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필승코리아 (3)

2002. 6. 14
경수와의 약속대로 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시동 걸기 전에 황기자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1대0 승, 박성지 선수를 주목하세요. 인터뷰 미리 따셔도 후회하지 안 하실 겁니다."
전생에서 박성지 선수는 이날 가슴에 트래핑을 하고 차분히 쐐기골을 넣었다. 대한민국이 16강에 가는 멋진 골이었다.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박성지 선수 사전 인터뷰 따 놓겠습니다. 땡큐"
황기자의 답메세지.
운전을 하면서도 월드컵의 열기가 전국 곳곳에서 느껴진다. 특히 오늘은 포르투갈전. 거리 곳곳에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다.
얼굴에 태극마크를 그리기도 하고, 붉은악마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
'이 장면을 다시 보게 되다니.'
2002년만 두 번째다. 누가 알았을까. 이 장면을 다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될 줄이야.
신촌에서 경수와 대학 동기들과 만나기로 했다. 아직 학교 주변에서 만나기에는 보는 눈도 많고, 오늘은 그냥 즐겁게 즐기고 싶었다.
게다가, 동기 녀석 중 하나가 근사한 곳을 알고 있다고 미리 예약을 잡아 놓았다고 했다.
광화문은 이미 응원 열기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 인파 속에서 같이 월드컵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는 대형 스크린이 구비 된 호프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면서 경기를 보기로 했다.
*
"어이! 미래인!"
호프집에 들어서자 동기 녀석 하나가 나를 알아보며 웃으며 인사를 한다.
친하지 않았다면 여러 사건 때문에 불쾌했을 인사지만, 사내 녀석들의 인사란 그렇다. 서로 막막을 해대면서 낄낄 댄다. 진심은 그게 아닌 것을 알기에 웃으며 받아 치는 것이다.
'이 어린 노무 시키가...'
난 50이 넘은 아버지 뻘인데, 어린애들하고 놀기도 무척 힘들다.
"잘 지냈냐?"
나는 반갑게 화답했다.
"어이."
몇 달을 못 만났지만 그냥 한 마디로 퉁 치는 녀석도 있다. 그냥 얼굴 봤으면 됐다는 느낌이다.
"형~"
경수가 친근하게 인사를 한다.
그렇게 친구들이 모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아직 경기는 시작 전이었다. 선수들의 몸 푸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난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여줬다. 이미 호프집은 꽉 찼다.
"여기 분위기 좋지? 친한 형이 하는 데야. 당일 예약 안 받는 다는 걸 억지로 자리 얻어 낸 거야. 요즘 같은 때는 진짜 자리 얻기가 힘들거든"
동기 녀석이 자리를 잡은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대부분 대형 스크린을 보면서 월드컵을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이제 빈 테이블은 없었다.
그때였다. 여학생 두 명이 호프집 문을 열었다. 이미 문을 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듯 싶었다.
"자리가...없나요?"
여학생 두 명의 난감한 표정이 느껴졌다.
"어..그게.. 잠시만요."
주위를 둘러보던 사장님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진짜 미안한데, 너네 자리 남는 데 합석 좀 하지? 어때?"
어? 갑자기 만남이야?
이미 경수는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 여자친구 있다메?'
"어, 형. 그래요. 저 분들이 괜찮으면 우리도 좋아요."
사장과 친분이 있다는 동기 녀석이 승낙을 했다. 이미 경수는 그 여학생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멀리서 속닥속닥 거리는 두 여학생.
그러더니 우리 테이블로 오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 당시에 월드컵을 보면서 커플이 된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해서 인연이 시작되었던 건가.
"안녕하세요."
"네. 여기 앉으세요. 반갑습니다."
"하하하."
테이블이 화기애애 해지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소개가 시작되었다.
여학생들은 연수대학교 법학과 2학년 학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저는 김난영 이라고 합니다."
똑똑하고 참하게 생긴 여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양정미 라고 해요. 호호호"
밝은 표정의 여학생도 이름을 말했다.
그렇게 청춘 남녀들은 월드컵의 역사적 순간에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번의 멋진 경기를 보여줬기에 이번 3번째 경기도 다들 응원 열기가 뜨겁다. 열심히 경기를 보다 가도 술을 마시기도 하고 가끔은 또 대화를 나눈다.
"너. 법철학 레포트는 다 썼어?"
밝은 표정의 정미가 난영에게 중간에 말을 건넸다.
"아니. 넌?"
"난 썼지."
"어! 어! 어!"
갑자기 사람들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시선이 꽂힌다. 그러다가,
"에이."
여기저기 실망한 말투.
결정적 순간에 집중 했다가 그 기회를 날릴 때의 허탈함. 이런 상황들이 중계 내내 반복되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집중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전생에서도 너무 많이 본 장면.
지금이야 짜릿한 장면이겠지만, 전생에서 늘 월드컵 기간이나 특집다큐멘터리마다 보았던 자료화면이다.
나에게는 감동이 희석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건우씨는 지루하세요?"
난영이 내 표정을 보면서 물어봤다.
"어유. 아닙니다. 재밌게 보고 있어요."
괜히 너스레를 떨어 보았다.
"아닌데.."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더니 다시 스크린에 집중한다.
"형, 근데 오늘은 우리 확실히 이기는 거지?"
경수가 경기가 지루한지 나를 보며 물어봤다.
"음... 박성지 선수가 한 골 넣을 거야."
"그럼 그렇지!"
경수는 내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건우씨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난영이 의아하다는 말투였다.
'아차. 이 사람들은 나를 모르지'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경수가 다시 말을 꺼낸다.
"아, 이 형이 미래 예측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지금까지 안 맞춘게 하나도 없어요. 수능...."
성급히 경수의 입을 막았다.
'이놈의 입을 꿰메야 하나.'
경수는 말 실수를 할 뻔 한 걸 느꼈는지 급하게 맥주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은 척 스크린을 보았다.
전반전이 끝나고 중간에 광고 시간이었다.
"형! 저기 정연희 나온다."
이제 CF에서 메인으로 등장한 연희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정연희 아세요?"
난영이 경수에게 물었다.
"음. 건우형이 정연희하고 쫌 친하죠. 하하. 데이트도 하고.."
'하, 오늘 경수 TMI다. 입을 진짜 막아야 하나.'
후반전이 계속된다.
"어! 어! 어!"
모두들 스크린에 집중한다.
"와~~~~~~~~~~~"
호프집이 떠나 갈듯이 너도나도 소리를 지른다.
"골이예요~~골골골골!"
전생처럼 박성지 선수가 가슴 트래핑을 한 후에 침착하게 골을 성공 시켰다. 그리고는 그 때의 그 '쉿' 세레머니와 함께 감독에게 달려간다.
"대~한~민~국"
경기가 끝나도 사람들은 호프집을 떠나 갈 줄 몰랐다. 그리고 밖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신촌도 이미 흥분의 도가니로 길거리가 모두 난리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16강을 진출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네.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두 명의 여학생들과 즐겁게 헤어지고 담배 피는 동기들을 잠깐 기다렸다가 서로의 집을 향했다. 난 술을 마셨기에 경수의 자취방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 돈도 많은데 호텔을 갈 까 생각했지만 월드컵 열기에 호텔이라고 빈 방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아심도 들었다.
그렇게 경수의 집으로 가는 도중 메세지가 왔다.
- 건우씨. 땡큐. 박성지 선수 사전 인터뷰 성공적!
황기자였다.
*
포르투갈전 4일후에 바로 16강 이탈리아전이 열렸다.
계속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부담이 되어서 이탈리아전은 그냥 집에서 있기로 했다.
물론 경기 시작전에 황기자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 2:1 승. 연장전 길어집니다. 재미있을 거예요.
황기자는 내 메세지만 기다린 것 같다. 바로 답메세지가 왔다.
- 오늘은 누가 넣습니까 ? 2골의 주인공.
약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 그건 영업비밀입니다.
- 으!
황기자의 짜증난 표정을 상상하며 흐믓해 하고 있을 때 메세지가 도착했다.
- 오늘 경기는 누가 이겨요?
'어?'
김난영이었다. 포르투갈전 함께 응원했던 여학생. 경기 내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더니 이제 나를 믿는 건가.
- 대~한~민~국
바로 답 메세지가 왔다.
- ㅋㅋㅋ
전생에서도 이탈리아전은 드라마 같은 경기였다. 1대0으로 지고 있었고, 패색이 짙어지는 마지막 순간 기적적으로 동점 골이 터졌다.
그 후 연장전에서 안화정 선수가 멋진 헤딩골로 게임을 끝내버렸다.
*
스페인전은 6월22일 토요일에 열렸다.
그동안 계속 밤에 경기가 있었는데, 스페인전은 오후였다.
- 운이 길어지네요. 그래서 이번엔 이깁니까?
황기자는 이제 못 기다리겠는지 먼저 메세지가 왔다.
- 이깁니다. 이번엔 승부차기예요. 이재운 선수 표정 잘 찍어보세요. 연예스포츠부 기.자.님
스페인전은 이재운 골키퍼가 승부차기를 막고 박수를 치며 환하게 씨익 웃던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아마 황기자가 이 장면을 잡아낸다면 어께가 으쓱 할 것이다.
- 스페인도 이긴다고요? 안 믿을수도 없고 미치겠네.
'그건 당신 마음입니다~'
요새 황기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김난영이었다.
'어?'
"여보세요?"
"네. 난영씨? 어쩐일로?"
지난번에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다. 가끔 메세지가 왔다 갔다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는데..
"저 장평도착했어요."
"네?"
"저번에 축구 같이 보기로 했잖아요. 저 터미널인데. 어디로 가면 돼요?"
막무가내인 친구였다. 이왕 왔다니까 어쩌겠나.
"아, 제가 데리러 갈게요. 금방갑니다."
어쨌든 손님이니까 잘 모셔야 겠다. 터미널은 그렇게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내 차를 보는 난영의 얼굴이 귀엽다.
"어? 이거 비싼차 아니예요?"
"비싸죠."
비싸니까 비싸다고 하지.
"아빠 차 가져오신 거예요?"
'얘가 나를 잘 모르는 구나.'
"하하. 제 차예요. 암튼 빨리 타요. 오늘 날씨 더워요.'
스페인전은 초여름의 날씨가 기승을 부리던 날 이었다.
"아니 여기까지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바람도 쐴 겸 왔어요. 지난번에 경수씨가 여기 경치가 너무 좋다고 자랑을 하길래. 호호. 건우씨 없으면 그냥 구경이나 하다 가려고 했죠."
*
스페인전은 수마허와 함께 보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보는 사람인데 난영과 둘이서만 내 방에서 월드컵을 본다는 게 좀 어색할 것 같았다.
학원에서 보는 것도 불편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수마허의 허락을 받고 수마허의 집으로 갔다.
"오, 학생 참 이쁘게 생겼네. 강선생 여자친구?"
수마허의 사모님께서 밝게 웃으며 물어본다.
"아닙니다."
내가 바로 대답했다.
"에이, 잘 어울리는데 아쉽네."
수마허의 사모님도 수마허님 못지않게 농담을 잘 하신다.
"호호호"
난영은 오늘 즐거워 보인다. 연신 웃음이 가득하다.
수마허가 손녀를 맞이하듯이 반갑게 난영을 맞이했다.
난영은 수줍어 하면서 수마허의 집근처를 구경했다. 수마허의 집은 장평에서 제일 운치가 있는 곳이다. 난영도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강선생. 오늘은 어때? 스페인 이기나?"
"네. 이깁니다."
"에이. 요새 강선생 때문에 월드컵 보는 재미가 없어. 결과를 알고 보니 김이 빠진단 말이야."
수마허는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아니, 선생님이 먼저 물어보셨잖아요!"
"난영씨, 강선생이 이렇게 밀고 땡기는 맛이 없어요. 그쵸? 결과를 저렇게 단번에 말해주니까 김이 새지! 안그래요?"
"맞아요. 건우씨가 밀당을 못하네요. 호호호"
이 상황이 뭐가 재밌는지 난영도 깔깔댄다.
스페인전은 치열한 접전끝에 승부차기로 끝이 났다. 대한민국은 유럽의 강호들을 차례대로 꺾고 4강 진출을 이뤄냈다.
대한민국은 그 뒤로 독일에게 패하고 3,4위전에서 터키에게 3위를 내주고 월드컵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뜨거웠던 2002년 6월을 그렇게 두 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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