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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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최근연재일 :
2025.03.2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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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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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00. 왕실 마법사와 불행한 소녀와 전속 메이드

DUMMY

#00. 왕실 마법사와 불행한 소녀와 전속 메이드


“......”


눈을 떴다.

정신은 아주 개운했다. 이른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의 그 감각이었다.

그러나 개운한 그 느낌은 곧장 들이닥치는 구역감에 순식간에 밀려 사라졌다. 누군가 내 머리를 잡고 앞뒤로 마구 흔들어 재끼는 것 같은 느낌의 어지러움에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지만 요상한 느낌은 사라지 않았다.


‘...결계잖아?’


시야까지 빙글빙글, 마구 돌고 있을 정도로 심한 어지러움에도 간신히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침대 바닥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마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간감각조차 무너뜨릴 정도의 심한 어지러움에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기어가듯이 침대를 벗어나 마루로 몸을 굴렸다.


“우, 우욱···”


결계를 벗어나고서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숙녀로서 무언가를 정말로 게워 낸 게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마루에 얼마를 뻗어 있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럼증은 빠르게 가셨다. 간신히 진정된 머리를 두어 번 꾸욱 누르고 나는 그제야 마루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침실로 보였다. 내가 누워 있던 침대와 그 아래에는 푸른빛을 내는 둥근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 더 돌리니 높은 천장 아래로 빼곡하게 세워진 책장들이 보였다. 영락없는 도서관의 모습이었다.

침대와 소파, 그리고 방 귀퉁이에 펜과 종이로 어지럽혀져 있는 작은 책상까지. 도서관 한편에 개인 방이 마련된 느낌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라. 그나저나 이곳은 어디지?


묘한 도서관의 풍경을 보고 난 후에서야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방을 모른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거지? 기억을 하나씩 되짚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너무 어지러워서 마루에 누워 있었고··· 그전까지는 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저 침대에서 난 정신을 차렸고··· 그리고··· 그전에는···


“......”


그전에는?

톱니바퀴가 삐걱, 하고 멈춰버리듯 생각이 멈춘다.


-나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은 둘째치고,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건망증 정도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게는 전혀라고 할 정도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마치 내 인생이 이 침대에서 시작된 듯, 그 이전의 일들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이제는 공포감이 온몸을 덮쳐왔다. 너무나 낯설다. 이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마루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꼬꾸라졌다. 다리가 아팠다. 아니, 다리가 아닌 온몸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진탕 얻어맞기라도 한 듯,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정신과 기억을 잃은 것과 관계가 있을까.


-끼이익


간신히 몸을 일으켜 도서관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낡은 금속 경첩이 삐걱거렸다.


바깥은 길게 이어지는 복도였다. 아마도 이 도서관은 저택 같은 어느 큰 건물 안에 있는 하나의 방일 거다.

이곳을 나가도 되는 것일까. 위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렇게 막상 문은 열었지만 복도 앞에서 주저하던 차에, 오른편 복도 코너에서 나타난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


옆구리에 두꺼운 책을 들고 동그란 안경을 낀 마른 체형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 후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나는 저 남자가 이 도서관의 주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내가 있던 침대에는 결계가 처져 있었다. 그 결계를 전개한 것도 저 남자라는 말이다.

무슨 결계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나를 그곳에 잡아두려던 게 아니었을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무작정 그 남자의 반대편 복도로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무어라 남자가 소리치며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몇 번의 코너를 돈 후 어떤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방 안에서 상황을 지켜볼 심산이었다.

이곳은 아마도 창고 같았다. 마치 도서관같이 커다란 선반이 여러 개 세워져 있었고, 손이 닿는 곳마다 먼지투성이였다.

나는 제일 마지막 선반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끼이익


복도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혹시나 잘 따돌린 걸까 생각하던 차에 창고 벽을 따라서 마나가 뻗어져 나갔다. 결계였다.

결계가 펼쳐진 후 창고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내 등 뒤에 놓여 있는 긴 막대기를 움켜잡았다.


“자, 잠깐 이야기를 하자. 여기에 있지? 난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뚜벅, 뚜벅.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난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나가 몸 안에서 순식간에 정렬됐다. 그리고 왼손으로 폭발시키듯 순식간에 마나를 밀어냈다.


“플레어!”


화염구가 다가오는 남자에게 직격했다. 폭발의 화염이 크지 않은 창고 안을 휩쓸었다. 난 멈추지 않고 곧장 화염 사이로 뛰어들었다. 채 걷히지 않은 화염 사이로 막대기를 정확하게 휘둘렀다.


-우지직


막대기는 정확하게 그 남자를 노렸다. 그러나 그것이 휘둘러 들어가는 순간에, 바스러지듯 막대기가 조각나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보호 마법···’


틀림없이 내가 숨어 있는 이 좁은 공간으로 무작정 들어올 때부터 예상을 했어야 했다. 그냥 맨몸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을 터. 마법 공격이나 물리 공격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을 거다.

하지만 보호 마법, 특히 물리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의 경우에는 명확한 약점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마법은 ‘무기’를 막아 낸다. 무기가 아닌 물리적인 접촉은 의외로 막아주지 못한다.


“커, 컥···”


부숴지는 막대기를 바로 던져 버리고 불꽃 사이의 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내 손에는 남자의 목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밀어붙이듯 남자를 구석으로 강하게 몰아넣었다.

쾅, 하고 선반에 남자의 등이 부딪치고 먼지 쌓인 알 수 없는 물건들 몇 개가 그 충격으로 선반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바로 죽여 버리겠어.”

“잠, 잠깐··· 말할게, 전부 말해 줄 테니까···”

“여긴 어디지?”

“콜록, 여기는 젠탈리온의 왕성···”

“넌 누구야?”

“그게 무슨, 내가 누구냐고···? 나, 나는···”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

“난, 젠탈리온 왕실의 수석 마법사···”

“아까 그 도서관은 네 도서관이지?”

“마, 맞아.”

“그러면-”


덥수룩한 회색 머리의 이 남자는 나에게 목이 잡혀 콜록거리며 내 물음에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젠탈리온. 왕성. 왕실의 수석 마법사.

들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들어 본 적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주저하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나는 누구야?”

“...네가 누구냐고?”


멍한 표정으로 그가 되물었다.


내가 누구냐를 나는 처음 본 사람에게 묻고 있는 건가.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하기 전에 그걸 묻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깜짝 놀랐다. 난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


“네, 네가 날 데려온 거잖아? 분명히 내가 깼을 때에 결계가 처져 있었어. 그 도서관이 네 도서관이라면 그 결계를 친 것도 너잖아? 나에 대해 당장 아는 것을 말해. 전부.”

“......”

“당장 말해!”


남자가 시선을 피하며 주춤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나는 혹시나 말을 꾸미지는 않을까 강하게 몰아붙였다.


“자, 잠깐.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우선 손을 좀 풀어 줘.”

“너를 믿으라고? 무슨 꿍꿍이인 거야?”

“그게 아니야. 난 네 적이 아니야. 침대 주변으로 쳐 둔 결계는 치료 결계였어. 누구보다 너도 스스로 네 몸 상태를 잘 알잖아. 너는 크게 다쳤고··· 난 너를 치료하고 있었어. 그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나의 몸 상태.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내 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 창고에서 이 남자를 제압하기는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금방이라도 다리가 무너질 것 같다.

점점 흥분이 가시면서 더더욱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이 남자가 나를 치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이 남자를 내가 없앤다고 한들 내가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얼핏 보면 내가 이 남자를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이 남자가 어떤 말을 하든, 일단 듣는 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물론 이런 걸 전혀 티 내지는 않았고 줄곧 여유로운 스탠스를 취하기는 했지만.


“콜록, 콜록···”

“이 결계는 뭐야?”


남자는 내가 손을 풀자 스르륵 자리에서 주저앉고 기침을 한다.


“이 창고에 쳐둔 건 충격을 흡수하는 결계야. 이 결계가 없으면 마법 한두 번에 바로 밖에서 난리가 날 테니까.”

“애초에 싸움을 할 생각이었다는 거네?”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없었지만··· 네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말은 마치 내가 혼란스러울 거라는 걸 예측이라도 했다는 말 같다.

더더욱 궁금해진다. 이 녀석은 누구며, 나를 왜 이곳에 데려왔고, 나는 누구인가.


“그 얘기 말이지··· 일단 하나씩 시작해볼까. 일단 너에게는 어디까지 기억이 있어?”


나는 잠시 대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없다. 그 정도로 내 상황은 불리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다시 내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내 기억의 시작은 침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꿈을 꾼 것처럼 뒤섞인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 하나 기억나는 게 있어.”

“...뭔데?”

“내 이름. 루비.”

“...성은?”

“안 나.”

“그러면··· 가족에 대한 것은?”


가족.

허공에서 내가 생기지는 않았을 테니 나도 가족이 있었을 거다. 그것조차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정말로 허공에서 내가 생긴 것처럼, 내가 그 침대에서 태어난 것처럼, 나는 가족에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어떠한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안 나.”


남자는 내 대답을 듣고는 시선을 나에게서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란 눈동자가 몇 번을 크게 깜빡였다.

창고에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 사이에 내 시선은 무언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점점 바닥을 향했다.


“루비, 라고 불러도 돼?”

“...좋을 대로 해.”

“루비, 그··· 불행한 사고가 있었어.”

“불행한 사고?”

“네 가족은··· 전부 돌아가셨어. 사고 현장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게 너였고, 내가 너를 데려오게 되었어. 사실 데려오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너도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회복 결계를 쳐 두기는 했지만 바이탈 신호가 좀처럼 회복이 안 되어서··· 그래서 조금 전에 네가 깨어난 걸 봤을 때 정말로 놀랐거든.”


불행한 사고.

내 가족은 모두 죽었다. 나도 그 사고에 휘말려서 죽을 뻔했지만, 간신히 살아났다.


설명을 들었지만 좀처럼 와 닿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 말이 이해가 될 뿐이었다. 아, 그렇구나, 라고 스스로 납득할 뿐이었다.

황당한 이야기다. 너무나 황당해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시금 내 기억을 되짚어도 가족에 대한 어떠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나도 가족이 있었겠지, 라고 이해한 후 그 텅 빈 기억을 보니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정말··· 유감이야.”

“어떤 사고였어?”

“......”

“넌 알고 있지? 네가 그 사고 현장에서 날 발견했으니 그 사고에 대해서도 모를 리가 없어.”

“그··· 그렇지만.”

“말해줘. 부탁할게.”


난 그의 파란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마주 보는 그의 눈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곧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드래곤이-”


-


그것은 누구도 막거나 예상할 수 없었던 정말로 우연한 사고였다는 것 같다.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발견되었다. 그 드래곤 토벌을 담당하는 왕실의 ‘드래곤 나이트’라는 기사단이 드래곤을 토벌하러 갔다. 기사단과 드래곤 사이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강력한 마법을 주고받는 그 싸움에서 드래곤의 마법이 근처의 무고한 민가에 직격하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불행히도 내 가족이었다.

그 일격으로 내 가족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잔해에서 간신히 숨만 붙은 내가 발견되었다.


이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를 자신의 도서관으로 데려와 치료를 시작했다는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도 말했듯이 크게 기대는 없었다. 그만큼 내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좀처럼 호전되지 않아 거의 포기하고 있을 무렵, 꽤나 질긴 목숨이었는지 이렇게 갑작스레 깨어나 버렸다.


우연과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불행한 사고- 라고 이 회색 머리의 남자는 결론지었다. 그 의견에 나도 딱히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유감이야.”

“...뭐, 딱히 그럴 것은 없어.”

“안 슬퍼?”


이 이야기가 슬프지 않냐, 라고 하면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다.

불행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여자아이라니. 슬픈 이야기의 정석이다. 듣는 누구라도 눈물을 흘릴 이야기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건 마치··· 슬픈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그 주인공이 나라는 인식이 없다. 그저 ‘그것참 슬픈 이야기군요’라는 반응만 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 이 이야기의 감동이 잊힐 무렵, 나는 내 일상으로 문제없이 돌아갈 거다.

나에게는 당사자로서 슬픔을 느끼기에는 그 기억조차도 없다. 내 가족과의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와 닿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온다면 펑펑 울어 주지 뭐.”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허벅지 근육이 아파와서, 나는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의 선반을 등으로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은 차가웠다.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이제 어떡할 셈이야?”

“어떡하냐고 물어봐도··· 나에게는 아무 기억도 없어서. 지인도, 친척도 전부 사라졌는걸. 몸이 회복되면서 기억이라도 조금씩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당장 계획이 없다면 내가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 물론 너만 좋다면 말이야.”


남자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당장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는 건 어때?”

“여기는 젠탈리온인가하는 뭔가의 왕성이라며? 내가 이런 곳에 머물러도 돼?”

“방법이 없지는 않아. 결국 신원만 보장되면 되니까.”

“나에게는 신분증 같은 것도 없는걸. 당장 성도 모르는데.”

“이래 봬도 난 젠탈리온의 수석 마법사니까. 그 신원을 내가 보장해 줄 수 있어. 대신···”


크흠.


잘 말하던 남자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머쓱한 듯 시선을 피했다.


“명목상으로 전속 메이드로 등록이 되겠지만··· 아, 아니. 이상한 의미는 아니야!”


변태 같은 녀석.

내 경멸의 눈빛에 허둥지둥 손을 흔들며 나름의 변명을 하지만, 결국 뭐 그런 거 아니야? 너는 이제 내 메이드니까 이런저런 봉사를 하라고, 캘캘캘. 이런 거지?


“하여간 남자라는 족속들은.”

“오해 마라니까! 아무래도 왕성이다 보니 신원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을 무작정 머물게 할 수는 없어. 명목상으로나마 내 전속으로 등록해 두면 내가 네 신원을 보증하게 되는 거니까. 너의 신원은 이제부터 왕실 마법사의 전속이 되는 거야. 딱히 너에게 정말로 메이드 역할을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라는 피의자의 변명,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 손해가 되는 제안은 아니다. 나는 내 신원을 증명할 기억은커녕, 그 어떠한 기억조차 없는 상태다. 거기에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가족은 더 이상 없다.

잊혀진 기억 한 편에 신세를 질 지인이나 친척이 있으련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녀린 소녀가 혼자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기억을 찾을 때까지, 아니면 기억이 없더라도 최소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신세를 지는 것이 나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임은 사실이다.


“이유가 뭐야?”

“응?”

“왜 나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거야? 연민이야? 내가 불쌍해서?”


하지만 솔직하게 궁금하다.

이 남자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 제안이 나에게 손해되지 않는 것도 이해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걸까? 만약 나라면 그저 불행한 사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에게 이 정도로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이 남자가 그저 착한 사람이라서? 아니면 내가 이 정도의 호의를 받을 정도로 불쌍한 사람이라서? 순수한 호의를 내가 의심하고 있는 걸까?


남자는 내 물음에 한참 동안 대답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과거 때문··· 이라고 하면 납득해 줄 거야?”

“개인적인 과거. 말할 수 없다는 거지?”

“......”

“...뭐, 숨겨진 사악한 계략이 있다거나? 나를 잘 데리고 있다가 왕성의 비밀스러운 인체 실험의 제1호 실험체로 사용해야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됐어.”


나쁜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난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은 없다.

당장 나조차도 나에 대해 어떠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거기에 만약 이 남자가 어떤 계략이 있더라도 내가 뭘 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이 호의를 의심해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거기에 누구나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과거는 있다. 말하기 곤란한 과거의 일까지 캐물어 듣는 것은 오히려 이쪽에서 사양이다.


“이름이 뭐야?”

“...오멜.”

“성은?”

“마나필드. 오멜 마나필드(Omel Manafield).”

“기억했어. 이쪽은 아까도 말했지만 루비. 성은 기억나게 되면 말해줄게.”


난 바닥에서 일어나 먼지투성이인 엉덩이를 가볍게 털고,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오멜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내 손을 슬쩍 잡아 악수를 받아 주었다.


“고마워, 오멜. 잘 부탁해.”

“...나야말로.”


그 악수는 계약에 대한 나름의 동의였다. 나는 감사하게 네 친절을 받아들여 전속 메이드의 신분으로 지낼 거고, 오멜은 내 신원을 보증해 준다.

오멜에게 있어서는 자격 없는 메이드가 하나 붙는 거라 손해만 되는 불공평한 계약이겠지만.


그렇게 나는, 왕실 마법사의 기억 상실 메이드로서 앞이 보이지 않는 두 번째 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채로.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HYCE입니다. 처음 인사 드립니다.


연재는 매주 월요일, 목요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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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 달가지
    작성일
    24.01.12 12:18
    No. 1

    양산형에선 맡을 수 없는 찐한 향기가… 아직 첫 화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HYCE
    작성일
    24.01.15 20:49
    No. 2

    댓글 감사 드립니다!
    좋게 말해 주셨는데 또 나쁘게 말하면 올드한 스타일이기도 해서요. 그 사이의 균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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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17. 보름꽃 (2) 24.12.30 25 0 12쪽
102 #17. 보름꽃 (1) 24.12.26 25 0 11쪽
101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4) 24.12.23 23 0 14쪽
100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3) 24.12.19 25 0 16쪽
99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2) 24.12.16 2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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