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조우 (1)

#14. 조우
“......”
눈을 뜨고 난 후로도 한참 동안 천장만을 그저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썩 괜찮은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이었다.
그다지 피곤하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여전히 잠에 취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중요한 건 내가 겪었던 것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느 것을 ‘내’가 겪은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눈을 뜨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그러니까 루비라는 나는 죽거나 존재가 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내 몸은 플로리스에게 빼앗기지도 않았다.
아니, 정말로 나는 내가 맞는 건가? 내가 겪은 그것들은 그저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았거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다. 탐구자의 기억을 열람했을 때처럼 관찰자가 되어 본 것도 아니었다.
그건, 다미안과 십 년 동안 지내었던 그 기억은 다른 누구의 기억이 아닌 바로 나의 기억이었다.
‘플로리스, 너는···’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내 오른팔에 새겨진 그 표식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그것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똑똑
그렇게 얼마를 멍한 기분으로 누워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방안에 흐르는 적막 사이로 누군가가 방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천천히 방문이 열렸고 키가 큰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 레비티스 에스티안. 위대한 드래곤을 감히 뵙습니다.”
그 얼굴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레비티스 에스티안. 분명 에본윙의 수장이었지.
에본윙에 와서 그를 만나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마디나 베일리즈의 마법서 사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플로리스의 문양 때문에 죽어가던 나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였고, 그를 따라 마법진이 그려진 차가운 돌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그가 나를 치료하려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커어억···”
나는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어 왼손으로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몸을 던지듯 강하게 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 위로 마나를 정렬하였다. 철이라도 녹일 수 있을 것 같이 이글거리는 불의 구가 떠올랐다.
레비티스 외에 방 밖에는 에본윙의 일원으로 보이는 여럿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내 손에 잡힌 이상 이 거리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이 남자는 내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마법이 전개되기 전에 내 마법이 녀석의 머리에 꽂힐 거다.
그들도 자신의 수장이 잡혔다는 것을 아는 이상, 머릿수가 많다 하더라도 함부로 나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헉, 허억, 허억···”
레비티스는 바닥에 등이 내리꽂힌 충격 때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죽기 전에 무슨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할까 싶어, 나는 그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죽기 전에 뭐라도 할 말은?”
“...저희 에본윙은 플로리스님의 예언의 성취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돌아오셨다니,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뭐라고···? 돌아왔다니···?”
“저는 플로리스님의 손에 죽어도 좋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이렇게 직접 플로리스님을 뵈었다는 것으로 제 소명은 끝났습니다. 이 삶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에본윙의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플로리스라니?
그 말을 하는 레비티스의 얼굴은 기괴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그것은 생명의 위협을 코앞에 두고 포기하거나 해탈한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옅은 미소까지 띄고 있는, 정말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의 소명을 전부 다했고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괴했다. 소름 끼쳤다.
때마침 맞은편에는 거울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 거울을 쳐다보았다.
등 뒤로 길게 늘어져 있는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조금 멍한 표정을 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뚜렷한 이목구비.
평소와 같은 내 모습이었다. 젠탈리온 왕성에서 깨어났던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내 눈동자에는 평소와 다른 특이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그건 긴 마름모가 세 방향으로 모여 있는 문양- 플로리스의 문양이었다.
“...이게··· 무슨···”
“루비!”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하염없이 거울만 쳐다보고 있는 그때, 방 안으로 오멜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상당히 급하게 온 것 같았다. 전력 질주라도 한 듯 호흡이 거칠었다. 안 그래도 덥수룩했던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오멜.”
오멜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왼손에 붙들린 에본윙 수장의 목덜미. 오른손에 전개된 플레어. 바보 같은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나.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목소리로 오멜을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와락
“괜찮아, 루비. 괜찮아··· 괜찮으니까.”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레비티스를 죽이려 했는데, 오멜이 나를 강하게 잡아 오는 바람에 집중하고 있던 오른손의 마법도, 목덜미를 놓치지 않게 붙들고 있던 손아귀도 다 엉망이 되었다.
아무런 슬픈 일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방바닥에서 바보같이 구겨진 자세로 오멜에게 안긴 채로, 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그러면 내 꼴불견인 표정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누구에게도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
“플로리스님, 필요하신 게 있다면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밖에 사람을 붙여 두겠습니다.”
“...알았으니까 나가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로소 단단한 나무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오멜, 결계를 쳐줘.”
“...결계?”
“응. 바깥에 있는 녀석들에게 우리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꽤나 공들여 지어진 방이었다. 벽의 재질이나 사용한 나무들이 그런 부분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상당히 좋은 자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밖에 사람을 붙여 두겠다는 걸로 봐서, 문밖에는 방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을 거다.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소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오멜에게 결계를 부탁했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한 듯, 오멜은 바닥 위로 마법진을 전개했다.
“오멜,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그러니까··· 레비티스가 나를 치료하겠다고 데려간 이후로 말이야.”
“3일 째야. 너··· 몸은 어때? 괜찮아?”
“으응··· 몸은 괜찮아.”
“아아··· 다행이다. 그 남자가 의식을 잃은 너를 데리고 지하에서 올라왔었거든.”
3일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마치 몇 년이나 지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 감각과 현실의 시간 흐름이 일치하지 않아 자꾸만 위화감이 들었다.
오멜은 의자에 앉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하긴, 3일이나 내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오멜도 꽤나 마음고생을 했을 거다.
“며칠 안에 깨어날 거라 해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어. 사실 정말 불안했지만 이미 네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더 의심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그래도 정말 그 표식의 문제는 해결이 된 걸 보니까 기다리기를 잘했네.”
“해결, 말이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까의 일도 그렇고···”
“뭐, 내 얘기를 하기 전에··· 오멜은 괜찮았어? 에본윙 녀석들이 무슨 짓이라도 했던 건 아니지?”
“사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너를 데리고 도망가려고도 했었거든. 하지만 네가 깨어날 때까지 편하게 있으라 하기도 했었고, 실제로도 손님으로 깍듯이 대해 줘서 말이야···”
“다행이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레비티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가 나를 속였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 순간, 나에게 한 짓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오멜을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공포감도 있었다.
나까지 속였을 정도니 오멜에게도 틀림없이 해를 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멜의 말을 들어 보니 정말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플로리스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게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오멜은 깨어난 내가 곧장 레비티스를 죽이려 든 것을 보았다. 그 장면에서부터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을 거였다.
“레비티스가 나를 속였어.”
“...뭐?”
“녀석들이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너도 들었지?”
“...플로리스?”
“응. 그거야.”
그건 내가 레비티스를 결국 죽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나를 속인 것은 분명했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레비티스를 포함한 에본윙은 지금의 나를 부활한 플로리스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내 눈동자에 그녀의 표식이 떠올라 있기도 하고.
오멜도 내 눈동자에 새겨진 플로리스의 문양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다만 그것에 대해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본윙이 나를 부활한 플로리스라고 알고 있다면, 원하는 대로 그것을 연기해주기로 했다.
내가 플로리스를 연기하는 이상, 나는 이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심지어 레비티스가 보여 준 대로 이들은 플로리스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충성스럽다.
틀림없이 앞으로 있을 젠탈리온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레비티스는 이 표식의 의미를 알고 있었어. 플로리스의 일부가 나에게 섞여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건 꽤나 길고 장황한 이야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비티스의 마법을 따라 알 수 없는 공간에서 플로리스와 만났고, 그녀와 싸우다가 마법석 조각으로 그녀를 찔렀고, 그 이후로 플로리스로서 다미안과의 시간을 차례로 보냈다는 건 너무나 긴 이야기였다.
오멜에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왜냐하면 나는 마치 다미안과의 십 년을 정말로 직접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오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귀기울여 내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아니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플로리스의 이야기는 비극이었다. 다미안도, 플로리스도, 어느 누구 행복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 작가의말
14번 타이틀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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