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1)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이봐.”
너무나 달콤한 잠이었다. 언제까지나 그대로 잘 수 있을 정도로, 평생을 잠만 자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달콤하고 행복한 잠이었다.
몸은 따뜻했다. 마치 푹신하고 막 세탁한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완벽한 온도였다.
몇 번이고 뒤척이고 싶었다. 졸리지 않아도 그저 뒹굴거리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 포근하고 간질거리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애써 무시했다.
감은 눈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달콤한 잠이 혹시라도 깰까 봐 나는 끝까지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흐흥. 정말로 못된 녀석이구나. 한심하고 게으르고··· 네 녀석은 드래곤이 아니라 도마뱀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아니, 이미 하는 행태는 도마뱀과 다를 바가 없구나.”
“...진심으로 욕하지는 말아 줄래?”
약속 대련 아니었냐구. 진심을 다해 때리면 어떡해.
그래. 난 한심하고 게으르다. 그게 내 천성이야. 나도 잘 알고 있다고.
내 상처를 건드리는 그 말을 듣고는 나는 그제서야 복잡미묘한 마음을 가지고 눈을 천천히 떠서 나에게 심한 말을 한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붉은 머리카락에 사나워 보이는 새빨간 눈동자. 그곳에 서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말하지 않았어? 나는 너, 너는 나. 네가 그 마법석을 쓰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의 존재는 겹쳐져 있어. 네가 보고 듣는 것, 그리고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한심한 녀석이라고.”
“...됐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까. 모르는 척하려는 건 아니야.”
플로리스에게는 내 모든 것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민망해진다. 누구나 남에게는 숨기고 싶은 개인적인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사생활조차 지킬 수 없다니.
하지만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한하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내가 플로리스와 대화한 것이라고는 며칠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그때는 서로를 죽이려 들었으니까 그다지 교감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소한 것을 포함한 내 모든 것을 아는 상대와 마주하는 것은 거꾸로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나에게도 그렇지만 플로리스도 똑같다. 나는 플로리스가 다미안을 만났을 때부터, 자신이 죽으며 어리석게도 그 마법석을 남기는 순간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이 묘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 몸을 가져갈 생각이야? 또 싸움이라도 하고 싶어?”
“고작 인간 기사에게 쩔쩔매는 네 녀석의 한심한 꼴을 보아서는 내가 이 몸을 차지하는 것이 모두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아니야. 이건 단지 꿈이야. 너는 깊은 잠에 들었고,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전에 너와 싸웠을 때는 꿈이 아니었어? 그거랑 달라?”
“정말 꿈이라도 꾼 게냐? 그때는 꿈이 아니었어. 현실이었지.”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또렷한 소리로 나를 비웃는 플로리스의 생생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게 꿈이라면 이제 나를 좀 보내주지 않을래? 단검에 찔리고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너와 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의 나는 한가하지 않거든.”
이게 꿈이든 아니든, 여전히 플로리스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금 깨달았다. 혹여나 마법석 단검에 찔려서 그대로 죽은 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역시 그 정도로 죽을 녀석은 아니었다는 거다.
줄곧 종알거리며 얘기하던 플로리스는, 갑자기 입을 닫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오 초, 십 초··· 그렇게 갑작스러운 침묵 사이에 내가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기 시작할 무렵 플로리스는 입술을 옴작거리며 무언가를 말했다.
“...뭐라고? 미안, 잘 안 들렸어.”
“그러니까.”
최상급 드래곤이자 전설적인 드래곤으로서 그녀의 말과 행동은 항상 당당하고 거만했다. 자신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 주저하는 듯,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구나.
“부탁이 있어.”
“부탁?”
“이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미련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의 파편이다. 플로리스라는 존재가 조각난 그 일부지. 그래서 잊고 있었어. 그걸 네 녀석을 통해서 겨우 기억할 수 있었다는 건, 꽤나 부끄럽지만 부정하지 않겠어.”
플로리스는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 눈을 살짝 바닥을 향하며 계속 말했다.
“이제는 알겠어. 다미안을 만나려는 것도 전부 내 욕심이었어. 다미안도 내가 그런 짓을 하기를 바라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넌 다미안도 그 마법을 쓰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거 아니야? 그래서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랬어. 그랬지.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거다. 이제는 나를 편하게 해 달라고.”
편하게 해 달라.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리저렉션 마법은 그야말로 저주였어. 뭐, 네 녀석에게는 잘된 일이겠지. 그 저주는 내가 온전히 감당했고 네 녀석은 그 마법석을 썼다는 기억까지 잃었으니까. 그건 너에게 있어서 얻을 수 있던 최상의 결과였어. 생각해 보면 네가 그 마법석을 쓰기 전에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분명 너는 한심하고 되먹지 못한 드래곤이지만, 그래도 명색은 나와 같은 급인 13레벨의 드래곤이었으니까.”
“......”
“어찌 됐든 나를 그 저주에서 해방 시켜 줬으면 한다. 단순히 그거라면 어렵지 않을 테지만, 정말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플로리스는 주저했다. 그녀의 입술이 얼어붙은 듯, 쉽사리 다음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라지기 전에 다미안의 무덤을 봤으면 해.”
“...그건 어째서?”
“다미안이 만약··· 정말로 만약에··· 스스로에게 그 마법을 썼다면 분명히 자신의 무덤에 돌아와 무슨 표시를 남겨 놓았을 거야. 자신의 존재가 멀쩡히 남아 있는데 무덤을 남겨 놓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서··· 다미안의 무덤만 볼 수 있다면···”
플로리스가 리저렉션을 남긴 이유는 못다 한 복수를 하겠다거나, 삶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기 직전 단 하나, 다미안을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미안이 혹시나 그 마법을 써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정말로 낮은 확률의 가능성. 플로리스는 영에 가까운 그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너야말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드래곤이잖아.”
“...마음껏 떠들거라.”
내 회심의 반격에 플로리스는 분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다미안의 무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야? 예전 탐구자의 마을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야?”
“그건 나도 알지 못한다. 내가 젠탈리온의 산과 들을 초토화 시킬 때 탐구자의 마을이라고 그것을 피하지는 못했을 것 같지만.”
그때,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오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상당히 먼 곳이었다. 하지만 나를 찾는 오멜의 분명한 목소리였다.
플로리스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깐 멍한 표정으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캬하핫, 하고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겨?”
“아니, 됐어. 아아··· 그래, 저 인간 마법사 녀석에게 물어보는 건 어떤가?”
“오멜에게?”
“분명 저 남자도 마나필드의 가문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무언가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
맞아. 분명 오멜과 다미안은 같은 성씨였고 오멜은 그 성씨가 흔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오멜이 무언가 힌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멜에게, 라며 혼자 중얼중얼 계획을 세우고 있던 나를 플로리스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다가온 그녀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코에 닿았다. 작은 손가락 끝이 닿은 피부가 조금 차가웠다.
“이제 그만 잠에서 깨거라. 약해 빠진 드래곤이여.”
“으앗···”
플로리스의 손가락이 내 코를 그대로 세게 밀어왔다. 아프잖아.
하지만 내가 불만을 말할 새도 없이 내 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시야가 암전된다. 플로리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없어졌다.
“루비! 젠장··· 루비! 여기도 없는 건가···”
“오멜··· 나 여기 있어··· 콜록···”
멀찌감치에서 들리는 오멜의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가락 끝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만 멀뚱히 뜬 채로 오멜을 부르기는 했지만, 말을 하자 소리가 목을 마구 할퀴는 것처럼 목이 찢어지듯 아팠다. 간신히 짜내는 소리로 오멜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희미했다.
폐가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등에서 올라오는 밤이 깊은 산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겨우 내 의식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랐던 건 오멜이 그런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확인이라도 하듯 멈춰 서서 내 이름을 부르던 오멜은 금세 구덩이에 반쯤 파묻혀 있던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아얏···!”
“루비 미안. 조금만 참아···”
오멜이 나를 구덩이에서 들어 올릴 때 옆구리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 이 구덩이에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고통을 버티며 필사적으로 오멜의 어깨에 매달렸다.
“...나 많이 다친 거야? 다리 한쪽이라도 사라졌을까? 아니면 이번에는 왼팔이라도 없어진 걸까?”
“왼팔같은 나쁜 농담하지 마··· 다행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만 내 마법으로 어떻게든 처치할 수 있어.”
“그건 정말로 다행이네.”
다행이라는 것은 내 진심이었다.
고개조차 돌리기 쉽지 않아서 내려다 볼 수는 없었지만, 몸 내부를 찌르는 통증은 주로 옆구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알데론의 검을 내가 안쪽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급소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강하게 베였거나, 기껏해야 갈비뼈가 부러진 정도지 않을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그저 탈진한 것일 거다. 지독하게 졸렸다. 손가락 끝까지 피 대신 피로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 작가의말
15번 타이틀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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