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혈공제(穴功祭).

7, 혈공제(穴功祭).
장 총관은 광조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최상급 소흥주입니다.”
“아니! 이런 귀한걸.”
“우연히 연무장을 지나다가 소장주께서 수련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고작 칠주야가 지났는데 권격에 힘이 실렸고, 걸음마다 흔들림이 없더군요.”
광조는 손사래를 쳤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마음에 그저 작은 불꽃을 심어줬을 뿐이지요. 아닌 말로 아팠다고 해서 체력을 걱정했는데 아마 예전부터 틈틈이 단련했을 겁니다.”
장 총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군요. 소장주를 보필해야 할 사람이 아무것도 몰랐다니. 이거 제가 다 광 사부께 부끄럽군요.”
두 사람은 백현에 관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하나 광조의 발걸음은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무거웠다.
“하, 이것 참.”
칠주야 동안 백현이 익힌 권장법만 다섯 개였다.
그뿐 아니라 강호의 암묵적인 규칙이나, 정세도 아는 만큼 전했다. 한데 백현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걸 흡수했고, 이내 결과로 보여줬다.
“이걸 어찌한담.”
그는 입맛을 다시며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백현이 수련 중이다.
하나 제자를 마음껏 부르는 대신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중얼거렸다.
“팔방격권, 아니 중선장인가? 아! 비류장이로구나.”
그가 백현에게 알려준 건 소림의 마보참춘공에서 비롯된 마보십육각이다. 소림의 기본무공인 마보참춘공이야 강호에 널리 알려진지 오래였다. 민간에서는 마보참춘공을 각자의 방식으로 변형하거나, 첨삭했다.
“어느 방향에서 밀어도 태산처럼 끄떡없겠구나.”
한데 소림에서 마보참춘공을 가르치는 기간이 최소 반년이다. 반년을 단련하면 무공을 펼칠 때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보십육각은 그마저도 단축해서 백 일의 수련이라 불렸다.
광조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맙소사. 권법과 장법의 변화가 더없이 능숙하다니.”
본래 무공은 흐름이다.
더 강해지거나, 더 느려지거나, 더 빨라지거나.
한데 백현은 무공의 변화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말인즉슨 마보십육각을 대성했다는 뜻이다.
불과 칠주야만에 말이다.
한데 수련을 지켜볼수록 어딘가 모르게 달라졌다.
“회선십이로는 저게 아닌데.”
회선십이로(廻旋十二路)의 요체는 걸음의 방향이 정면보다 사선으로 시작된다. 해서 상대의 좌우를 끊임없이 노리고, 궁극적으로 배후를 잡는 것이 목표였다.
한 마디로 빙빙 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발이 꼬이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자칫 잘못하면 어지러워서 제풀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더 좋아졌잖아.”
광조는 눈을 끔뻑이면서도 백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광경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회선십이로를 근사하게 만들어줬다.
“위력만 갖춘다면 마치 군림하는 듯하구나.”
그때부터 수련이 끝날 때까지 백현의 움직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백현을 돌려보낸 후에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서 흉내 내기 시작했다.
“호오, 편해. 생각보다 쉽잖아.”
위력 자체가 상승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보기 좋았다.
아닌 말로 백현의 회선십이로만 제대로 익혀도 고수처럼 보일 터였다.
“흐음.”
그때 담장 너머로 외출하는 백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조는 황급히 백현의 옆에 섰다.
“어디 가십니까?”
“크흠, 제자야. 네가 지난번에 험한 꼴을 당할 뻔했잖느냐. 염려되어서 함께 바람이나 쐬러 가려 한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어디를 가는 것이냐?”
백현은 손에 든 보퉁이를 흔들며 말했다.
“빌린 물건을 돌려주러 불귀장에 가려고요.”
“아하! 불귀장 근처에 괜찮은 다루가 있다. 그곳에 있을 테니 볼일을 보고 오려무나.”
“그러시죠.”
광조는 백현과 함께 저자를 걷다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강호도 예전 같지 않구나. 마냥 열정과 근성으로 이란격석을 논할 수도 없게 되었어.”
“혈공 때문이겠죠.”
“그래, 이제 혈공으로 인해 달걀이 아니라 강철로 바위를 칠 수 있게 되었으니 옛 수련 방식을 고집하는 건 낭만 좇다가 얼어 죽는 꼴이란다.”
백현은 광조를 힐끔 본 후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회선십이로를 개량하여 선보인 건 광조를 조금이나마 진짜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백현의 무위가 올라갈수록 광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이고, 눈으로 확인하려는 자들도 생길 터였다. 그때 광조가 회선일기보(廻旋一氣步)만 제대로 펼쳐도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이제 명가의 후예나 부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하늘의 보살핌이지. 네 자질이 충만하고, 육신은 빛이 나니 혈공을 받아들일 날이 머지않았다. 사실 혈공도 시기가 있으니 지금처럼 쭉쭉 성장할 때 받아야 약빨이 제대로지. 만약 네가 정말 강해지고 싶다면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편의를···.”
이건 사기꾼을 사부라 불러줬더니 거간꾼으로 탈바꿈하는 모양새였다.
“장주께서 돌아오면 논의해보죠.”
어차피 열흘 후면 광조는 떠날 것이다.
한데 광조는 여전히 미련이 남았나 보다.
“굳이 장주의 주머니를 빌릴 필요 없이 네 선에서 저렴하게···.”
백현이 광조의 말을 끊었다.
“혈공을 받을 때 육신의 단련이나 근골의 자질에 따라 쌓이는 내공의 양이 다르다면서요.”
“그, 그렇지.”
“제가 요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했으니 성과를 한 번 봐주시죠. 그래야 나중에 혈공을 받았을 때 어느 정도나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을 하죠.”
광조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초심자가 늘 겪는 자만이군. 하지만 이 스승이 네 몸 상태에 맞춰 가르치는 중임을···.”
백현은 시비가 널어놓은 빨랫감을 하나 던졌다.
쉭쉭쉭쉭쉭!
주먹은 허공을 때리는데 떨어지는 빨랫감이 저절로 튕겨서 올라갔다. 그때마다 물기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이내 장법으로 변화하더니 빨래를 쉴 새 없이 후려쳤다.
퍼퍼퍼퍽!
광조는 백현의 무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현의 시선과 주먹의 방향은 광조를 향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칠 때마다 조금씩 커지더니 어느덧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어.”
그러던 중 백현이 펼쳤던 손바닥을 접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자연스럽게 교차된 반대편 주먹이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펑-
광조는 재빨리 상체를 뒤집더니 개구리처럼 엎드렸다.
한데 백현은 빨래를 쥔 채 입맛을 다실 뿐이다.
“역시 빨래는 짜는 게 맞네요. 뭐하십니까?”
광조는 헛기침을 한 후 슬그머니 두 다리를 번갈아가며 휘젓기 시작했다.
“크흠, 제자야 잘 보아라. 이것이 낙엽비보라는 것이다.”
파파파팟!
백현은 광조가 엎드린 채 비질을 하듯 땅을 쓰는 모습에 손뼉을 쳤다.
“대단하십니다.”
이제 한동안 혈공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리라.
*
광조는 백현이 불귀장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방갓을 깊이 눌러썼다. 그는 쓰러질 것처럼 낡은 객잔에 들어선 후 이층에 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고, 광조는 좌우를 살핀 후 소리 없이 들어갔다.
“형님!”
광조는 자신을 보자마자 삿대질하는 중년인에게 인상을 썼다.
“조용히 해. 이놈아.”
중년인은 백현이 매담을 샀던 매담자였다.
그는 며칠 사이 핼쑥해진 얼굴로 침상에 누웠다.
“혈색이 좋아지셨네. 며칠째 뭐 하자는 거요? 연락도 없고. 보조 놈은 형님이 배신했다며 도망쳤고, 나는 이제 매담 할 가게도 없어서 쫄쫄 굶게 생겼소.”
“야! 이것 봐라.”
광조는 장 총관에게서 받은 선금을 내놓았다.
매담자는 인상을 쓴 채로 전낭을 풀더니 이내 죽은 정인이라도 돌아온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게 얼마야? 은자 스무 냥!”
광조는 평소 모습과 달리 히죽거리며 말했다.
“자식. 내가 너를 잊을 리 있겠냐. 우리는 한 몸이잖아. 네가 판 깔면서 분위기 조성하고, 내가 그 위에서 신나게 놀다가 돈 받아내고. 우리가 언제 실패한 적 있어?”
“나야 형님 믿지.”
매담자는 은자를 챙긴 후 물었다.
“형님, 그런데 무슨 수를 쓴 거요? 아예 거기 소장주한테 무공까지 가르친다며.”
“그 돈이 그냥 나왔겠냐.”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려. 백현은 납치 전까지만 해도 골골거리던 놈이었잖소. 애초에 풍도장도 형님한테 대단한 성과를 바라지 않을 테니 이거야말로 땅에 떨어진 돈 줍기랑 다를 게 없구려.”
“그게 말이야.”
“언제 나올 거요? 태검문하고 백마장이 어제 한 판 붙었어요. 말단 무사 몇몇이 술 취해서 난동을 부렸는데 제법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데요. 이런 곳에 오래 얽혀 봤자 좋을 게 없소.”
광조는 매담자가 수백현의 정세를 떠들어댈 때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놈 천재야.”
“예?”
“천재라고. 백현은 천재야.”
매담자는 광조가 그간의 일을 설명하는 내내 눈만 끔뻑였다. 광조의 언행은 그들이 사기 칠 때 부모가 자식을 자랑하던 모양새와 똑같았다.
“형님.”
“어?”
“천재면 어쩌라고? 아니면 또 어떻고? 우리는 돈만 챙겨서 소흥으로 가면 그만이잖소. 이미 소흥에서 괜찮은 물건도 찾아놨다니까.”
광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천재야. 아! 맞다. 회선십이로 알지? 그걸 개량했다니까. 무공에 입문한 지 칠 일만에!”
그는 자세를 집중적으로 신경 쓰면서 백현이 펼쳤던 보법을 펼쳤다. 한데 좁은 곳에서 펼치니 훨씬 더 안정적이고, 멋지지 않은가.
매담자조차 나직이 탄성을 흘릴 정도였다.
“허어.”
“어때? 이거 제대로 연습하면 절정으로 보일 수도 있어. 이거 미래를 위한 투자라니까. 앞으로 열흘 정도만 더 데리고 있으면서 뽑아낼 거야. 그리고 잘 마무리하면 은자 팔십 냥 더 받기로 했다.”
광조가 이처럼 열성적으로 나서니 매담자도 마냥 반대하지 못했다.
“나야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아서 그렇지. 풍도장하고 태검문하고 친하잖소. 전쟁이라도 나면 풍도장도 한팔 거들고 나설 텐데.”
“괜찮아. 내가 개코잖아. 위험한 냄새라도 나면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칠 테니 걱정 마라.”
매담자는 실소를 흘렸다.
“그건 그렇지. 형님이 지금껏 광조 흉내를 어찌나 잘 내던지···.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소?”
“어?”
“방금 은자 스무 냥으로 비급을 사오라고 했소?”
광조는 불귀장이 있는 방향을 아련하게 쳐다봤다.
“천재라니까. 이건 이미 성공한 투자야.”
*
“혈색이 좋아져도 너무 좋아지셨네.”
이설은 며칠 만에 마주한 백현을 보고 방긋 웃었다.
하나 말의 내용은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다.
“빌린 물건을 돌려주러 왔을 뿐인데 꽤 공격적이시네.”
백현은 품에서 비연도를 꺼냈다.
“처음 받았을 때처럼 아주 따뜻할 겁니다.”
이설은 슬쩍 얼굴을 붉혔다.
“며칠 사이에 사람이 바뀌더니 더 능글맞아졌군요.”
백현은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눈높이부터 맞추죠. 지금은 영···.”
이설은 슬쩍 앞섬을 가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요.”
“네?”
“백 공자가 직접 올 줄 몰랐다고요.”
“저도 제가 직접 돌려줘야 할 줄 몰랐어요. 아무래도 다친 건 이쪽이고, 뒤에 남은 것도 나잖소.”
백현의 말에 이설은 슬쩍 눈을 흘기며 말했다.
“매일같이 연서화가 드나든다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어쨌든 소문은 잘 듣고 있어요. 구룡도 광조에게 사사하여 일취월장하고 있다면서요.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자면 이미 권장법을 서너 개나 대성했다던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삼류 권장법도 대성이라는 표현을 쓰나요?”
“축하의 의미라고 생각하세요.”
“그나저나 풍도장에도 눈과 귀가 있으시네.”
이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거죠. 여기 이름이 불귀장이잖아요.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수백현에 정 붙이고 살아봐야죠.”
백현은 빙긋 웃으며 비연도를 건넸다.
“저랑도 친하게 지내죠.”
이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백현의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떻게요?”
백현은 그런 이설에게 용건을 꺼냈다.
“일단 불귀장주께 인사부터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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