번엔 십견이란 사람보다 제가 더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래도 같이 지내온 세월이란 게 있는데 저와 저자를 같은 선상에 올렸으니까요.


“그래, 다들 그렇다는데. 이제 자네 의견을 들어보지.”


그가 손으로 절 가리켰습니다.

악의 꽃이라기엔 지나치게 새하얬습니다.


무엇인가를 표백해버리기라도 한 것 마냥

머리가 조금씩 아파옵니다.


“아린(芽鱗), 제 이름입니다.”


싹 아(芽), 비늘 린(鱗). 꽃도, 과실도. 하물며 잎마저 저물어버린 겨울의 나무. 그 나무가 내년을 기약하며 틔어낼 연한 새끼 잎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굵고, 거칠 뿐인 추한 잎. 그게 바로 제 이름입니다.


“부모님이 왜 제게 이런 이름을 주신 건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철이 들 무렵 돌아가셨고, 철이 들 무렵 지켜야 할 어린잎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동생에게 너무 운치 넘치는 이름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게 너무 거친 이름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삶은 좀 편했을까?


“전 싹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리 되었나 봅니다. 의무를 방기한 응보였는지, 아님 또 다른 기회였는지.”


두 번째 싹들이라도 지켜보라는 뜻이었을까. 정녕 그런 뜻이었을까. 헌데도 나는 그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듯 싶었습니다. 되려, 나를 지킨 것은 그들이었으니까요.


“네 의무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지킬 것은 없습니다.”


동생이 죽은 이상, 그리고 그가 온 이상. 제게 더 이상 지켜야만 할 것들이 남지를 않았습니다.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살아남았지 않더냐? 그 값을 하거라.”

“식모라도 필요하십니까?”

“생육하고, 번성해야지.”

“저 없이도 될 일입니다.”

“...너도 잎이지 않더냐?”


피지도 못할 잎. 색조차 가지지 못할 그런 잎이 무에라고, 당신은 그리 쉬이도 말할까.


“당신에게 어울릴 꽃을 찾으시거든. 매화나 동백을 찾으십시오. 진하게 빨갛고, 연하게 빨간 것이 어찌되었든 당신의 백색에 참 잘 어울 것입니다.”


“그것들이 겨울에 피는 꽃이라 보더냐?”

“아닙니까?”


“그래, 아니다. 그것들은 겨울에 피지 않는다. 날이 많이도 따뜻해져 겨울이 죽어갈 끝 무렵에서나 기지개를 키니,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 해야겠지.”

“그럼 겨울에 피는 꽃은 단 하나도 없군요. 아쉽게 되었습니다.”


뒤돌아 서려 했습니다.

그런 절 향해 그는 손가락을 뻗습니다.


“너 하나 피어있다.”


심장이 꿰뚫린 것 같았습니다.

덜덜 떨리는 입술로 ‘아린은 꽃이 아닙니다’란 말만 겨우 남겼습니다.


“누굴 닮아, 고집이 세고 속이 여려 자신이 가진 것을 한껏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

“그러니 이제 한 번쯤은 흐드러지게 피어보거라. 홀로 아무도 없는 겨울을 보냈으니, 피어날 때에도 방자하고 방약무인하게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억지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얼굴도 연해서, 드러나는 감정도 실로 연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연한만큼 넘쳐난 감정들이 넘실거려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거기서 읽히는 것은 필사적인 절박함, 약간의 분노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미약한 답답함. 그리고 아주 많은 미안함.


그것을 보니 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그가 계속 억지를 부릴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제겐 더 이상 억지를 부릴 힘이 없었습니다.

그를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제게 당신이 어찌 보이는 지를 물으셨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다시 달달한 향이 몰려옵니다.


“자신에게서 달콤한 향이 나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기루의 향보다도 진한 꽃내음입니다.”


‘무슨 꽃이냐’ 물어옵니다.

정신이 아득해져 저도 모르게 아무거나 지껄여 버렸습니다.


“이 향기를 어디서 맡아봤나 했더니만. 꼭 이맘때의 어린 시절, 집 근처 연못에서 피어나던 향이었습니다.”

“......”

“연꽃, 으로 기억합니다.”


아, 말을 하고나서야 떠올렸습니다.

매화보다도 더 아득하던 그때의 향기가.


그에게 한탄을 내뱉었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피시지 그랬냐’고. 그도 답했습니다. ‘어찌 계절을 거슬러서 필 수 있겠냐’고.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아쉬움을 금치 못했기에.


“운예에겐 어쩌면 매화보다 어울릴 만한 꽃이 한 송이쯤은 있지 않을까. 그리도 바랐는데... 그걸 오늘에서야 보나 봅니다.”





『三六三. 추인』





인동(忍冬)을 겨우 끝냈습니다.


사내에게 있어서 늦게 드러난 무엇만큼이나, 저에게 겨울은 그 반대의 계절이 찾아와서야 겨우 끝났습니다.


여름의 정중앙. 밤이면 하늘에 은하수 흐르고, 유독 밝게 빛나는 삼별의 삼각형과 그 삼각형 속에서 피어나는 별들의 구름에 온 정신을 빼앗겨, 시간과 더위를 잊고야 마는 그런 여름에서야.


추위가 물러간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되려던 여름은 또다시 중단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르게 내리고, 이르게 멎은 줄 알았던 올해의 매우(梅雨). 그 긴 비가 다시금 찾아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습했습니다. 땅이 오래도록 머금고 있던 영탄(詠嘆)의 숨결을 위를 향해 뿜어냅니다.


어두웠습니다. 하늘도 오래도록 참고 있던 정회(情懷)의 눈물을 흘리기 위해 눈을 감았습니다.


어찌하여 여름의 밤하늘이 그리도 짧고, 또한 그 짧은 만큼 어찌하여 그리도 화려한가 했더니만.


아무래도 여름은, 특히나 매우(梅雨)의 나날은 하늘과 땅이 조용한 밀회를 나누는 때였나 봅니다.


불길함이 몰려옵니다.

그것은 밀회의 순간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다는 어떤 의지와도 같았습니다.


천지의 살심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미끼-”

“산 아래에 마침 연꽃들이 피었더구나.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꽃으론 썩 괜찮을 것이다.”


그는 제 말을 끊어냈습니다. 일부러였습니다. 동생에게서나 겨우 보던 거짓말의 흔적이 그의 얼굴에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암막이 걷히면, 길 따라 쭉 달려라. 그럼 헤매지 않을 거다.”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읽어내려는 듯한 찡그려진 눈과 미간. 수천 보의 거리를 읽어내는 듯한 그가 상황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 두 손을 뻗었습니다. 그의 손은 칼로 향했습니다.


“내 제자나, 형제들이 얼마나 가까이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

“앙아, 경아 이리와.”


“령과 경이 또래의 애가 셋. 현이 보다 조금 큰 놈이 하나. 모두 내 제자들이다.”

“현아, 령아. 짐은 챙길 필요 없어.”


“그 외에도 외모가 너저분한 놈, 그리고 그 놈과는 반대로 까탈스런 성격대로 깔끔하게 생긴 놈 하나가 있다. 그놈들은 내 사형제들이다. 그들을 만나면 상황을 전해라. 너희 용모에 대해선 내가 전달해 놓은 바가 있으니 크게 의심하진 않을 거다.”


암막이 떨렸습니다. 떨어진 빗방울들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목소리로 인함이었습니다.


“아들아. 빌어먹을 아들아.”


암막이 깨집니다. 날카로운 소리가 주위를 휘저어놓습니다. 그도 칼을 뽑아냈습니다.


시야의 저편에서 뻗어나는 손길 같은 섬광이 칼날을 강타합니다. 미처 다 갈리지 못한 묵이 옆으로 튀깁니다. 빛은 없습니다. 그저 번개 칠 때 울리지 못한 천둥이 늦게나마 울립니다. 눈앞으로 짙은 회색의 무엇이 날립니다. 그가 겨우 뽑아낸 것이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마라. 계속 달려라.”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이놈 새끼를 남겨놓고 또다시 비겁하게 살아가거라. 너희들이 가족들을 받쳐 얻었던 삶처럼 말이다.”


우리의 뒤를 향해야 할 그림자가 앞에서 보였습니다. 섬광이 사라져서야 재차 굉음이 들렸습니다. 귀신의 곡성과도 같은 날카로운 소리였습니다. 산자의 머리를 울립니다.


“누나... 이거 어떻게-”

“십견이란 사람은 어떻게 해?”

“언니, 차라리 나라도 남는 게-”


산 자들, 그 중에서도 어린 애들인 내 동생들도 비명을 질러댑니다. 저는 소리를 버럭 질러 말을 끊어놓습니다. 살아야 한다고. 얼른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저분한테 도움이 된다고. 주인도 소리를 지릅니다.


“구차하게 삶을 빌어먹는 놈들, 이놈 꼬라지를 보거라. 거지가 따로 없거늘 너흰 그런 놈한테 삶을 구걸하더냐?”


현과 령의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때로 억세진 손이었기에 녀석들의 울컥함을 누를 순 있었습니다.


“넘어가지마.”

““......””


“저 늙은이 말대로, 우린 방해야. 도움은커녕 발목-, 아니 저분에게 형틀이 되어 목을 조를 거야. 그러니-”

“언니, 괜찮아. 다 이해해.”


현이 손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제 손목을 붙잡습니다. 그러더니 씨익 웃었습니다. 분노가 서려 있지만, 적어도 그걸 삼킬 수는 있었습니다.


“여기서 살아나가야, 다시금 기회를 노리지. 맞지? 우리가 더 강해질 그런 기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젠 령의 손이 제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그래, 살아야 저런 부조리가 활개 치는 것을 막을 수 있겠지.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달리자.”


현이 앙을 업었습니다. 령은 경을 업었습니다. 둘은 그러고도 제 손목을 붙잡은 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둘의 전속력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 누구도 버리지 않은 채 가장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렇게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 연꽃 피는 저 아래의 땅으로 향할 수 있나 했지만, 삶이란 것은 늘 희망으로만 차있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 기습이었거늘. 겨우 그 칼 한 짝 날려버리는구나.”


늙은이의 한탄이 빛살과 함께 저흴 스쳐지나갑니다. 그 빗살은 무엇인가를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동방 섬나라의 심중(心中)과도 같은 동반 소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제 시야를 벗어납니다. 십견이란 사내의 말대로 달려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놓쳐버린 회색이 절벽의 너머로 떨어지는 것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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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10 62 1 15쪽
401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9 51 1 22쪽
400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8 58 2 27쪽
399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7 50 1 13쪽
398 용이 오르고 남은 자리 24.09.05 51 1 18쪽
397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9.03 54 1 23쪽
396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9.02 55 2 19쪽
395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9.01 49 1 17쪽
394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31 49 1 15쪽
393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30 46 1 17쪽
392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9 50 2 16쪽
391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7 50 1 14쪽
390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5 45 1 16쪽
389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4 49 1 15쪽
388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3 52 2 15쪽
387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2 47 1 16쪽
386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21 50 2 19쪽
385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9 49 1 17쪽
384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8 61 1 16쪽
383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7 60 1 13쪽
382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6 53 1 14쪽
381 내가 아직 미친 것인지, 24.08.15 53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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