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교가 여섯? 그렇다면... (2)

2, 마교가 여섯? 그렇다면···. (2)
“누가 와요.”
연서화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꽃구경을 나왔다가 영문도 모른 채 납치당한 상태였다. 하나 납치범들은 마차 안에 가둬놓기만 했을 뿐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연 소저, 내가 아까는 술을 마셔서 부지불식간에 당한 거요. 이번에 문을 열면 기습을 해볼게요.”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죠.”
“연 소저의 뜻대로 합시다.”
누가 보면 대단한 계획이라도 세운 줄 알겠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렸다.
복면인은 경계 없이 마치 토끼 우리를 살피듯 고개를 들이댔다. 저 모습만 바도 연서화 일행의 성취가 얼마나 하찮고, 별 볼 일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다섯 명. 모두 나와라. 저녁 먹을 시간이다.”
만사가 귀찮은데 배는 채워서 무엇하랴.
백현은 연서화와 일행들이 마차 밖으로 나가는 광경을 보며 물었다.
“안 나가면 안 됩니까?”
복면인은 눈빛이 혼탁하고, 눈가가 보랏빛으로 번들거리는 걸로 보아 독공이라도 수련한 듯했다. 저런 자들은 오랜 세월 독기를 받아들였기에 이성보다 감성에 충실할 터였다. 그러니 애송이가 반발하는 모습에 당장 머리를 쪼개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밥은 오른손만 있으면 먹을 수 있을 터.”
백현은 복면인의 싸늘한 눈빛이 왼쪽 손목에 닿는 순간 오래전 외팔이로 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불편함을 떠올리는 순간 재빨리 이설의 뒤로 따라붙었다.
진륜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쓸데없이 자극하지 마. 집에 안 갈 거냐?”
“어. 미안.”
“크흐, 너 진짜 돌아가면 두고 보자.”
백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생하면서 쌓은 경험은 백현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정보를 긁어모았다.
‘빈 수레, 관제묘, 복면, 장갑, 독인.’
그렇기에 마차를 나선 후 공터를 지나는 내내 모든 정보가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원치 않아도 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어찌하랴.
‘재밌는 납치네.’
정상적인 납치 상황과 모든 것이 반대였다.
복면인은 일행을 공터 중앙으로 데려갔다.
원래 일행이 계획했던 달구경과 흡사했다.
달빛이 들이치는 가운데 모여 앉아서 준비한 음식과 술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복면인들이 멀찍이서 지켜봤고, 음식과 술 대신 풀죽이 놓였을 뿐이다.
진륜은 불만을 토로했다.
“싱겁고, 쓰고, 젠장. 도대체 언제 풀려나는 거야.”
연서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납치한 이상 요구 조건이 있을 거예요. 아마 돈을 원할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아니라면 그것대로 큰일이죠.”
그때 이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을 가져올 사람이 없어요.”
“뭐?”
진륜은 대뜸 호덕경을 노려봤다.
마치 호덕경은 물론이고, 집안의 재산까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우스운 건 호덕경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는 점이다.
“아니야. 아버지가 이런 일에 돈을 아끼실 리가 없어.”
한데 이설은 말문이 트였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저들은 호위와 종복을 모두 죽였어요. 한데 저들 중 하산하여 납치 사실을 알리거나, 돈을 받으러 간 자가 없어요.”
납치를 모르면 실종이고, 사건이 아니라 사고였다.
“아마 일반적인 납치가 아닌 듯해요.”
연서화가 지금껏 살펴왔던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낀 녹피 장갑과 피부색을 보면 독공을 익혔을 수도 있어요. 아마 말투가 어눌한 자는 피독주를 물고 있을 거예요.”
“독공? 그거 미친놈들만 익히는 거잖아.”
진륜이 화들짝 놀라자, 연서화가 자중시키며 말을 이었다.
“쉿! 그렇다면 마냥 구조만 기다릴 수 없겠네요.”
“그럼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백현은 일행이 심각하게 논의하는 모습에 풀죽을 휘휘 저으며 실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애송이들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슬슬 눈치를 챘구나.’
풀죽만 봐도 전후 사정이 보였다.
풀죽은 양곡에 풀과 나무뿌리를 섞었다.
나무 그릇 또한 생나무를 쪼개서 속을 파낸 것이다.
준비한 식량은 모자랐고, 그릇은 부족했다.
일견하기에도 계획되지 않은 납치였다.
그때 호덕경이 예상치 못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마도 마교에서 온 것 같아.”
백현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벽촌의 시골뜨기들만 모아놔서였을까.
독공을 거론한 것만으로도 마교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저 나이 때에 나쁜 놈이라면 마교부터 떠올릴 만해.’
저들은 모른다.
마교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하고, 폐쇄적인 집단인지 말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납치된 수백산은 절강성에 자리했고, 마교는 세상 끝 천산에 위치하지 않던가.
한데 일행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아니. 하필 왜? 절강성은 중립 아니었어?”
저런 긍정적인 반응은 예상할 수 없었다.
중립 문제가 아니라 마교가 절강성에 놀면 무림맹이 그냥 두고 볼 리 없다고요. 아무리 저들이 강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이건 너무 무지하지 않은가.
“돼지야. 방금 뭐라고 했냐?”
호덕경은 돼지라고 불렀음에도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매담자들이 얼마 전 천마육천 중 계림마교에 비상이 걸렸다더라. 누가 도망쳤다고···.”
“천마육천?”
백현이 더듬거리며 묻자, 호덕경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강호에 퍼져 있는 마교가 여섯 개라 천마육천이라고 부르잖아.”
호덕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모습이 느릿하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백현은 지금껏 잿빛으로 보였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변하는 듯한 기분에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마교가 여섯이면 천마도 여섯.’
갑자기 생존 본능이 샘솟았다.
천마의 힘은 어느 세상을 가도 정해져 있었다.
절대적인 무력.
한데 천마가 여섯 명이라면 그 무력도 육분지 일로 줄어들지 않을까.
백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한 명씩 따로 처리하면 내가 이길지도···.’
천마(天魔) 위지천.
놈은 완벽했다.
전생이라는 축복이자, 저주의 당사자가 수많은 생을 반복해서 쌓아 올린 힘에도 밀리지 않았다. 한데 이번 세상에는 마교가 여섯이고, 천마도 여섯 명이다. 그렇다는 건 위지천도 평상시 마주했던 상황과 다를 터였다.
‘솔직히 위지천이 멀쩡했으면 마교가 쪼개졌을 리 없잖아?’
이미 마교를 일통하고, 정파를 짓밟으면서 학살극을 벌이고 있었으리라. 그러니 역으로 생각하면 위지천은 백현이 알던 것보다 약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아직 미성숙한 위지천을 떠올리는 순간 꼬리뼈부터 쾌감이 치솟았다.
그 사이 복면인이 다가왔다.
“그만 떠들고 돌아가라.”
“예!”
연서화와 일행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전만 해도 무기력했던 백현이 누구보다 빠르게 마차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한데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더니 관제묘 앞에서 멈췄다.
“쟤 왜 저래?”
진륜은 혀를 찼다.
“내가 말했잖아. 아까 기절한 후부터 맛이 갔어.”
하나 백현은 저들은 물론이고, 복면인의 서늘한 눈빛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이거 뭐였지?’
익숙한 냄새였다.
관제묘에서 전해지는 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은 분명 독이다. 강호에서 독을 쓰는 자가 욕을 먹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랴. 하지만 뒤통수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묘한 익숙함이 전해졌다.
학정홍, 부각산, 이패독, 설련화기, 용린분 등.
강호에서 손꼽는 독을 떠올렸다.
수십 회의 삶을 살아왔기에 아는 독도 많고, 복용한 독도 흔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찰나간 기억을 더듬는 사이 벼락이 치듯 한 가지 독물이 뇌리를 스쳤다.
‘이거!’
백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내가 만들었던 독이잖아.’
*
오래전 정사마의 무공으로도 답을 찾지 못해 독공에 손을 댔다. 독룡괴조(毒龍怪祖)라 불렸으니 독중제일인이라 자부할만했다. 전생의 경험과 정보까지 긁어모아서 고금에 유례가 없을 만큼 지독한 독을 만들었다.
불령(佛靈).
이것이라면 천마도 녹여버릴 것이라 확신했다.
- 지독하고, 확실하고, 깔끔하다.
체내에 스며드는 순간 죽는다.
심지어 목표를 없애면 공기와 함께 흩어졌다.
깔끔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 한 방울에 한 놈.
불령은 증식되지 않고, 처음 접한 걸 녹였다.
그것이 토끼든, 호랑이든, 같은 부류인 독물이든.
딱히 보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마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을 뿐이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운 후 비장하게 은신처에서 빠져나왔다. 한데 하산하는 순간 생각보다 많은 환영인파가 등장했다.
무림맹이었다.
독으로 세상을 파멸로 이끌 계획을 모를 줄 알았냐며 천라지망을 펼치더라.
독룡괴조는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죽었다.
오십 년의 연구가 개죽음으로 끝난 셈이다.
‘살기 위해 불령도 뿌렸는데.’
평생의 숙원을 담아 만든 불령 다섯 방울은 다섯 명을 녹인 후 흩어졌다.
그렇기에 불령은 짜증 나는 기억으로 남았다.
‘이야, 이걸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줄이야.’
납치당했다는 현실마저 잠시 잊을 만큼 당황했다.
다른 세상의 강호였다.
그마저도 본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을 모아 만들어낸 독이다.
한데 그것이 현세에 등장했다.
의아함은 잠시였다.
체내의 탁기가 불령에 반응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거라면 몸속의 탁기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겠어.’
기분 좋은 상상에 하마터면 콧노래가 나올 뻔했다.
‘마교는 여섯으로 나뉘었고, 썩은 몸을 치료할 방법도 찾고···.’
이거 너무 좋은 세상이지 않은가.
지금 기분이라면 처음 눈을 떴을 때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킨 작자의 목숨조차 살려줄 정도였다.
“뭐해?”
백현은 복면인의 으름장에 빙긋 웃었다.
속내를 밝힐 수 없었기에 핑계를 댔다.
때마침 달빛 아래로 연서화가 또렷한 이목구비와 흰 피부를 드러낸 채 미색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예뻐서요.”
복면인의 눈매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쯧,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들어가.”
백현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마차로 향했다.
“저, 저 새끼가.”
진륜은 연서화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 이를 갈았다.
‘마차 안에서 보자.’
백현은 마차에 들어서자마자 선언했다.
“탈출하자.”
일행은 백현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만 끔뻑였다.
진륜은 그간의 분노를 표출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대뜸 백현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입 닥치라고 했지!”
백현은 혀를 찼다.
애송이의 주먹을 무게로 환산한다면 솜털과 같으리라.
퍽!
진륜은 벌떡 일어났던 것보다 빠르게 다시 주저앉았다.
백현은 명치를 부여잡고 헐떡거리는 진륜에게 안기듯 몸을 던지더니 무릎으로 턱을 후려쳤다.
빠각-
일행은 한 호흡에 끝나버린 싸움을 보고 넋을 잃었다.
어느 세상이든 최고의 지배 수단은 공포와 무력일 터였다.
“탈출하자.”
폭력과 승리로 인해 말에 무게감이 생겼다.
연서화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껏 기죽어 있던 호덕경이 히죽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와아. 저게 뭐람?”
백현은 호덕경을 힐끔 보며 말했다.
“너도 맞을래?”
“아니.”
“그럼 추임새 넣지 말고 입 닫아.”
연서화와 호덕경은 입을 닫았고, 이설은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던 중 연서화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래도 친구끼리 함부로 손쓰는 거 아니에요.”
백현은 기절한 진륜을 보며 혀를 찼다.
“그 말은 내가 처맞을 때 해주지 그랬냐.”
호덕경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나도.”
백현은 미간을 좁혔다.
“이 새끼가.”
“그냥 그렇다고.”
덩치가 산만 한 놈이 깐족거리기만 하니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나 상황을 보아하니 천마육천에 관해서 설명해줄 사람이 저놈뿐이다.
“천마육천이 뭔지 설명해 봐.”
호덕경은 거품을 물고 기절한 진륜을 힐끔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백 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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