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2)

“...그래서 여기는 어디야? 다들 어떻게 됐어? 바나랑 알데론은?”
오멜은 나를 단단한 바닥 위로 천천히 눕히고 그 위로 마나를 흘려 넣었다. 쭉 차가웠던 공기에 따뜻함이 감돌고 기묘한 부유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처의 고통도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건 꽤나 좋은 기분이었다.
“내 마법이 바나의 마법을 밀어내지 못했어··· 아마 서로의 마법이 거의 대등했겠지. 힘과 힘이 그대로 충돌해 버렸어. 그 폭발로 아마 그 자리의 모두가 튕겨져 나갔을 거야.”
“튕겨져 나갔다는 건···”
“그 말대로야. 최대한 여럿을 보호하려고는 했지만 나도 마법을 막 전개한 직후여서 차마 겨를이 없었어···”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는 목을 조금 돌려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 산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하지만 그건 확실히 조금 전까지 있었던 풍경과는 딴판이었다. 정말로 그 공터에서 어딘가로 날아갔나보다.
“그래도 다들 죽지는 않았겠지. 특히 바나나 알데론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 둘은 또 에본윙을 토벌하러 오겠지?”
“저쪽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겠어. 특히 단장님이 바나까지 합류시켰다는 건 이 토벌 작전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려는 의도일 텐데 그건 거꾸로 여기에 병력을 오랜 시간 투자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있는 이상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젠탈리온의 입장에서는 엘 메이아와의 남쪽 전선에 여유가 있다면 가능한 토벌을 완료하려 할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남쪽과 북쪽 정반대의 지점으로 병력이 분산되니까. 그건 남쪽 전선의 상황에 달려 있을 것 같은데···”
젠탈리온은 남쪽 전선에 여유가 있는 이상 에본윙을 토벌하려 할 것이다. 그 말은 남쪽 전선에서 엘 메이아의 공세가 강해지면 에본윙을 토벌할 여유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멜, 엘 메이아는 에본윙이 젠탈리온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올리비아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드래곤의 토벌로 몬스터 카니발이 발생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어. 그래서 에본윙이 보내는 몬스터들도 몬스터 카니발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에본윙이라는 조직의 존재는 파악하지 못했을 거야. 애초에 이들이 젠탈리온을 타겟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젠탈리온이 어떤 미지의 조직과 싸우느라 병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엘 메이아가 알게 된다면, 그걸 이용하겠지?”
“...그렇겠지.”
엘 메이아에게 상황은 상당히 단순하다.
이들의 병력은 젠탈리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따라서 몬스터 카니발과 발맞추어 전쟁을 개시했다.
그 몬스터 카니발에 대해 알려 준 것은 틀림없이 올리비아다. 왜냐하면 올리비아는 젠탈리온이 드래곤을 토벌했고, 그것이 나타낼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토의 북쪽에서 젠탈리온이 미지의 세력과 싸우는 데에 병력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할 거다.
반대로 젠탈리온의 입장은 훨씬 복잡하다.
젠탈리온은 남쪽 전선이 잠시 조용한 때를 틈타 에본윙을 빠르게 토벌하지 못한다면 남쪽과 북쪽 영토의 넓은 전선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젠탈리온의 병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전선을 안쪽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아, 맞아. 오멜.”
젠탈리온의 영토에 대해 생각하던 중 나는 문득 조금 전 있었던 플로리스의 부탁을 떠올렸다.
다미안 마나필드의 무덤. 그게 실존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만약 단서가 있다면 그건 오멜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미안은 오멜과 같은 가문의 사람이니까.
“네 고향은 이곳과 가까워?”
“내 고향? 젠탈리온 북부에 있으니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그건 왜?”
어리둥절한 표정의 오멜에게 나는 꿈에서 만난 플로리스와의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플로리스는 영원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미안의 무덤을 보고자 한다.
“...그래?”
그 이야기를 들은 오멜은 조금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그 심정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플로리스의 이야기는 아무리 봐도 비극이었으니까. 슬픈 이야기였다.
다미안도 죽게 되었고, 플로리스도 영원을 떠돌다 결국 안식 아닌 안식에 들게 된다. 둘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그렇지만 나도 사실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아서··· 너도 알겠지만 내가 왕성에 들어온 게 어릴 적인데다가 당시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남은 기억이 많지가 않아.”
“...미안, 조금 무신경한 말을 해 버렸네.”
“아냐. 그런 뜻은 아니었어. 다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나필드 가문의 묘지가 있었던 것은 기억나. 거기에 있는 묘비들이 상당히 특이해서 아버지에게 자주 물어봤었거든.”
“묘비들이 특이했다고?”
“응. 할아버지나 지금과 가까운 몇 세대의 묘비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묘비는 이름을 포함한 아무런 정보가 적히지 않은 무명석이었어.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잊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다미안은 11레벨로 최초의 초월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를 두려워한 젠탈리온 왕실에 의해 죽게 되었다.
죄 없는 그를 죽인 것에 대해 왕실도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 명분에 따르면 아마도 다미안은 상당히 너무한 취급을 받았을 거다. 왕실이 직접 나서서 그를 죽인 것에 대해 명분을 가지려면, 아마도 반역자와 같은 모욕적인 이름이 따라붙었겠지.
당시 왕실이 탐구자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말이다.
마나필드의 후손인 오멜이 젠탈리온 북부 출신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미안이 죽은 후 그 가족은 다른 탐구자들과 같이 젠탈리온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지는 잘 모르겠다. 삶에 대한 포기였을까? 그렇게 아등바등 도망가고 싶지조차 않았던 걸까? 아니면 다미안과 함께 했던 그 장소를 떠나기 싫었던 것이었을까?
분노에 미쳐버린 플로리스가 젠탈리온 영토에 마법을 난사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은 그들은 다미안에게 붙여진 그 ‘명분’으로 인해 여러 세대를 거치며 고통받았을 거다. 따라서 마나필드 가문은 한동안 그들의 묘비에조차 이름을 적지 못하였고 시간이 흘러 간신히 모두에게서 그것이 잊혀진 다음에야 제대로 된 묘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명석의 진실이었다.
“무명석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묘비를 본들 어느 게 다미안의 묘비인지 알 수도 없을 거야.”
플로리스는 나와 존재가 겹처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말도 듣고 있을 거다.
나는 이것조차 엿듣고 있을 플로리스에게 말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만 아쉽게도 갑자기 플로리스가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그래도 뭐, 일단 가보자구. 기억하지 못했던 표식이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방법이 없어. 에본윙이 토벌된다면 정말 우리에게는 남쪽 전선밖에 남은 길이 없게 돼.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거야.”
“그거 말인데, 지금까지는 에본윙이 통제권을 얻은 몬스터만을 젠탈리온으로 보내고 있었지? 그러지 말고 오히려 전면전에 나서야 해.”
“하지만 너도 봤잖아. 우리가 함께 싸운다고 하더라도 에본윙의 전력은 절대적으로 약세야. 전면전으로 간다면 오히려 젠탈리온 입장에서는 토벌이 쉬워지는 것이···”
오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 전의 싸움으로도 이들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대로는 젠탈리온의 강한 기사들과 맞붙는 건 힘들다.
하지만 이건 에본윙과 젠탈리온의 일대일 전쟁이 아니다.
“젠탈리온을 이기지 않아도 돼. 젠탈리온 북쪽에서 싸움이 있다는 것만 계속 보여준다면 엘 메이아가 눈치채고 분명히 남쪽 전선을 밀어붙일 거야. 지금의 넓은 방어선은 금방 무너질 거고 북부 영토도 우리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겠지.”
“북부 영토라면.”
“응. 네 고향까지 말이야. 그렇게만 되면 마나필드의 가묘도 둘러볼 수 있어.”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나는 엘 메이아를 신뢰하지 않는다.
엘 메이아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던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여전히 나와는 크게 관련 없는 곳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건 엘 메이아가 아닌 올리비아다.
올리비아는 누구보다 전쟁을 이끌어 젠탈리온을 공격하는 데에 진심이다. 그건 다른 무엇에 흔들릴 것이 아니다.
그런 올리비아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올리비아는 내 가족이고, 내 여동생이니까. 올리비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나와 같은 생각이다.
“일이 잘 풀릴까···”
“잘 풀릴 거야.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론가 사라진 레비티스 녀석을 회수해서 살려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이들의 수장이 갑자기 사라져서야 우리도 곤란하고.”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오멜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의 현기증이 찾아와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상처도 꽤나 아물었다. 완전히 회복되려면 오멜의 마법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당장 이렇게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바나와 알데론이 언제 또 찾아올지 알 수 없다. 그 전에 에본윙의 수장인 레비티스 녀석과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더 이상 방어가 아닌 공격에 나서기 위해 정비해야 한다.
‘올리비아···’
나는 여전히 올리비아를 설득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정말 루비라는 것을, 플로리스가 아닌 루비라는 것을 올비이아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무언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분명히 같은 곳에서 마주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올리비아는 조금은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내 이 마음은 절대로 거짓된 것이 아니니까. 누구보다 진심이고, 누구보다 루비로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전해졌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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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빠르게 흘렀다. 그 기간 동안 우리의 계획은 천천히 현실이 되었다.
줄곧 방어에 급급했던 에본윙이 나와 오멜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채 산을 내려와 그들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젠탈리온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거기에 예상대로 엘 메이아는 우리의 소규모 전투를 감지했다는 듯 남쪽 전선에서 작정한 듯 강한 공세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젠탈리온의 배치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와 오멜이 포함된 에본윙의 전력을 어느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인지 혼란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젠탈리온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그들의 움직임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엘 메이아의 공격은 거셌다. 그들은 젠탈리온이 북쪽 방어선에 일부 병력을 배치한 틈을 타서 강하게 몰아붙였고, 결국 젠탈리온은 남쪽과 북쪽의 방어선을 모두 천천히 내륙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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