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81 話

적현은,
선실에서 나와, 후미진 갑판 위에 서서,
정도 겸이 전해 준 서신을 몰래 펼쳐 들었다.
『전하!
당분간, 호위를 더욱 강화하시고!
후궁 정빈을,
하루빨리 궁에서 내보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 필경, 화가 미칠 것이오니!
이것은,
조아국의 안위와 사직을 걸고 하는,
신의 마지막 충언이니!
절대, 허투루 간과 마옵소서!
臣 정도 겸 』
사실, 정도 겸은,
반역으로 보일 만한 일을 하면서도,
조아국의 왕인, 한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었다.
하여, 흑치의 핏줄을 찾아다닌다는,
흑치인의 출현을 알고 난 후!
더욱, 서둘러,
북방에로의 길에 오른 것이었다.
흑치인이, 왕의 후궁 자리에 있는 운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를 빼앗기 위해서는,
일국의 국왕을 시해하는 일도,
마다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적국의 왕을 시해한 후!
두 나라를 한꺼번에,
손안에 넣으려 할 수도 있었다.
하여,
그가 북방의 얼음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곳엔, 필시!
흑표인을 저지할 방도가 있을 것이기에!
하여, 정도 겸은,
역적이라는 오명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었다.
다만, 흑치의 피가 흐르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늦지 않게, 해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서신의 내용을 읽은 적현은,
의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빈이 누구인가?!
바로, 그의 여식이다.
자신이 납치하여, 데려오려다 실패하여,
간언을 운운하며, 획책을 부려!
차라리,
궁 밖으로 내치길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뭔가, 미심쩍은 느낌은 들지만!
조아국의 안위를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정도 겸은, 분명!?
왕의 안위를 염려하는 듯 보였다.
‘하~!’
아무것도 보이는 않는,
캄캄한 밤바다를 응시하며!
적현은, 선뜻 잡을 수 없는,
선택의 고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은,
이 서신을 전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시해도, 괜찮을 것인가!?
그 무엇보다,
왕의 안위가 최우선이라 배우며 살아왔다.
허니! 행여라도, 만일!
자신의 주군을 향한,
일말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경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이 또한,
역심을 품은 정도 겸의, 어떠한 계략이라면?!
그녀가 스스로,
왕을 위험에 빠뜨린 꼴이 되지 않겠는가!
적지 않은 고민이 쌓여가는 중에,
적현은, 기어이 결단을 내렸다.
하여, 서신을 전할 매를 부르려,
목에 맨, 새 피리를 입에 대었다.
왕의 안위에,
경계심을 가져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적염단의 규율상,
생존 여부를 알려야 하니까!
‘삐~익!’
***
적염은, 비류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자는 비류는,
그녀 인생에서, 또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검을 품은 채, 눈을 감고는 있어도,
그건, 그저 자는 척일뿐!
진짜 잠이 든 건,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잠을 자기는 자는 것일까?’
적염은, 때때로 궁금하였었다.
가히, 철로 만든 사람이라도,
몰려오는 잠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인데!
그녀는, 이제껏!
비류가 단잠 한 번 자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간 못 잤던 세월만큼,
푹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딱히, 가슴이 아플 일도 없었다.
그저, 상처가 빨리 나아,
쾌차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적염 부장!”
적염을 당당하게 부르고 들어온 이는,
궁중 최연소 어의, 홍문관이었다.
한이, 적염을 기절시키던 당시!
하필, 가까이에 서 있어,
그녀를 전담하라, 어명을 받은 탓에!
홍 의관은, 적염이 완쾌될 때까지,
직접 탕약과 상처를 봐야만 했다.
여인의 상처를 직접 치료하는 것은 처음이라!
젊은 의관은,
매 순간, 민망한 순간을 견뎌야만 했다.
“에잇!!”
적염은, 홍 의관의 목소리만 듣고도!
또 귀찮은 것이 들어왔다는 표정으로,
‘슥!’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심하게 다친 부위가 다리였기에,
치료하려면, 종아리를 걷어 올려야만 했다.
하여, 속전속결로 해버리고 말자는 심정으로!
그가 말도 꺼내기도 전에,
상처를 내보이려 한 것이었다.
하여! 홍 의관은,
떨리는 손으로, 탕약을 전해주며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자신의 업이 의관이라고는 하나!
시집도 안 간, 젊은 처자의 맨살을 보는 것이,
심적으로 편치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무관이라고는 하나, 여인일진대!
적염은,
정말 아무 스스럼없이 ‘훌훌’ 맨살을 내보였다.
자신이 사내로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 말이다.
홍 의관은, 자신이 되려,
온 얼굴과 귀가 빨개지며!
적염을 적지 않게 의식하고 있었다.
의관이 그러면 아니 되는데, 말이다.
“크윽~!!”
무슨!?
탁주 한 사발,
시원하게 말아 마시는, 주정뱅이처럼!
적염은, 쓴 탕약을 한 모금에 털어 넣고는,
상처를 동여맨 천에 ‘스윽’ 입을 닦았다.
“엇! 그 환부에!!”
‘그리하면, 아니 되지요!’
그걸 본, 홍 의관이 기겁을 하며 바라보자,
적염은, 만사 귀찮다는 듯!
“어차피, 지금 갈 거잖아!”
팔에 동여맨 천을,
이빨로 ‘우직!’ 물어 풀어 버렸다.
“거! 거참!! 쯧쯧쯧!”
‘우악스럽기는!! 여인이!’
“뭐?!”
적염이, 홍 의관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더니!
“여인이? 라고 시작되는 말로, 입을 연다면?”
“그 입을! 아니, 사지를 도륙 내 줄 수도 있고!”
“허업~!!”
“아니, 무슨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쯧!”
행여라도,
진짜, 입이라도 베일까 두려운 나머지!
홍 의관은, 놀란 김에 내뱉고는,
허겁지겁 손으로 입을 가리기 바빴다.
“흥!”
그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적염은 냉소적으로 비웃음을 내뱉었다.
눈에, 겁이 한가득 들어있어,
놀려먹기 딱 좋은, 나무토막 같은 서생인지라!
어려서, 강인한 비류와 한과 같은 이들만,
눈에 담고 자란 탓에!
홍 의관 같은, 허약 서생들은 정말,
적염에게는 사내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놀려먹기에는 좀 쏠쏠한 듯하여,
신경이 예민한 틈을 타!
대는 대로, 화풀이 겸, 불평을 마구 쏟아내어,
기분을 푸는 용도로 이용하긴 하였다.
직전에, 약이 쓰다고,
달달한 대추 정과라도 내오라고 했더니!
이 열악한 난리 통에,
정말 어디서 구해왔는지!
손에 들고는, 바들바들 떨면서,
정작, 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
그걸 본 적염이, 짧게!
달라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자!
이에, 금세, 토라지기라도 한 양,
삐죽이 눈을 흘기는 듯하더니!
‘탁!’
적염의 손이 아닌,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흥!! 아니, 사람에게!!”
“사지를 도륙 내겠다, 엄포를 놓고는!”
“또?! 챙길 건, 다 챙기시겠다?!”
“흥! 심보도 고약하지!!”
홍 의관은, 약을 꺼내며,
일부러 ‘탁! 탁!’ 소리를 내었다.
그 딴엔, 하는!
소심한 반항이었다.
“뭐?! 지금 나 들으라고 중얼대는 거?”
적염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척,
인상을 팍 쓰고 보니!
흠칫하였던, 홍 의관은,
시선을 어쩔 바 모르며, 약을 들이대었다.
“그, 그만, 처치를 시작하겠소!”
차마, 적염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기에,
그는 서둘러, 환부에 약을 갈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다 속상하다는 듯이,
그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잇!! 쯧쯧쯧!”
적염의 다리와 팔, 사지가 성한 곳이 없이,
화살이 박혔던 자국들로 상처가 빽빽하였기에!
보는 그마저도, 마음이 상한 것이었다.
“핫! 이래서!”
“어디, 혼인이나 제대로 하겠소?”
안타까움에, 홍 의관의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암!!”
그러나, 그 말에, 발끈할 법도 한데!
적염은, 그저!
입 쩍 벌어지게 하품만을 해댈 뿐이었다.
비류가 당했던, 그 ‘안신탕(安身湯)’에,
적염 또한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한의 명령이었다.
비류가 의식을 잃으면서,
호위의 모든 책임이 그녀에게로 떨어진 것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적염 또한,
몇 시간이라도 푹 재우고자 함이었는데!
한의 그러한 배려가,
그의 목숨을 경각에 두게 할 줄이야!!
***
범설은, 홀로 어렵지 않게 사냥터로 침입해,
흔적 없이, 왕의 막사로 향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비호단들을,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해치운 채!
그렇게,
한의 등 뒤에, 화살을 꽂은 것이었다.
비류와 적염의 부재는, 너무나 컸다.
“안 돼!!”
‘욱!’
화살을 등에 맞아,
피를 토하는 한을 끌어안고, 운이 소리쳤다.
“흑치?!”
범설은, 활시위를 당긴 채,
운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화들짝 놀라는 운을 보며,
한은, 그 혼미한 와중에도, 운을 품에 숨기며!
범설을 향해 매서운 눈총을 겨누었다.
“흑표인이로군!?”
다짜고짜, ‘흑치’의 핏줄을 찾는 것을 보니,
북방의 왕위를 노리는, 그 흑표인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운을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양국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기에 말이다.
“웅!”
“안 됐네! 통성명도 못 하고 죽어서!?”
범설은,
한눈에, 자신을 알아봐 주는 한을 향해!
무척 반갑지 않다는 투로,
아무렇게나 대꾸하고는!
별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휘~익!’
그런! 또다시,
한을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어느새, 천장을 찢고 내려온,
그림자 비호대가 몸으로 막아냈다.
‘챙~!’
이어, 범설의 뒤로 적윤이,
적염단과 함께 뛰어 들어왔다.
왕의 막사 주변이 초토화됨을 알아차리자,
사냥터의 모든 비적단이 소집된 것이었다.
비호단은 범설의 괴력을 방어함과 동시에,
한과 운의 앞을 가로막아, 방벽을 자처하고!
적염단은, 맹렬하게, 공격하며,
범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하여, 적윤은,
범설이 그들을 상대하는 틈에,
한에게로 달려갔다.
“어서 몸을 피하시지요!”
적윤이 한을 부축하자,
한은, 단도를 들어, 등에 꽂힌 화살대를 베었다.
‘흐윽!’
“알아서, 궁으로 갈 것이다.”
“허니, 넌 비류와 적염을 챙겨, 입궐하라!”
“둘 다, 의식이 없을 것이니!”
“존명!!”
한은, 자신을 보호하려 몸을 바치고 있는,
그의 호위들을 바라보며, 적윤에게 명했다.
“비적단에게 명한다!”
“하명 하시지요!”
“저자는, 흑표인이니! 끝까지 맞서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각자의 생명을 우선토록 하라!”
“존명!!”
한은, 분한 듯이,
비적단에 포위되어있는 범설을 흘끗 보고는!
운을 잡아끌고, 황급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운이, 다친 한을 부축하는 것인지!
한이, 운을 품에 안고 가는 것인지!
둘은, 모처럼 한 몸처럼 움직여!
한이 휘파람을 불자 달려온,
그의 말 위에 올랐다.
혹시 모를, 추격전을 생각해,
한은, 운을 자신의 앞에 앉혔다.
물론, 운은,
그런 한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진 못했지만!
한이 크게 다치고, 위급한 상황이라,
그의 행동에,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화살촉이 그의 등에 박힌 채라!
한의 등을 안고 말을 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다그닥! 다그닥!’
동이 터오는 무렵이라,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둠을 헤치고 달려가던,
말의 두 발이, 갑작스럽게 들려버렸다.
‘이~히이잉!’
궁으로 가는 길에, 여기저기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린 것이었다.
하여, 한과 운은,
그대로 말에서 낙상하고 말았다.
‘휘~이익~! 턱~!’
그러나, 떨어진 곳은, 땅이 아니라,
그 땅 아래를 뚫어, 파 놓은 함정 속이었고!
둘은, 한참을 대굴대굴 구른 연후에,
땅굴과 같은, 습하고 어두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윽!’
그리고, 한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운을 품에 꼭 안고 보호하였기에!
등에 꽂혔던 화살이,
더욱더 살을 깊이 파고 들어가,
그의 심장을 위협할 때까지 갔다.
‘흐윽~~!’
검붉은 심장의 피를 울컥 토해내며,
마지막, 정신을 잃기 전까지!
한은, 낙상할 때부터, 이미 기절해버린,
운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또한, 그의 온기를 손에 담으며,
눈을 감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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