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혈공제(穴功祭). (5)

7, 혈공제(穴功祭). (5)
초원평 입구부터 비단을 벽을 쳤다.
그 위로 수많은 수실과 깃발이 나부끼면서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단상은 구릉 쪽에 만들어서 관중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급을 여실히 나누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비단으로 만든 벽 내부에만 수백 명이 운집했다. 외부에 노점과 간이 주루만 수십 곳에 이르렀고, 행인들의 숫자는 기천에 이르렀다. 아닌 말로 수백현을 비롯한 인근의 모든 양민이 모였다.
“이게 얼마만의 혈공제인가.”
촌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깃발을 올려다봤다.
혈공이라 적힌 붉은 깃발이 사방에 가득했다.
“구경만 해도 당과와 초탕을 준다며?”
“백마장주께서 단단히 마음을 먹으셨군.”
이처럼 백마장을 추켜세우는 이도 있었고, 질시하면서 불안해하는 자도 있었다.
“혈공제 끝나면 그대로 전쟁인가?”
“모르지. 태검문주는 직접 왔고, 고고하던 청류원마저 부원주를 보냈어. 조금 전에 보아하니 불귀장의 이 소저도 왔더군.”
무인들은 공짜 술에 침을 흘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분위기를 경계했다.
“한데 이 소저가 웬 사내와 함께 왔던데?”
“풍도장의 백현이잖아.”
“백현? 진륜도 아니고 백현 따위가 어떻게 이 소저랑 둘이 다닐 수 있지?”
공짜 술에 마음이 떠난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모르지. 그 나이에 정분날 때 이유가 있던가? 그냥 눈맞으면 나는 거지.”
쾅!
그때 여인이 탁자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무인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인의 곁에 선 자들을 확인한 후 애써 모른척 시선을 돌렸다.
“청류원에서 보낸 부원주가 연서화였군.”
“그런데 왜 저래?”
“듣자 하니 또래에서 대장 노릇을 했다던데.”
잠시 긴장했던 이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백현 같은 놈들이 권력의 흐름은 또 기가 막히게 따라가거든. 대장 자리를 빼앗긴 건가?”
“설마! 불귀장주가 성도의 고관이었다고 해도 옛말이지. 주먹 한 번 흔들면 불귀장 같은 곳은 그냥 끝일세.”
호사가와 취객들의 근본 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하나 저들 모두 이번 혈공제가 순조롭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백마장주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이목이 쏠렸다.
흑의를 걸친 노인이 대완마로 추정되는 흑마를 타고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역과 교역이 늘고, 교배가 성공했다지만 대완마 자체는 쉬이 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양민들은 아예 영물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백마장에 오신 강호 동도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내 악사와 무희들이 단상을 가득 채우며 시선을 끌었고,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양천정이올시다.”
백마장주는 말 위에서 가볍게 몸을 놀리더니 단상 위에 내려섰다.
“본장은 말을 사고팔며 여기까지 왔소이다. 하나 아직도 강호방파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많았소. 해서 백마장은 그간의 성장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혈공제를 열게 되었소이다.”
함성과 환호가 초원평 전체에 울렸다.
양민들에게 혈공제는 축제다.
아닌 말로 백마장의 세력이 강해졌을 때 신경을 쓰는 건 청류원이나 태검문이었다. 하나 양민들에게는 수백현을 판돈으로 한 거대한 도박을 구경하는 듯했다.
“오늘 혈공을 받을 본장의 무인은 여섯이외다!”
양민과 낭인을 비롯해 수백현의 세력 싸움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곳곳에서 내기판이 열렸다.
“난 중성 둘에 소성 넷으로 하겠네.”
“둘만 나와도 대통일세. 아예 중성도 안뜨는 경우가 대다수야. 나는 소성 넷에 무성 둘로 하겠네.”
낭인이 혀를 찼다.
“에헤이! 백마장이 심혈을 기울여서 선별한 무인들인데 설마 무성이 나오겠어?”
혈공의 등급은 대중소로 나뉜다.
천마육천을 비롯한 거대방파는 중성을 기댓값으로 대성을 노렸다. 하나 백마장처럼 지역 규모의 중소방파라면 중성만 떠도 대통이리라.
한데 간혹 규격 외의 결과가 도출되기도 했다.
의원도 알아내지 못했던 지병이나 절맥, 혹은 혈공 중 큰 실수를 하면 아예 효과가 없을 때도 있었다.
“나는 초성 하나에 소성 다섯!”
초성(超成) 소리에 행인들마저 시선을 집중했다.
간혹 대성마저 뛰어넘고, 인외(人外)의 경지에 접어드는 천재가 있었다. 마교의 일개 장로에서 초성에 이르렀고, 일약 교주까지 된 자가 존재했다.
“초성은 중천마교주뿐이잖아.”
“클클, 뜨면 판돈을 다 먹잖아. 이게 바로 승부사라네!”
“지랄하네. 또 술 사달라고 빈대 붙기만 해!”
백현은 열기가 대단한 도박판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극과 극이네.”
이설은 오늘도 펑퍼짐한 옷으로 체형을 가렸다.
그녀는 도박꾼들을 힐끔 본 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들은 혈공제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백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잊지 못할 혈공제로 만들어줘야겠군.”
이설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되겠어요?”
백현은 단상을 보면서 지난 이틀간의 여정을 떠올렸다.
“될 거야.”
그때 군중이 환호했다.
“시작한다!”
백마장주의 연설이 끝났고, 이내 여섯 명의 무인이 단상에 올랐다. 그들은 저마다 균형 잡힌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빛을 뿜어냈다.
“백마장을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본장은 출신과 신분에 구애받지 않소. 열의와 열정, 그리고 열기! 삼열을 갖춰 장차 백마장의 한 축이 될 기재들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여섯 명의 무인이 한 명씩 나와서 소개를 했다.
이설은 그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저들 중 셋은 최근에 입문했어요.”
“오늘 혈공을 보조해주실 분들도 모십니다!”
이내 복면을 쓴 여섯 명의 무인이 등장했다.
그들은 눈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검은 천으로 가렸다. 하나 형형한 눈빛만 봐도 일신의 무위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고수라.”
“혈공은 문파의 서열을 재정립하는 촉매제에요. 돈이 필요하거나, 은혜를 갚기 위해 억지로 나선 이들은 신분을 숨기는 게 당연하죠. 혈공을 끝내고 적대 문파에 습격을 받아서 죽은 이들이 부지기수에요.”
백현은 미간을 좁혔다.
“또는 소속한 거대 방파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까.”
“설마요. 그런 방파와 연을 맺었다고 외부에 자랑할 수 있고, 거대 방파 소속은 어차피 중소방파들의 싸움은 개의치 않을 텐데요.”
“백마장과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은 문파겠지.”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이번 혈공제는 백마장의 위세를 자랑하려는 목적이 아니니까요.”
연서화였다.
그는 백현에게 눈인사를 하더니 이설을 향해 물었다.
“설아,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청류원 부원주 자격으로 참가하셨으니 단상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연서화는 이설의 담담한 한 마디에 홀로 발끈하여 미간을 좁혔다.
“지난 납치로 참 여러 사람이 바뀌었구나.”
“각자 사정이 있는 거죠.”
“자매처럼 여겼거늘 그 사정을 나는 몰랐네.”
이설은 연서화의 날 선 한 마디에 오히려 빙긋 웃었다.
“앞으로 알아가시면 되죠.”
백현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부탁할 게 있어.”
연서화는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소매로 입을 가렸다.
“뭔가요?”
“백마장이 혈공을 끝내고, 시연을 할 때 청류원은 나서지 말아줘.”
“혈공은 끝낸 직후가 가장 취약해요. 운기법을 정리하고, 내공을 수습할수록 강해진다고요. 백마장의 기세를 꺾으려면 그때가 적기에요.”
“그 역할을 풍도장이 할 거야.”
그때 연서화의 뒤에 서 있던 호위가 발끈하며 나섰다.
“청류원을 우습게 보는 구나.”
백현의 손길이 연서화의 볼을 쓰다듬듯 스치며 지나쳤다. 연서화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등 뒤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소평.”
호위는 목덜미를 감싼 채 뒷걸음질 쳤다.
“괜, 괜찮습니다.”
“풍도장을 우습게 보지 말아줘.”
“백 공자.”
백현은 연서화가 발끈하며 나섰지만, 한 마디로 입을 막아버렸다.
“먼약 문제가 생기면 소백현의 객잔과 다루, 벌목장을 넘기지.”
“네?”
그때 힘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장주가 부재중인 걸로 아는데.”
청류원은 원주 아래 칠각사가 존재했다.
노인은 칠각사 중 한 명인 양비자(羊祕子)였다.
백현은 양비자의 서늘한 눈빛에도 주눅 들지 않고 대꾸했다.
“선조치, 후보고죠.”
양비자는 회가 동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허허, 듣던 것보다 강단 있구나. 하나 그게 되겠는가?”
백현은 그런 양비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되게 만드는 건 청류원의 역할이죠.”
양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현이 먼저 제안한 이상 명분은 청류원에 있다. 풍도장주가 제아무리 존경받는 위치라고 해도 돌이킬 수 없으리라.
“부원주, 그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 양 각사.”
“하하, 부원주. 저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이상 그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연서화는 백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반면 이설은 백현과 함께 청류원 일행과 떨어져나온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마장과 청류원에 동시에 백 공자를 각인시키겠군요.”
백현은 싱글벙글 웃었다.
“성공해야 각인이지. 그러려면 혈공제가 망할수록 좋겠군. 좋았어! 방금 소성이네.”
이설은 단상을 올려다봤다.
첫 번째 혈공을 받은 무인은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안타까움에 땅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저게 혈공의 현실이에요.”
이설은 적대 방파임에도 소성을 이룬 무인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십 년 이상 혈공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수련을 해왔으리라. 한데 결과가 소성이면 죽기 전까지 절정은 쳐다볼 수도 없을 터였다.
“강호인으로서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니까요.”
*
백마장주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중성 한 명을 제외하면 소성 다섯이군.”
“예상한 바입니다. 하나 다섯 명의 소성 중 세 명은 가능성이 충분하답니다.”
수하의 말에 장주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직접 확인하셨는가?”
“예, 영약의 기운이 모자라 절정을 코앞에 두고 멈춰야 했답니다. 조만간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거나, 적당한 영약으로 한 번 더 혈공을 치르면 중성에 이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장주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장포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재 백마장 내에 절정의 무인은 장주를 포함하여 두 명에 불과했다. 오늘 한 명이 늘었으니 고작해야 세 명이었고, 여전히 말 장사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벗어나기 힘들 터였다. 하나 절정의 무인이 여섯으로 늘어나는 순간 청류원이나 태검문도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없으리라.
“좋군. 좋아. 다음 식순으로 진행하시게.”
수하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단상 아래를 향해 외쳤다.
“본장의 무인들이 오늘 강호형제들의 응원을 받아 큰 성과를 이뤘습니다. 자! 어느 형제께서 본장의 무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시겠습니까?”
그때 상석에 있는 청류원이 아니라 군중 사이에서 백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쪽은?”
“풍도장의 백현입니다.”
“아! 풍도장. 그래. 백 공자, 무슨 일이시오?”
백현은 중심으로 군중이 공간을 만들어줬고, 이내 호기로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풍도장의 호풍조가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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