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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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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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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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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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름꽃 (1)

DUMMY

#17. 보름꽃


“위대하신 드래곤을 뵙습니다.”


게이트포트의 서쪽. 그야말로 젠탈리온과 엘 메이아를 잇는 길목과도 같은 이곳은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둘러본 풍경은 삭막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이곳에서 흘렀고, 얼마나 많은 무기가 이곳에서 깨어졌는지는 이루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엘 메이아의 국왕과 논의된 대로 나와 오멜은 엘 메이아에게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

그와 논의한 대로 우리가 곧장 향한 곳은 엘 메이아의 입구이자 젠탈리온의 공세를 반드시 막아야 하는 곳인 게이트포트였다.


“그러니까 그런 건··· 루비로도 괜찮으니까요.”

“인간으로서 드래곤께 감히 그럴 수는···”

“그럼 루비라고 부를게?”

“잠, 잠깐! 시엘라. 그런 무례는···”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잖아? 오히려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칼리안 네가 무례한 거 아니야?”

“그, 그, 그건.”


시원스러운 그 말에 칼리안이라 불린 남자는 식은땀까지 흘릴 정도로 적잖게 당황했다.


나와 오멜은 게이트포트 서쪽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최전방의 병력을 총지휘하고 있는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먼저 시엘라 버샤드(Sierra Vershard). 정규군 단장을 맡고 있는 여기사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정규군의 단장 치고는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장난기가 많았다.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가벼운 사람으로까지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그것이 단지 가볍거나 장난스러운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 본인이 직접 자른 것이 틀림없는 거칠게 손질된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간신히 닿았다. 그리고 군데군데 큰 흉터가 새겨진 제법 검게 탄 피부는 그녀가 얼마나 오래 전장에서 지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뭐, 어때. 너도 올리비아에게는 꽤 친하게 터놓고 지냈었잖아? 그녀도 드래곤이었다며?”

“그, 그것과 이거는 다른 문제잖아. 애초에 올리비아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고··· 거기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는걸.”

“흠. 그랬었나. 올리비아에게 미움받고 있었어?”

“나야 모르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칼리안은 시엘라에게 소리쳤다.


칼리안 에버가드(Kalyan Evergard). 정규군 부단장을 맡고 있는 남자 마법사다.

시엘라보다는 훨씬 더 어려 보이는 외모였지만 꽤나 오랜 기간 같이 지내 왔는지,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둘 사이는 상당히 편해 보였다. 동료로서 강한 유대감이 보였다.

상당히 마르고 큰 키에, 금색이 비치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조금 우물쭈물하는 성격으로 보아 시엘라에게 평소에도 여러모로 놀림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와하하! 이미 다 지난 일인걸. 네 녀석이 올리비아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서 아무도 모르게 될 거니까 걱정 마.”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고! 젠장··· 너 때문에 알게 된 사람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거기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올리비아는 나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었고···”

“그래.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더 놀리지 않을게.”


시엘라는 그 말과는 다르게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을 하며 잔뜩 울상이 된 칼리안의 등을 툭툭, 무심하게 두들겼다.


“그래서 루비로 괜찮을까?”

“네, 뭐. 그게 편하시다면 저는 좋아요.”

“너도 눈치챘겠지만 올리비아와는 생전에 전장의 가장 선두에서 같이 싸워왔었어. 나도 그렇고 여기 이 비실한 마법사 녀석도 그렇고, 이곳의 모두는 올리비아의 동료였거든. 그래서 젠탈리온 망할 녀석들이 나붙인 그 거짓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말아. 우리는 전혀 믿지 않고 있으니까.”


이들은 올리비아의 동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올리비아의 모습을 가까이서 꽤 오랫동안 보아왔고, 드래곤이 사악하다는 젠탈리온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국왕의 말대로 엘 메이아에게 협력하겠다고는 했으나, 정작 다른 엘 메이아인들이 드래곤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젠탈리온의 말을 믿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스로를 올리비아의 동료라고 하는 이들의 말은,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을 녹였다. 그제서야 진심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 전장의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젠탈리온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서로 통성명이 끝나고 지도를 테이블 위로 펼친 후, 본격적으로 오멜이 전황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정말로 약아빠진 녀석들이야. 올리비아가 죽은 후 순식간에 전선을 회복해서 우리를 이곳까지 몰아냈지만, 정확히 여기 다음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

“...뭔가를 기다리고 있군요?”

“뻔하지. 올리비아가 없는 지금, 그들로서 우리를 충분히 이길 수도 있겠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주지 않고 싶다는 뜻이야. 젠탈리온의 선동에 넘어간 주변국들이 정비하는 대로 엘 메이아의 사방을 공격하기 시작할 테니까. 확실하게 우리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어.”


로웨나가 올리비아를 죽였다는 것은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젠탈리온은 곧장 엘 메이아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고, 주변국들과 함께 엘 메이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완전히 끝장을 낼 계획이었다.

아마 나라간의 정치적인 물밑 작업은 완료되었을 거다. 엘 메이아를 공격하는 날짜까지도 이미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젠탈리온은 승리가 확실해지는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전선을 걸어 잠근 채로.


“요 며칠은 전쟁이 시작한 이후로 가장 평화로웠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건 마치 폭풍의 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저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대책이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꽤나 절망적이거든.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기분이라니까.”

“그런 말투로 울고 싶다 해도 말이야···”


와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시엘라를 옆에서 칼리안은 흘겨보았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 것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혹시 그쪽에서는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을까? 뭐라도 좋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저희도···”


오멜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을 지도 이곳저곳으로 향했다.


“루비, 에본윙은?”

“에본윙도 이제는 특별히 움직이기는 어려워. 무엇보다 엘 메이아가 전선을 뒤로 물리면서 직접 도움을 주기도 어렵게 됐으니까.”

“저쪽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당분간 내가 저들에게 합류할 수는 없으니까 현재 거점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다시 밀려서 산맥으로 돌아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며 나와 오멜은 더 이상 에본윙과 함께 움직일 수는 없었다. 급한 대로 방어적인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방어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심지어 산맥에서 멀어지면서 보급도 불안해졌다. 기껏 확보한 젠탈리온의 영토를 다시 포기하고 본거지가 있는 산맥에서 버틴다면 젠탈리온도 당장은 급하게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만···


“북쪽에서 젠탈리온을 공격했던 녀석들의 이름이 에본윙이었군.”

“한동안 남쪽의 엘 메이아 움직임에 맞춰서 양쪽에서 공격했었거든요. 규모가 크지 않아서 소모전이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굉장히 도움이 됐었어. 아니, 그것조차 젠탈리온의 계획이었던 걸까. 어디까지 예상했는지 도통 모르겠구만.”


시엘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루시··· 젠탈리온의 여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젠탈리온은 왕국이다. 저들의 모든 움직임의 뒤편에는 여왕으로 즉위한 그녀의 판단이 있을 것이었다.

그날 루시와 대화하였을 때, 그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말했던 대로 진심으로 젠탈리온의 예언석을 믿고 있고, 드래곤을 절대적인 악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짓을···


“루시? 아, 그 공주님 말이지. 이제는 여왕님이시지만.”


내 혼잣말을 들은 시엘라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에 올리비아의 제안으로 그 공주를 암살하려 했었어. 그 작전은 결국 실패하기는 했지만 만약 성공했더라면 지금 전쟁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녀가 없었더라면 왕위 계승이 곤란해지면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을 테니까. 올리비아의 판단은 정말로 대단했어.”

“암살···?”


무언가 익숙한 내용에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오멜과 눈이 마주쳤다.


아. 맞아. 그 사건 말이지.

루시를 죽이려 왕성안까지 들어왔던 두 명의 괴한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루시에게는 정말로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크게 저항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 암살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이루 말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시엘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죠? 공주를 죽이려 엘 메이아에서 젠탈리온의 왕성까지 침입했다니···”

“엘 메이아에서 젠탈리온으로 잠입하려면 크게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해. 먼저는 국경을 넘어야 하지. 이건 산맥을 넘는다면 크게 어렵지는 않아. 산맥이 워낙 험해서 경계에 빈틈이 있거든. 폰더레이라는 마을을 들어 본 적이 있어?”

“폰더레이···”


모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

드래고니아 산맥 중턱에 있는 그 마을은 특이한 별명으로 모험가들 사이에서 불리곤 했다. 바로-


“-산맥의 오아시스.”

“맞아. 그 별명대로 양쪽 나라의 모험가들이 암암리에 왕래하던 곳이거든. 그곳을 거친다면 국경을 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는 않지.”


나는 폰더레이 영주를 떠올렸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가문은 대대로 주변이 마물들로 가득친 산맥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영지를 관리했다. 그 과정에서 폰더레이에는 어느 정도의 암묵적인 자유가 허용되었으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영주는 젠탈리온을 향한 충성심을 증명해야 했다.


“두 번째 관문은 왕도로 들어가는 건데, 이건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통로가 있어.”

“통로?”

“듣자 하니 상당히 오래된 통로라고 하던데. 아주 옛날, 그러니까 왕도 외벽을 건설할 무렵에 엘 메이아와 내통하던 누군가가 파놓았다고 들었어. 실제로 이번에도 그 통로를 사용했으니 실제로 존재하는 통로인 것은 확실해.”


작가의말

17번 타이틀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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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9. 매듭을 풀다 (1) NEW 14시간 전 1 0 14쪽
116 #18. 맹세 (7) 25.02.13 3 0 13쪽
115 #18. 맹세 (6) 25.02.10 6 0 12쪽
114 #18. 맹세 (5) 25.02.06 7 0 11쪽
113 #18. 맹세 (4) 25.02.03 7 0 13쪽
112 #18. 맹세 (3) 25.01.30 7 0 12쪽
111 #18. 맹세 (2) 25.01.27 7 0 12쪽
110 #18. 맹세 (1) 25.01.23 9 0 12쪽
109 #17. 보름꽃 (8) 25.01.20 7 0 11쪽
108 #17. 보름꽃 (7) 25.01.16 10 0 13쪽
107 #17. 보름꽃 (6) 25.01.13 7 0 13쪽
106 #17. 보름꽃 (5) 25.01.09 7 0 11쪽
105 #17. 보름꽃 (4) 25.01.06 7 0 12쪽
104 #17. 보름꽃 (3) 25.01.02 8 0 11쪽
103 #17. 보름꽃 (2) 24.12.30 11 0 12쪽
» #17. 보름꽃 (1) 24.12.26 10 0 11쪽
101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4) 24.12.23 10 0 14쪽
100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3) 24.12.19 10 0 16쪽
99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2) 24.12.16 11 0 11쪽
98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1) 24.12.12 10 0 12쪽
97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5) 24.12.09 12 0 16쪽
96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4) 24.12.05 11 0 11쪽
95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3) 24.12.02 11 0 11쪽
94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2) 24.11.28 10 0 12쪽
93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1) 24.11.25 10 0 11쪽
92 #14. 조우 (6) 24.11.21 12 0 11쪽
91 #14. 조우 (5) 24.11.18 12 0 12쪽
90 #14. 조우 (4) 24.11.14 12 0 11쪽
89 #14. 조우 (3) 24.11.11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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