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이미 만주에 와 있다
이글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재구성하여 각색하고 재창조하였기에 실제역사와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월 하순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나는 등산용 스틱을 챙기고 수락산에 갔어.
산에 오르면 야근에 지친 몸도 확실히 나아지더라는 직장동료 말만 믿고 더 자고 싶은 맘을 꾹 누르고 집을 나왔지.
왜 여태껏 등산을 못 했냐고?
그야 게을러 터져서 이 핑계 저 핑계대고 그냥 집에서 빈둥대다 다음날 다시 일하러 나가곤 하다 보니 제대로 등산을 못 한 거지.
그런데 진짜 오랜만에 산에 올랐던 그 날엔 하필 날씨가 점차 흐려지더니 갑자기 눈이 올 것 같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더라고.
그 산엔 잔 바위가 유독 많아 산길에 익숙하지않은 내 발바닥이 점점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도솔봉을 얼마 지나자마자 하얀눈 대신 억수같은 장대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어.
내 옆을 스쳐 올라가거나 내려오던 등산객들도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해서 난 치마바위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지? 하고 혼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바위 뒤에서 스윽 나오더니 갑자기 내게 다가오면서 손짓을 하더라구.
아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손짓을 다 하다니, 저 사람이 나에게 왜 저러나 하고 생각하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
"저, 저 말입니까?"
근데, 저 사람 옷차림이 좀 이상한데.......
가만히 다시 보니 비에 옷도 안 젖어 있고.
"내 말 좀 들어 봐."
"뭘요?"
초면인데 반말하는 그에게 나도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고개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그와 나 둘 뿐이어서 그런지 어째 기분도 좀 찜찜했어.
남자끼리 산속에서 같이 마주보고 있다는 게 좀 그렇잖아.
예쁜 여자가 앞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산속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는 거는 분명히 TV뉴스에서 찾는 수배범이거나 내 지갑 노리는 강도일거다 생각이 들었어.
그가 다시 나에게 말을 하려고 할 때 뒷걸음 친 나는 냅다 오던 길로 튀었어.
그가 더 이상 쫒아오지 않는 걸 보고나서야
후우~
얼마나 내려 왔을까.
헐떡이며 연거푸 숨을 몰아쉬고 나서 고개를 쳐든 순간
허걱!
아까 본 그가 내 앞에 떡하니 서 있다니.
“어딜 가나 수락산 친구!”
"아이쿠! 놀래라, 왜 날 막아요?"
그런데 그가 대답대신 나에게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
"우린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거든."
"날 기다리는 사람요? 어디서요?"
"마차 역에서 기다리지."
“마치 역? 거기가 어딘데요?”
“합니하(哈泥河)야.”
생뚱맞게 갑자기 마차역이라니.
그것도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별 희한한 역이름이네.
이 사람이 지금 서부영화 찍냐.
그렇게 그는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나에게 툭 던지고는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안개가 짙게 깔린 나무사이로 싱겁게 사라졌어.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소리냐고?
살다보면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불쌍해 보일 때도 있잖아.
그런 게 정말 나에게도 생겼다니까.......
내가 무슨 몽유병 환자도 아니고 정신이 말짱한데도 그 사람 모습이 자꾸 아른거려 부리나케 산을 내려 왔어.
아이~찝찝해.
이런 기분 처음인데.
뭐? 날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고?
이 AI시대에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야.
혼자 억지로 키득거리고 있을 때 내 핸드폰 벨이 울렸어.
아이고~ 무서버라.
아까 본 그 사람이 나에게 전화 하나보다.
안 그러면 이런 아침에 누가 전화를.
응급 결에 받아보니, 다행히 그가 아니었어.
“×××인사과장입니다. 워낙 급해서 의견을 들어 보려고 아침 일찍 전화했습니다.”
“아. 인사시즌이라 밤새운 거군요. 고생 많습니다.”
‘제기랄! 인사과장이 전화했다는 건 일이 잘 안되었다는 거잖아.’
“이번에 지원하신 북경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미 넘어 갔고 해서 긴급히 상의 좀 하려고요.”
“그럼 중국내 다른 자리는 이제 없나요?”
“......하나 있어요. 대련입니다.”
“거긴 분관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가시겠습니까?”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릴 때 그가 다시 재촉했어.
“이번 인사는 다른 때보다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늦게 진행되었습니다.”
“네에~”
“오늘 일요일이지만 10시에 인사위원회가 열리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판을 확정하면 바로 배포 할 겁니다.”
어떡하지?
본부에 남아 있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야근만 할 텐데.
“아아, 잠깐만요, 나 갈 게요.”
“잘 생각했습니다. 중국 통이니 위원회에서도 반대 안 할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주고받은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내가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되는 인사발령이 결정된 거야.
중국 대련으로.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사람만 빼꼭한 전철 안에서 또 다시 내 일상이 시작됐지.
그날은 내 눈앞에 갑자기 빈자리가 생겼어.
오잉?? 이 무슨 횡재야.
털썩 앉자마자 긴 호흡부터 하고는 눈부터 감았는데
“후우~~”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했나.
급 피곤이 몰려와 힘이 빠지면서 금세 의식이 흐릿해졌어.
주위 시끌벅적한 소음도 사라지고 대신,
어느새 조용해졌고.
이젠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 아늑한 곳.......
뿌연 안개 속에 어제 본 치마바위가 맞는데 내가 왜 다시 올라왔지?
빨리 내려가야지
그런데 어제 그 사람 또 보이는 거 아니야?
난 슬슬 달리기 시작했어.
덜컥,
아이쿠~ 이번엔 또 뭐야?
발에 뭔가 걸려 보기 좋게 훌러덩 나자빠졌어.
뭐지?
아~씨발~ 내 발가락이 호~오 아파라.
뭐야 이거. 거의 다 썩어가는 나무 팻말이잖아.
가만, 뭐라 적혀있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다.
‘大韓國人’
이게 뭐지?
얼핏 보면 월드컵 응원 팻말인줄 알잖아.
한국인도 아니고 대한국인?
어디서 봤더라.......
눈에 익은 데.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어.
이어서 안내 방송이 팡팡 울려 퍼지는데
「이번에 내리실역은 광화문, 광화문역입니다」
뭐. 광화문!!
나는 고개를 반사적으로 쳐들었어.
왜냐고?
내 밥벌이 장소니까 몸이 벌써 AI처럼 귀에 익은 방송 소리만 듣고도 알아서 척척 깨어 난거지.
졸린 눈으로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히죽거리며 다가왔어.
“이번에 대련이라며? 북경은 날라 갔냐?”
“음.”
인사과 철통 기밀보안도 다 옛말이네.
복도 소식통이 이렇게 빨리도 퍼지다니.
이왕 소문 다 난 거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바로 상사 방으로 인사차 올라갔어.
“어서 와. 이번에 대련 간다고?”
“예. 보내주어서 감사합니다.”
“알다시피 거긴 안중근의사, 신채호선생, 이회영선생 숨결이 살아 있는 데야.”
“모두 쟁쟁한 민족독립운동가분들이네요.”
“You는 만철이라고 들어봤어?”
“남만주 철도회사 말입니까?”
“그래.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벤치마킹한 회사이지. 그 회사가 있었던 데가 바로 대련이야.”
“인터넷에는 그 회사건물이 관광지로 소개되어 있던데요.”
“그 만철이 만든 급행열차가 시속 134킬로인데 100년 전에 있었다니 놀랍지 않나. 가면 거기 역사도 한번 들여다 봐.”
“관동도독부 역사 말입니까?”
“그래, 만주지방 역사. 거긴 원래 우리조상들이 먼저 살았던 데 거든.”
“아~ 예. 공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올해 국내방송사들도 민족사적지를 여러 차례 취재 할 계획이라고 하니 참고하고.”
“대련 여순 말입니까?”
“그래. 요즘 우리나라 건국일에 대해 한창 갑론을박하고 있잖아. 독립운동하면 또 만주를 빼놓을 수 없지.”
‘만주라......’
아차, 가만, 생각 좀 해보자.
그러고 보니 어제 산에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마차 역 운운하더니 오늘 아침 출근길에 졸다가 비몽사몽간에 얼핏 본 게 ‘대 한국인’이었지.
평범한 내가 '대 한국인'이 될 리는 만무하고, 그게 만주지방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합니하’는 또 뭐지? 거기서 누가 날 기다린다고 하던데 대체 이게 무슨 메시지야?
#
그렇게 혼자서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초봄에 나는 대련에 부임했어.
물론 공항에는 친구가 나왔지.
“환영한다, 친구야. 와보니 워뗘?”
“여기가 그 옛날 격전지였다니 실감이 안 나.”
“알긴 아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아휴~ 일본군이 총칼차고 득실대던 데야.”
“저길 봐. 앞바다는 발해와 황해가 만나는 데고.”
얼마 후, 시내 숙소에 도착하여 짐 풀고 나니, 해방감에 아무데라도 나가보고 싶어졌어.
“내일이 주말인데 뭐 할 거야, 등산이나 갈까?”
“어디로?”
“고구려 산성 보러 가는 거 어때? 대흑산.”
“거긴 비사산성이 있는 돌산 아닌가?”
“이 자~슥이, 여기 왔으면 당연히 조상들이 장렬히 전사한 성지를 찾아 첫 인사를 올려야지, 인마.”
“아, 그런가.”
그렇게 다음 날 끌려 간 데가 비사산성이야.
사면이 절벽인 곳, 오직 서문(西門)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란다.
“어휴, 엄청 가파른 곳이라 숨이 팍팍 차오르네.”
“엄살 부리지 말고 난간이나 잘 잡아!”
친구 녀석은 시원시원하게 먼저 올라갔어.
그를 뒤따라 돌계단 통로 오르막을 한 발씩 천천히 올라가는데 아래쪽을 보니 정말 아득했어.
바로 그때!!
위쪽에서 갑자기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
앞에 가던 등산객 중 하나가 내 쪽으로 미끄러져 굴러오는 게 아닌가!
정말 사람, 사람이었어.
이거 좁은 통로에 피할 공간도 없는데,
순식간에 우리 둘은 그대로 부딪혔지.
아이쿠! 드드덕 쿠쿠쿵~~쾅쾅!! 아~~악!!
나도 그도 아래로, 아래로 뒹굴며 튕겨 내려갔어.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야!, 친구야! 정신 차려. 야~아 날 봐”
그녀석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날 업고 뛰었어.
그때까진 내가 멀쩡했던 거 같았는데
내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어.
아~ 내가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
어이 씨부럴~~
정말 이렇게 이생에서 작별되는 건가?
끝없이 빠져 돌아가는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어.
알 수 없는 곳 아래로....... 아래로 다시 한 번 투~툭 떨어졌어.
그 다음엔 생각이 안나.
#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으으.......아~으”
심한 뒤통수 통증에 저절로 눈이 떠졌는데 웬 낯선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내려 다 보고 있더라고.
“이제 정신이 들어?”
“여기......, 여긴 어디입니까? 누.......누구~세요?”
“야, 최하림, 정신 차려 인마. 나 공근이야.”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눈앞이 좀 어질어질하긴 해도 사람 말은 잘 들리더라구.
저 녀석이 처음 보는 나를 아는 체 한다.
그 참 이상하네.
근데 아이쿠~~ 내 머리야, 어쩜 이렇게 띵하게 아프지.
뭐, 내가 최하림이라고? 내 이름이 하림인가?
스무 살 쯤 돼 보이는 저 어린 녀석이 분명 MZ세대 같은데 나보고 하림이라 불렀다.
그 참 웃기는 놈이네.
그나저나 여긴 주변이 온통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산에 오르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거 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대체 여긴 어디야?”
“장백현 삼포동이야”
“뭐, 장백현? 그럼 여기가 백두산 근처야?”
“그래, 여기선 장백산이라 불러.”
아! 천지가 있는 그 장백산이란 말이지.
내가 대흑산에서 정신을 잃고 백두산 근처에 다시 떨어졌구나.
“아까 너 이름이.......공군이라 했지.”
“응. 안공근.”
“공군? 그 참 특이한 이름이네, 비행기 공군인가?”
“비행기?”
“그래. 하늘을 나는 거.”
“그 딴 거 난 몰라 인마. 아무튼 난 공군이 아니라 공근이야. 정신 좀 차려.”
“아~ 공근.......무슨 철물점 공구이름처럼 들리는데, ‘안 공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는 같은데.......”
어디서였나.
아! 맞다. 맞어. 생각났다. 역사 시험 때 들어본 그 이름.
“안공근이면 그으.......유명한 안중근 동생이란 말이야?”
흐릿한 눈에 힘주어 좀 더 크게 뜨자 이 녀석 얼굴이 이제 또렷이 보인다.
“그래, 인마, 내 첫째 형님이 안응칠 바로 안중근이다. 왜.”
“진짜로? 이거 정말 놀라운 데.”
아, 그리고 보니 지금이 구한말 일제시대 구나. 그러니까 비행기를 몰라보지.
“아이구~ 장백현 유격대장이란 놈이 이렇게 정신 줄을 놓다니 탈이 나도 단단히 났네.”
“뭐라구? 유.......유격대장!”
“그래, 너 여기서 산포수 친구들이랑 일본군 때려잡던 유격활동이 전혀 기억 안나?”
“어~어....... 조금 기억 나.”
아니, 세상에 내가 항일 유격대장이라니!
지난 날 내 군대시절, 악명높은 강원도 화천유격훈련장에서 행정병으로 요리조리 핑계대며 그 훈련을 빼먹으려고 하다가 빨강모자 유격대장에게 들켜서 신나게 얻어터지고 화악산 촛대바위 계곡 밧줄에 매달려 넘어가는 훈련도 겨우 다 마쳤는데 또 유격부대라니 이거 내가 아직도 벌받는 건가.
그래도 졸개가 아니라 대장이라니 그나마 듣기는 괜찮다.
그래.
비록 일제시대로 내동댕이쳐져 유격대장으로 사는 인생일지라도 아예 죽어 없어진 것보다야 백번 낫긴하지.
어치피 덤으로 사는 세상인데 더 잃을것도 없는 마당에 푸념이 무슨 소용이야, 그저 막 부닥치며 헤쳐 나가보는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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