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번째 동료.

4, 첫 번째 동료.
옛 기억을 뒤져보면 사술도 제법 사용했다.
천마만 죽일 수 있다면 강호 전체를 불태워도 좋다고 여겼던 때였다. 하나 그 끝은 언제나 실패였고, 축생의 삶으로 돌아왔다.
악행은 언제나 돌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게 업이다.
그때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현은 울화가 치밀었다.
누구보다 불령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불령은 결코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한 번 닿은 존재를 완전히 없앤 후에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 저들은 불령을 독화로 개량하여 끝없이 증식하도록 만들었다. 그 말인즉슨 저 여인은 영겁에 걸쳐 끊임없이 불령으로 고통받으며 독을 퍼트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왜냐?’
여인은 말이 없다.
하나 통했으리라.
애초에 여인의 허락이 없었다면 백현이 순조롭게 불령을 이끌지 못했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백현을 배려하듯 육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불령을 내어준 셈이다.
‘내 몸의 탁기를 인지하고, 없애주고 싶었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작은 물결쯤은 개의치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처럼 끝없이 불령으로 탁기를 밀어낼 뿐이다.
‘이제 나는 내 안의 탁기까지 더해서 네게 불령을 되돌려줄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여인의 오른팔이 백현의 왼팔에 뭉쳤던 불령과 탁기를 스스로 빨아들였다. 대주천을 끝내는 순간 밑 빠진 독에서 물이 새어 나가는 것처럼 거침이 없다.
‘너는 다시 괴물의 형상이 되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한없이 오랜 세월 동안 독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처음으로 반응이 돌아왔다.
여인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백현은 불령과 탁기가 절맥 한 부분만큼 빠져나가는 순간 입을 열었다.
“살고 싶으냐?”
여인의 눈매가 더 심하게 떨렸다.
아무래도 눈을 감고 싶은 듯했다.
“살고자 한다면 살 수 있다.”
쩡-
백현은 미간을 좁혔다.
탁기와 뒤섞인 불령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인이 동요한다는 증거였다.
하나 여전히 눈을 감으려 했다
백현은 여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네가 살려면 불령을 배출해야 하고, 불령을 배출하면 사람들이 죽을 것을 걱정하는가?”
눈 떨림이 멈췄다.
“살고 싶은 건 죄가 아니다.”
백현은 자신이 여인의 마음을 알 듯 여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전생 이후 처음으로 솔직히 속내를 드러냈다.
“나야 네게 탁기만 떠넘겨도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런데도 네게 제안을 하는 이유는···.”
눈을 감았다.
낯부끄러울 속내보다 여인의 진심을 더 제대로 살피고 싶어서였다.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현은 히죽 웃었다.
여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 솔직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동료가 되고 싶어서다. 친구가 되고 싶어서다. 너는 빚을 졌을 때 잊지 않을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여인은 불령의 운용 외에 처음으로 자의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허락이고, 믿음이다.
“네가 나를 믿었으니 나도 믿고 이야기하마.”
백현은 여인의 안위를 개의치 않는 것처럼 불령과 탁기를 밀어 넣었다.
“불령은 본래 독이 아니라 치료제다.”
*
독룡괴조보다 이전의 오래된 기억이다.
눈을 떠보니 불제자였다.
아쉽게도 소림이나 아미처럼 명문거파는 아니었다.
오태산에 난립한 수많은 사찰 중 불광사의 그릇 닦는 노승으로 전생했다.
노승이다. 노승.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다리 중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그릇만 죽어라 닦아야 했다.
한데 그런 삶일지언정 배울 점이 있었다.
불광사의 주지승은 생불(生佛)이라 불렸다.
오태산 일대의 약초를 공부하고, 독초를 복용하여 해독제를 만들었다. 그는 공양에서 깨달음을 얻어 만민의 평온과 안정을 기원했다.
공양(供養).
흔히 부처에게 음식을 올리는 행위였다.
하나 주지승은 세간에 알려진 공양이 아니라 불법에 적힌 본래의 취지대로 행동했다. 초가 몸을 불태워 빛을 밝히듯 자신을 그릇으로 삼아 만민을 구제하고자 했다.
불령은 그런 주지승이 꿈꾸는 경지였다.
“네가 살아있는 건 저 악인들의 능력도 아니고, 네 의지도 아니다. 불령은 독물과 독초로 만들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이라는 독을 녹이는 치료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인의 눈매는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떨렸다.
“부처의 화신으로 모든 업과 역리를 품어 정화한 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경지가 곧 불령이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인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백현은 다독이듯 말했다.
“모든 것이 부처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이 세상에 악인이 왜 있을 것이고, 전쟁은 왜 일어날 것이며, 천마는 왜 그렇게 강하겠느냐?”
여인의 양 손목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홀로 애쓰지 마라. 홀로 짊어지지 마라.”
백현이 불령과 탁기를 밀어넣는 순간 여인의 전신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이내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고, 물집으로 인해 거대한 고깃덩이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 여인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다.
희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백현에 대한 믿음으로 몸을 맡겼을 뿐이다.
믿음의 무게만큼 진중해졌다.
“지금부터 네가 임맥이 되고, 내가 독맥이 되어 불령과 탁기를 동시에 휘돌린다. 우리가 임맥을 타통하듯 하나의 원으로 운기 할 수 있다면 불령과 탁기를 지울 수 있을 거야.”
고오오오오-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다.
백현과 여인은 불령과 탁기가 머물 때마다 번갈아 가며 퉁퉁 부었다.
그리고 불령과 탁기는 조금씩 대기 중에 흩어졌다.
그 증거로 지금껏 방관자처럼 밀려났던 자색 독무가 조금씩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우리 둘이라면 버틸 수 있어.”
백현은 여인에게 알 수 없는 유대감을 느꼈다.
- 전생에 갇혀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자.
- 불령에 갇혀 영겁의 세월의 고통받을 자.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는 건 당연했다.
콰쾅!
그때 두 사람의 교감을 방해하듯 관제묘의 문이 부서졌다. 시뻘게진 얼굴로 등장한 장령은 관제묘 내부를 확인하자마자 일갈을 내질렀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 감히 나의 불령독화를 건드려?”
놈은 악귀처럼 살기를 줄줄 흘려냈다.
“누가 보냈냐? 계림마교냐? 황천마교냐? 아니면 무림맹에서 왔느냐?”
“미친놈. 네가 납치했잖아.”
백현은 고통 속에서도 코웃음을 쳤다.
하나 장령은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꾸민 거냐? 설마 내가 불령을 훔쳐서 독계림을 탈출한 것도 네 놈들의 계략인가?”
“괴조, 불령, 독화.”
흥분한 놈에게는 화두만 던져줘도 알아서 떠들어대기 마련이다.
“네놈이 어찌? 사령괴조의 불령을 아는 것이더냐?”
백현은 미간을 좁혔다.
일단 별호가 다르다.
“흥! 천종봉의 망아곡을 어찌 모를까.”
독룡괴조 시절 백현이 은거했던 장소였다.
한데 장령은 한순간 하얗게 질린 채 달려들었다.
“망아곡까지 알아? 결코 살려둘 수 없다!”
백현은 미간을 좁혔다.
‘이름은 다른데 장소는 같아?’
차라리 모두 같거나, 모두 틀렸다면 마음이 편했으리라. 하나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장령이 관제묘 내부에 가득한 자색 독무를 휘감은 채 일장을 내질렀다.
쇄애애액!
백현은 찰나의 순간 여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
‘믿어라.’
‘믿습니다.’
백현은 불령과 탁기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후 여인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을 노렸다. 기경팔맥에서 기가 흘러나가는 순간 십이경맥 중 수양명대장경을 찍었다.
파팟!
여인의 몸속에 가득한 불령과 탁기를 인도하듯 거골혈을 시작으로 곡지혈까지 뚫어버렸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어깨부터 손까지 열여섯 개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 여인은 한쪽 팔이지만 자유를 되찾았다.
“시작은 선했고, 과정은 악했으니.”
백현이 여인을 깨우듯 일갈을 내질렀다.
“그 끝의 선악은 네가 정해라!”
여인은 백현이 흘려보낸 기운이 장심에 이르는 순간 손을 활짝 펼쳤다.
쩡!
손바닥을 중심으로 흘러나온 바람이 동심원을 만들었다.
“어린놈이 잔머리를···.”
파스스스슷!
장령은 손부터 핏물로 녹아내리더니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자색 독무가 핏물과 육편을 집어삼켰고, 이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기세 좋게 달려든 것 치고는 더없이 허무한 최후였다.
파팟!
백현은 재빨리 혈도를 역으로 짚은 후 여인의 손을 맞잡았다. 입가의 미소는 난적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또 하나의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너도 느꼈지?’
여인의 입매가 살짝 휘어졌다.
불령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본래 장령이 개량한 불령은 독화가 되었으니 끊임없이 증식해야 했다. 한데 불령은 장령을 가루로 만든 후 탁기와 함께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욕심많은 놈이라 불령에게서 떨어지지 않는구나.’
탁기는 언제 백현의 몸을 욕심냈냐는 듯 불령에 달라붙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몸도 상했으리라.
한데 불령이 증식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소멸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탁기와 비율만 맞추면 고스란히 내공으로 치환될 터였다.
이것은 여인의 기연이다.
‘네가 모든 기운을 받아 간다면 내 몸은 고금에 유례가 없는 자연지체가 될 것이다.’
전설의 천무지체나 십전무적체도 부럽지 않으리라.
이것이 백현의 기연이다.
“지금부터 청령만상기결을 전하겠다.”
오태산 불광사의 주지승은 평생에 걸쳐 항마능다라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독룡괴조 시절 첨삭하여 어떤 몸에도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심법을 창안했다.
이것이 청령만상기결(淸靈萬象器結)이다.
백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의 나였다면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 몸은 새로 태어났다고!”
여인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고, 소리 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백현은 혹시 모를 미래를 떠올리며 겸연쩍게 한 마디를 흘렸다.
“나한테 빚진 거야. 평생 갚아야 할 빚.”
- 작가의말
더 늦기 전에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수정
- 전생 전 동료의 죽음에 깨달음을 얻음.
- 전생 후 동료들과 함께 천마를 죽이기로 계획.
- 불령의 존재를 인지한 후 일행으로 삼을 계획.
- 두 사람이 영통하여 긴밀한 관계로 발전.
- 백현의 언행이 주도적으로 변경.
이후 내용은 이전과 달라지기에 부득불 삭제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재는 아침이니 최대한 빨리 이전 분량을 따라잡을 수있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__)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