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79 話

적현은, 말없이!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정도 겸을 바라보았다.
알아도, 알려 줄 생각은 없었거니와!
지금과 같은, 어딘 지도 모를,
바다 한가운데에서 연락한 들!
대장과 적염단 모두에게,
민폐만 끼칠 뿐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의 탈출은,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만일, 그 과정에서,
불행히도,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 혼자 감내해야 할 몫이었고!
가만! 그런데?!
주군을 배신하고 도망치는 마당에,
궁과 연락이라니!
뭐, ‘나 잘 도망간다!’
그리, 약이라도 올릴 셈인가?
후안무치! 뻔뻔한 통솔대감!
이래서! 도무지,
머리 좋은 것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
좀 전의 짐승 같은 놈이 묘사했듯!
정도 겸은,
속이 음흉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 좋은 머리로, 음흉한 궁리를 한다면?
정말,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 같아서!
한참을 기다려주던 겸은,
마치, 적현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그녀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의문에,
답을 하듯, 입을 열었다.
“주군을 배신하라는 권유가 아니네!”
“다만, 할 수 있다면?”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 그렇다!”
자신의 말에 무게를 실 듯,
눈을 마주쳐 오는 정도 겸의 시선에!
적현은, 저도 모르게,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 묻지도 않은 그 질문에,
또다시, 그가 알아서 답하였다.
“지금!”
“그대의 군주께서, 위험하시네!”
***
공합촌은 넘쳐나는 부상자들로,
심히 분주하였다.
그 대부분이!
포구에서 정도 겸의 배를 잡고 있던,
적염단들이었다.
혜민서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그들의 거처까지 내놓으며,
치료에 매진하고 있었다.
매사에!
훈련을 받아, 과묵한 이들이었으나!
어찌 다쳤는지!
왜 이러한 사달이 났는지!
자신을 치료하며, 물어오는 이들에게,
야박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극비와 같은 말들을,
조심스레,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유난히도, 귀가 밝은 범설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왕과 후궁이,
지금 사냥터에 몸을 은신하고 있다라는!
그리고, 그 후궁은!
그가 이미 간파하였듯이,
자신이 찾던, 흑치 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하!’
‘이거, 너무 쉽잖아!’
범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아국의 막강한 왕을 상대할 생각으로,
힘겹게 되돌아온 길이었다.
그런데, 그의 병력,
설기대를 부를 것까지도 없을 듯 보였다.
그 혼자라도, 너끈히 가능할 것 같았기에!
복용한 약의 효과로, 범설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물론! 만일,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이승을 떠났을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스윽!’
이내, 그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입가엔, 가벼운 웃음이 걸고서!
‘나의 대국이 바로, 코앞이구나!’
***
사냥터에서의 일들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수습되어 갔지만!
비류의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한 탓에,
한은, 궁으로의 귀환을 늦추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먼저, 궁으로 드시지요!”
한에 의해,
강제적으로 잠이 들었다 깨어난 적염이!
뒤 목을 주무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 딴엔, 비류도 아니고!
고작! 한에게 급소를 당한 것이,
못마땅해 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도 그랬다.
비류에 대한 도를 넘는 경외심으로!
정작!
존경받아 마땅한, 이 나라의 왕인 한은!
그녀에게, 언제나,
비류 다음의, 제2 인자로 취급되어왔었다.
비류가 꿀밤을 때리면,
그냥, 군말 없이 맞아도!
한이 그러면, 다음 순간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임을 알기에!
한은, 슬그머니, 적염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수상쩍게,
뒤 목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날아오기 직전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녀의 발이든! 주먹이든! 이빨이든!
“다음에, 해라!”
“비류 깨어나면!”
한은, 적염에게, 비류의 이름을 들먹이며,
날아오려던 그녀의 사지를 피할 수 있었다.
‘흠!’
그녀가 생각해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기에!
적염은, 몸에서 힘을 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것도, 나중에 할 거다!”
“비류, 깨어나면!!”
적염이,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치켜뜨며 바라보자!
한은, 흡사, 울먹이는 소리를 삼키며,
모호했던 말의 주체를 내뱉었다.
“회궁!”
비류와 함께 궁으로 들어오던, 그날부터!
한은, 그가 없는 궁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외롭고 삭막하던 그 큰 공간이,
점차, 따뜻한 웃음으로 채워져 갔었고!
밥을 먹어도, 맛있었고,
역정이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한은 혼자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빈이 그에게,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이라면?
비류는 그에게,
언제나 존재하는 공기와도 같았다.
하여! 정빈은,
한에게 감정의 따사로움을 주지만!
비류는, 그에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완전한 안정감을 준다.
그렇게! 정빈과는 또 다른 의미로,
비류는, 한에게 필수적 존재였던 것이었다.
“정빈은?!”
적염이 속 아프게 정빈을 들먹이자,
한의 눈빛이 처량하게 굳어져 갔다.
“물 한 모금, 안 넘기던데?!”
“마치, 죽으려는 사람처럼!”
“괜찮아?!”
적염은, 말라가는 정빈보다,
그것을 보는 한이 더 걱정되어 물은 것이었다.
“안 괜찮아!!”
그리고, 한은 비류에게 하듯,
그의 속마음을 적염에게도 감추지 않았다.
***
한이 막사에 들어서자!
과연, 말라 타들어 갈 듯한 운을,
마주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푸른 빛마저 띠며, 창백하였고!
산사 열매처럼, 탐스럽던 입술은,
해갈되지 않은 강바닥처럼, 메말라 있었다.
‘하~아!’
절로 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한은, 아무렇게나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운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의 움직임에,
속이 상했다.
‘그리도, 죽고 싶은 것이오?’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운의 모진 마음이나, 허약한 몸이나!
몹시도 미웠다.
하여! 한은,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운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애하는 사람을!
찬 바닥에, 너무도 오래 앉혀놨기에,
편한 침상으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누울 수 없는,
왕의 침상 위에!
오직, 운만이 허락된 그 자리에!
‘스륵!’
움직임이 느껴지자,
운이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하필! 그의 눈 안에, 하필이면,
한이 손에 쥔 단도가, 들어올 게 뭐란 말인가!
순간,
그 어떤 생각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칼날에 몸을 의탁하듯,
운은, 있는 힘껏 목을 들이밀었다.
‘스륵~!’
이에, 한이 반사적으로, 운의 목을 쥐어,
그의 무모한 시도를 저지하기는 하였으나!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에 닿은 목엔,
옅게 금이 갔고!
이어, 붉은 피가,
잔잔하게 배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쯧!”
순간! 한의 눈빛이 무섭게도 변하였다.
말을 해도!
그렇게, 말을 해도!
운은 끊임없이, 자신의 목숨으로,
한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여 왔기에!
혀끝을 한 번, 모질게 차고는,
한은, 그 어떠한 말도 잇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어, 운의 목을 물었다.
“흐읏!!”
갑작스러운 한의 돌발행동에!
운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숨 가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은, 운이 고통스러워할 만큼,
세게 물었다가!
다음 순간, 부드럽게 상처를 쓸었다.
운이 힘없는 손으로, 한을 밀쳐봤자,
한은 더더욱 밀착하여 올 뿐이었다.
“전하!!”
운이 울먹이듯,
떨리는 목소리로 한을 부르자!
한은, 마지막으로, 운의 목을 혀로 쓸고는,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감내하시오!”
“그대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요!”
나를 떠나려 한 죄!
그리하여,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
물론, 서로가 원하는 마음이었다면?
한의 이러한 행동은,
아름다운 애정행각으로 분류될 것이었겠지만!
자신이 싫어, 떠나려 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벌이 될 수도 있을 법하였다.
하지만, 한을 연모하는 운에게,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미련을 갖게 하는,
희망과도 같은 고문이었다.
마치,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와 떳떳하게 입을 맞추고,
그와 뜨거운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운은,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떨구며,
가까스로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러면, 살고 싶어지잖아! 내가!’
‘전하와 함께!’
‘전하의 곁에서!’
운의 눈물은, 곧!
한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여태껏, 그래왔었다.
운에게 한없이, 매몰차게 굴다가도,
그의 눈물만 보면, 금세 풀이 꺾였던 한이었다.
하여, 한은 손바닥으로,
운의 두 눈을 가렸다.
이번만큼은,
그가 울며불며, 사정을 한다 해도!
절대,
굽히지 않을, 강건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소용없소!”
“그대는 죄인이고!”
“죄인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
잠시, 머뭇거리던 한은,
운의 목에서 또다시 붉은 피가 배어 나오자!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과감하게 다가가,
마치, 맹수가 사슴의 목을 뜯듯이!
그렇게, 격렬하게 입을 대었다.
하여, 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격렬한 몸짓, 싸늘한 눈빛,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새겨진 그의 본심을!
‘난! 이토록 격정적이게, 당신을 연모한다!’
그리!
그의 마음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뚝!’
그런, 한의 뺨 위로,
운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흐윽!!”
짧은 탄식과 함께!
한이, 끝내!
패배를 인정하고, 운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그 애달픈 눈을 바라보았다.
“전! 전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그의 애달픈 눈과 마찬가지로!
운의 입에선,
애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한,
그 목소리와 어울리지도 않은 말도!
“다시!!”
“다시, 말해 보라!”
한은, 마치 헛것을 들은 것처럼!
텅 빈 눈으로 물었다.
이에, 운 또한,
텅 빈 눈과 마음으로 마주하였다.
이내, 침착하고도, 청명한 목소리가,
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저는, 전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운은, 뜻하지 않게, 그의 말에 맞아,
어안이 처참한 형색의 한을 똑바로 마주 보며!
끝내, 주워 담을 수 없도록,
쥐고 있던, 미련의 한 자락마저 버리고 말았다.
“아니!”
“절대, 연모할 수 없습니다!”
‘스륵!’
운에게 닿아있던, 한의 두 손이,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리곤, 점차,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마치, 영혼마저 빠져나가,
그의 몸 안엔 없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빈 껍데기만 남은 한의 처참한 몸을!
그의 심장은, 무섭게 다그치기 시작하였다.
‘쿵! 쿵! 쿵!’
‘쾅! 쾅! 쾅!’
‘흐흡!’
마침내, 한이 통한과 함께,
멈추었던 숨을 토해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한은, 운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도, 자신을 애처롭게 보며,
눈물을 흘리던, 운의 가련했던 눈은!
어느새 메말라, 차갑게 굳어갔다.
하여, 날카로운 얼음에 베이기라도 한 듯,
에이는 상처를 입은 한은!
마지막으로, 애원을 하였다.
“그러지 마!”
“그런 눈으로, 날 베지 마!”
하마터면!
운은, 한의 그 애처로운 눈빛과 목소리에,
힘겹게 먹은 마음을, 다잡지 못할뻔하였다.
하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죗값을 다하기로 하였다.
어심을 흔든 죄!
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죄!
모두, 되돌려 놓아야 하겠기에!
그리고, 그 순간, 운은,
자신이, 이리 태어난 것도 죄라 여기게 되었다.
여인으로 태어나,
그의 원 없는 사랑을 받았으면, 좋았을 것을!
여인으로 태어나,
그를 원 없이 사랑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운은, 이생에서의 한과의 연을,
가차 없이 끊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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