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조우 (4)
“에스티안님, 녀석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공터를 지키듯 주변에 펼쳐져 경계를 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경계병 중 한 명에게서 소식이 들어왔다.
그들이 이 거점을 부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이상, 정면으로 맞서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들을 전멸시킬 필요는 없다. 그들이 쉽게 거점을 돌파하지 못하게만 하고 생각보다 시간이 더 소모된다고 판단하게만 하면 된다.
-절그럭···
우리는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기다렸다.
멀찌감치에서 들리던 갑옷의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러 명의 발이 지면을 밟는 울림도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알데론···”
20명 남짓의 토벌대는 정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에본윙과 같은 반동 세력들에게는 시시콜콜한 계략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것 같았다. 그저 정면으로 빠르게 토벌하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그들이 여태껏 같은 방식으로 에본윙의 거점을 여럿 파괴했다는 것을 들었으니까.
토벌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옆에 있던 오멜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데론?”
낯선 이름에 내가 물었지만 오멜은 정신이 팔린 듯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시선은 다가오는 토벌대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토벌대의 가장 선두에는 거구의 남자가 있었다. 그 눈매는 날카로웠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선이 갑옷 위로 슬쩍 보였다. 거기에 커다란 대검으로 보이는 검을 등위로 둘러메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사, 왕실 기사단의 기사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그 기사단의 남자와 에본윙의 전투부대를 이끌고 있는 남자가 거리를 두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이곳을 포기하고 즉시 떠나거나, 우리의 검에 목숨을 잃거나.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것은 우리도 원치 않는다.”
“기계처럼 매번 같은 말을 하는 녀석이구나. 우리의 답도 똑같다.”
“그건 유감이군.”
“으하하! 유감인 것은 너희들 쪽이겠지! 우리들에게는 플로리스님께서 함께하신다. 위대한 드래곤께서 말이지!”
“...플로리스? 위대한 드래곤?”
그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대치하고 있는 에본윙의 무리를 살피듯 둘러보다가 내 옆의 오멜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오멜··· 어째서 네 녀석이 이곳에 있지?”
“...알데론.”
“그렇다는 것은 옆의 네년이 그 도망친 드래곤이라는 것이군. 드래곤 나이트에게 꼬리를 말고 허겁지겁 엘 메이아로 도망쳤다는 소식은 들었건만.”
“오멜, 아는 사람이야?”
그 남자의 말에 오멜은 조금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멜에게 물었다.
“...알데론 그레이마크(Alderon Greymark). 아는 사람이기는 한데···”
“조국의 배신자인 네 녀석에게 아는 사이라고 듣고 싶지 않다. 후회스러울 지경이군. 왕실 기사단에 막 들어왔을 때의 애송이인 네 녀석에게는 조금은 연민을 느꼈건만, 그 결과가 너를 여태껏 키워주고 보호해준 조국에 대한 배신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나는···”
알데론이 쏘아붙이는 말에 오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왕실은 재능 있는 너에게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 기대는 아직도 여전해. 여왕 폐하께서는 조국을 배반한 네 녀석의 의식도 없는 어머니를 계속 보호하라고 친히 명하셨다.”
“...엄마를?”
“그런데도 너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구나. 네가 인간의 탈을 쓴 마물이 아니라면 이렇게 드래곤이나 악한 세력과 어울리고 있지는 않겠지. 정말 실망스럽군. 이번 건은 반드시 왕실에 보고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마지막 남은 미련을 버리실 수 있으시겠지.”
알데론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미련을 버린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오멜, 너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젠탈리온으로 돌아와라. 이건 너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다. 더는 되돌릴 수 없을 거다.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너에게 묻지도 않을 거다. 물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나는 오멜이 가지 않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나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멜이 가지 않는다면, 왕실의 선의로 보호하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오멜이 젠탈리온 왕성을 떠나며 예상했던 것처럼 왕실은 젠탈리온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마법사와의 협상 카드인 그의 어머니를 쉽사리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협상이 결렬된다면, 카드는 더 이상 손에 지니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 사이로 오멜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젠탈리온으로 돌아가지 않아.”
“...오멜.”
“알데론, 정말로 드래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젠탈리온의 모두는 거짓을 믿고 있어··· 그건 천 년 전에 나이트메어가 토벌되었을 때부터 이어진 거짓말이야. 그것에 속고 있다고. 나도 그 거짓말에 속았던 사람으로, 이제는 진실을 아는 사람으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
“웃긴 소리를 하는군.”
알데론은 코웃음 쳤다.
“나는 드래곤 토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꽤 유명한 이야기지. 네 옆에 있는 드래곤의 어미의 목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네 녀석의 손으로 쳤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잘난 채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다는 건가.”
“......”
그 말을 들은 오멜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그 모습에 몇 번이고 오멜을 불렀다. 하지만 오멜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이런 모습의 오멜을 본 적이 있었다. 드래곤 토벌 때였다.
드래곤에 대한 펜하임님의 이야기를 듣고 토벌에 나아간 오멜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작전에서 계획했던 자신의 역할조차 제대로 다하지 못했을 정도로.
나는 알데론이 오멜의 정신을 더 이상 공격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오멜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내린 힘겨운 결정을 지지해주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마나를 정렬하기 시작했다.
손 위에서 차갑게 정렬된 마나는 서서히 기하학적인 마법진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을 따라 토벌대를 향해 더 큰 마법진이 공간 위로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했다.
“공격해라!”
“플로리스님을 위하여!”
내 마법진이 전개되는 것을 신호삼아, 에본윙의 공격대가 토벌대를 향해 일제히 뛰어들었다.
활과 마법이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내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알데론의 얼굴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법진을 천천히 그려 나가며, 온몸의 신경은 그를 향해 있었다.
나는 단 일격에 토벌대를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콰직
알데론도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표정은 너무나 차가웠다. 나를 토벌해야 할 강한 마물,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러던 그는 자신의 대검을 꺼내어 들고, 흙바닥 위로 강하게 내리꽂았다. 날카로운 검이 바닥을 파고드는 작은 소리는 너무나 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는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포효했다.
-크아아!
어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시점에는 이미 늦었다.
그의 포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그것을 자신의 검을 통해 증폭시켰다. 거기에 마나가 섞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포효로부터 내가 전개하고 있던 대규모 마법진이 마치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모래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마법이라는 규칙을 따라 정렬해 두었던 마나는 자잘한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후욱!
그는 움직였다.
나는 여전히 패닉에 빠져 있는 오멜을 옆으로 밀쳐 내고 크게 뒤로 뛰었다.
나에게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석 단검은 여전히 품에 지니고 있었고, 이 전투에 참여하며 에본윙의 썩 나쁘지 않은 장검까지 빌려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 무기를 받아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를 순식간에 뛰어 도약한 후 휘두르는 알데론의 대검은, 피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대검이 내가 있던 바닥에 닿자마자 마치 폭발과도 같은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만약 저 대검을 받아치려 했었다면 뒤이은 폭발에 틀림없이 휘말렸을 거다.
“네가 그 최강의 마물이라는 드래곤이란 말이지. 그 힘을 나에게 보이거라!”
다행히 내 몸의 컨디션은 꽤나 좋았다. 좋은 것을 넘어서 플로리스와 그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싸우기 전과 깨어난 이후의 내 상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건 이질감이 있는 힘은 아니었다. 마치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기라도 한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는 알데론에게 곧장 달려들어 몇 번의 검을 부딪혔다. 마치 서로의 수준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우리는 몇 합을 주고받았다.
왕실 기사단의 수석 기사라는 자리는 괜한 자리가 아니었는지 그의 힘은 꽤 감당하기 힘들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귀를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마치 내 손에 든 검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떨림이 뒤따라왔다.
“플레어!”
잠깐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서 나는 주저 없이 비어 있는 손으로 마법을 던져 넣었다.
하지만 알데론은 조금 전과 비슷하게 자신의 대검을 자신의 바로 앞 바닥 위로 꽂아 넣더니 마치 방패처럼 그 마법을 받아 내었다.
나는 날아간 불덩어리가 그의 검신과 부딪힐 때 마나가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힘겨워 보이는군.”
“...천만에.”
“네 녀석은 어째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을 따라한 그 모습으로는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근육도, 검이나 마법조차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비늘도 없어. 나를 얕보고 있는 건가?”
내 마법을 손쉽게 막아 낸 알데론은 다시 나에게 도약했다.
처음부터 그의 움직임에는 마나가 섞여 있었다. 기사들은 마법사와 같이 높은 마나 레벨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마나를 최대한 활용한 검술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움직임에까지도 마나를 독특하게 섞어서 보조할 정도로 기사들에게도 마검술은 필수적이다.
“너야말로 내 모습이 그저 인간을 따라한 모습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이 모습이면 안 돼?”
“드래곤은 몬스터다. 인간이 아니라. 그 높은 마법 수준으로 인간인 척을 하고 있을 뿐이겠지. 그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 이건 내 모습이야. 누군가를 따라하거나, 위장한 게 아닌 드래곤인 내 모습이라고.”
“재밌는 농담이군.”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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