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97 話

“어찌 됐어?”
“곱게들 물러갔어?”
마침, 한이 정신이 들어,
걸어들어오는 비류에게 말을 건넸다.
왕솔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연후라!
비류가 지금,
문밖에서 무엇을 하고 오는 길인지!
얼추,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조정 대신들을 친히 상대하게 만들다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한심한 왕이네!’
‘나!’
하지만, 이 상황에서 비류가 아닌,
왕솔이 나가 응대를 하였더라면?
검을 들지 않은 내관이라,
그나마 만만하기도 하였거니와!
그가 이제껏!
그들이 쥐여주는 크고 작은 콩고물들에,
알게 모르게, 손을 많이 탔던지라!
유독, 안면이 있는 대신들이 물어온다면?
공손하게 답을 회피하기는 글렀을 것이었다.
또한, 모진 칼바람 속에서도, 이날 이때껏,
한자리 두둑하게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라!
특히나, 이러한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대체로,
순순히들 물러날 영감들이 아니었으므로!
비류가 친히 나설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였다.
“잘 듣던데?!”
“말!”
“훗!”
“어련하시겠어?!”
누군들, 비류에게 거스를까!
말이 아닌, 칼로 답하는 이에게!
‘턱!’
비류는 이내, 검을 내려놓고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한의 곁에 가까이 앉았다.
실로! 너무도 오랜만에,
너무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못내, 속에서 찡하는 울림이 퍼져 올라왔다.
이런 귀한 녀석을 잃을 뻔하였다니!
한 오십 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황천길에서 되돌아온 한이 반가워,
비류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올리려던 차에!
마치, 공기가 단절이라도 되듯이,
언뜻, 삭막한 기운이 감돌더니!
한의 얼굴에서, 금세 미소가 희미해졌다.
이에, 비류 또한,
한동안 말없이 한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할 말은 있었으나,
둘 다,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무언가 어색한 공기로 점철된,
묘한 적막감이 감도는 공간 안에서!
한은, 이내, 자신을 일으켜 달라,
비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비류가 조심스럽게 그를 앉혔는데!
“정빈이!”
“여인이 아니었다!”
‘쏴~아~아!’
드디어, 버거운 무게의 말이,
한의 입을 통해, 힘겹게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비류에게,
짐짓, 웃음을 흘리며!
“왜?!”
“왜 말이 없어?!”
“흠!”
“무슨 말?!”
비류는 다정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위로?!”
“아니면?”
알고 있었다는, 이실직고?!
비류는,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다.
한의 얼굴에서,
그 어떠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다는 것은,
그 마음이 몹시도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슬픔도, 아픔도,
고스란히 드러내서는 아니 되는!
존엄한 왕의 자리에 앉은 그가,
버릇으로 들여온 습관이었다.
무표정으로, 위엄을 유지하는 법 말이다.
“위로? 받아야 하는 상황인가?”
“나?!”
자신에게조차,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을 보자!
비류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여, 하고 싶지도 않았고,
잘하지도 못하였지만!
해주기로 하였다.
그 위로!
하여, 비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잃었으니까!”
“아끼던 여인을!”
“아?!”
한은, 그제야, 자신에게서 정빈은!
이제는 더 이상!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여인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그렇구나!’
‘잃었구나! 결국!’
‘유일하게,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였던!
아니, 아무렇지 않으려 노력하였던!
혼란했던 그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질 치기 시작하였다.
그간, 모른 척해보자 하였던 심산이,
스스로에게 들통나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생각보다,
충격과 상처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후욱!’
하여, 한은 심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울혈을 한 모금 토해내었다.
정빈에 대한 마지막 응어리였을까?!
정빈을 뿌리치지 못할, 사무친 정이었을까?!
“전하!!”
“어의, 어의를 불러라!!”
다소, 놀란 비류가 밖을 향해 소리치자,
한이 만류하였다.
“괜찮아!!”
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던 한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류!?”
나직이 비류를 향해 물었다.
“보내? 줘야겠지?”
“아무래도?!”
한은, 잠든 내내,
아니, 눈을 감고 잠든 척했던 내내!
운이 자신을,
밀어내려고 했었던 순간들을 떠올렸었다.
분명히, 그녀 또한!
아니, 그 또한!?
자신을 마음에 들여놓고는,
모질게 굴기 위해 애썼던, 그 매 순간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았던 모습까지 생각하고는!
더 이상 떠올리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겠어?”
“정말?”
한은 비류의 음색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결단을 내리면,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실행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긴 확인이었다.
‘아?!’
그러므로!
자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비류에 의해,
다시는 정빈을 볼 수 없을 것이 자명하였다.
하여, 한은, 망설이고 있었다.
하여, 순간의 자신의 마음을 알아 버렸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정빈을 궁에서,
또한, 자신에게서 떠나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런, 한의 망설이는 눈빛을,
못 읽을 비류가 아니었다.
하여, 대답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런, 비류의 배려 또한 느꼈기에,
한 역시, 섣부른 확답 대신, 의문을 풀어놓았다.
“대체! 정도 겸은?!”
“무슨 생각으로?!”
한은, 운이 궁에 여인의 행색으로 들어온 것엔?
필시, 정도 겸의 계략이 있었으리라,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싶어?!”
비류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투로,
한을 응시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알고 싶었고,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의 정빈에 관한 일이었기에 말이다.
비류는, 실상!
정빈이 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가 비녀로 목을 긋던 밤에 알아차렸었다.
운의 맥을 짚고, 지혈을 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었으나!
한이 절규하며, 그를 살려달라 하였었기에,
그리하였었고!
의심을 늘어놓으려던 순간에,
북방의 변고가 일어!
그 일은 잠시 놓아둔 채였었다.
그 사이, 한의 정빈에 대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그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섣불리 깨고 싶지 않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적염이 정빈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자!
난데없이, 지조가 없다며,
질투에 기반해, 질책한 일도 있었다.
적염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비류는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를 걱정하는 꼴을!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후에!
이 일에 관해, 은밀히 알아보려 하였으나!
정도 家 내에서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던 까닭에!
자초지종을 캐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정도 家의 무리가 공합촌으로,
운을 납치하러 오던 날 잡은!
그 가문의 발 빠른 경공 고수를 통해,
알아낸 사실이 꽤 되었다.
그는 빠른 발만큼, 눈치도 빨라!
비류가 하나를 물으면?
입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열을 답하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휘~이익!’
비류는, 휘파람을 불어,
천장에 붙어있던 비호단을 호출하였다.
“데려와!”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조심스러운 바람 소리가 들린 연후에!
문을 통해, 경공 고수가 끌려 들어왔다.
“누구냐?”
“이 자는?”
“정도 家의 심복?!”
비류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경공 고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부인하였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요!”
“심복은 무슨!!”
“그저, 쥐꼬리만 한 대가를 받고!”
“그 집 아씨 뒤나 밟던, 하찮은 놈입니다요!”
역시나, 눈치가 빠른 이라!
어전이랍시고!
반역을 하고 길을 떠난, 정도 家와는,
재빠르게 단절하는 결단성을 보였다.
“그래서?!”
한은, 이제 와 보니,
대충 짐작은 가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그 일을 아는 이로부터, 확실하게 듣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이었는지!
또, 누구의 계획하에,
자신을 능멸하려 들었던 것이었는지 말이다.
***
북방 얼음궁에 당도한 범설은!
이미 궁을 장악하고 있던 설기대의 안내로,
국왕의 처소로 향하였다.
의식 없는 운을,
한쪽 어깨에 걸머메고서 말이다.
운의 불안한 심리 상태가 신경이 쓰였었고!
아무래도, 깨어있는 쪽보다야,
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쪽이!
통제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털썩!’
운을 북방, 왕의 침상 위에 내려놓고는,
범설은, 침전 여관(女官)을 불렀다.
“잘 지켜라!”
“아무 짓도 하지 못하게!”
“예!”
침전 여관 여록은!
흑치 월이 집권 당시에,
범설이 궁에 들여보냈었던 첩자였다.
그 외에도, 오랜 공을 들여,
궁 곳곳에 침투시켜 놓았던, 그의 부하들 덕에!
난공불락이었던, 오로국의 얼음궁을!
때가 되자,
어렵지 않게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범설은,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였으나,
황급히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
지하 보물 창고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가 아연의 칭얼거림이 듣기 싫어,
건네주었었던, ‘흑치 설’ 가문의 옥패를!
괘씸한 범월 때문에,
뜻하지 않게, 바다에서 잃게 되었기에!
흑치 왕족과의 신혈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대로, 흑치 월 家의 옥패라도 가져다,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덜컹! 컹!’
웬만한 힘으로는 열리지 않을,
얼어붙은, 거대한 철문을 힘겹게 열고서!
범설은, 궁의 귀중한 보물들이,
보관되어있는 곳으로, 곧장 직진하였다.
혹시나 몰라, 궁을 나가기 전에,
없애지 않고, 던져두길 잘하였던 것이었다.
그 누가, 그에게서 뺏을 수 있어서?!
그가 옥패를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느냐 말이다.
다만, 그가 스스로 아연에게 주었고,
아연을 잃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실수라면, 실수였었다.
‘어디다, 두었더라?’
범설은, 이리 뒤적, 저리 뒤적이며,
옥패를 찾아보았으나!
그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비단, 월 家의 것뿐만이 아니라!
왕자 척살의 밤에,
월가에 의해, 오래전에 회수되었었던!
‘흑치 풍’ 家의 것 또한,
마찬가지로 보이질 않았다.
“젠장!”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왕가의 옥패가 없으면?
흑치의 핏줄과 신혈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렇게 된다면,
왕좌는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
“으으윽!”
낮은 신음과 함께, 운이 눈을 뜨자!
얼굴에서 나이가 보이기는 하였으나,
자태가 무척이나 고운 여관이!
그의 목에 뜨거운 수건을 감싸고 있었다.
“누구?”
“얼음궁의 여관, 여록이라 하옵니다.”
여록은 공손한 듯, 말을 하면서도,
운의 어깨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어깨가 뭉친 듯하여!”
“어?!”
“괘, 괜찮소!”
운이 짐짓,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듯,
몸을 틀자, 그제야, 그녀도 손을 놓았다.
“참으로, 거친 분이시지요!”
“범설님께서는!”
“이리, 근육도 없는 분을 기절시키려?”
“무공까지 쓰시다니요!”
‘아!’
‘일부러 정신을 잃게 하였었구나!?’
운은,
당한 줄도 모르고, 쓰러졌으니!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이,
여록을 등진 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흑치?!”
여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운에게 말을 붙이자!
운은 등을 돌려,
말없이 여록을 바라보았다.
그의 출신이 궁금한 듯 보였기에,
숨길 일도 아니고,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기에!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그저, 혼자 있고 싶은 생각에 말이다.
“운!”
운이 짧은 대답을 하고는,
다시 등을 돌려, 돌아눕자!
여록은 운의 뒷모습을 찬찬히 눈으로 훑더니,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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