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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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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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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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름꽃 (4)

DUMMY

준비한 방수포에 옷을 적당히 넣어서 물에 젖지 않게 단단히 묶은 후, 발가락부터 천천히 물에 담그었다. 찌릿, 하고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단숨에 치솟아 오른다.


“젠장, 젠장··· 차가운 건 정말로 질색인데···”


투덜거려도 내 불평을 들을 사람도 없고, 물이 갑자기 따뜻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 몸을 드래곤의 비늘이 둘러싸고 있었더라면 이 정도 차가움은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하며, 나는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웠다. 정말로 차가웠다. 얼기 직전의 물은 얼음보다도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내 몸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물 사이를 내 팔이 한 번씩 휘저어 가를 때마다, 피부가 아릴 정도의 차가움은 이상하게도 빠르게 가셨다.

아플 정도의 냉기는 서서히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바뀌었다. 피부가 차가워진다. 그리고 피가 차가워진다.


“푸하아···!”


냉기는 익숙해졌지만 숨이 서서히 막혀 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곳도 마치 우물 같은 곳이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외벽 근처에 물을 모아두는 시설인 것 같았다.


‘식수는 아니라니까 뭐.’


내가 헤엄친 물을 누군가에게 식수로 주는 건 양심에도 찔릴 뿐더러, 나 역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다행히 이 물은 식수는 아니라고 하니 뭐, 그나마 다행일까.


물속에서는 조금 적응이 되었던 몸은 오히려 물 밖으로 나오자 주체할 수 없이 마구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방수포를 헤집어 옷을 걸치고 마나를 정렬해서 불을 만들어 체온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몸이 회복된 후에야 나는 정말로 젠탈리온 왕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왕성에서 탈출한 후에 죽기 살기로 산을 돌아다녔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 내 발로 다시 기어들어 올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아하하.


“......”


나는 저장고의 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숨을 죽인 채 한참 동안 소리에 집중했다.

마나를 써서 주변에 있는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한다면 더 간단했겠지만,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왕도 외벽의 근처다. 없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혹시나 경비대를 마주치거나 수상한 마나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장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깥은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이 풀밭을 간지럽히는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천천히 문을 열고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주변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밖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맑았고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기분 좋은 서늘한 바람이 삐죽 나온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장고 바로 뒤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외벽이 견고하게 서있었다. 그야말로 어떤 사람도, 몬스터도 넘을 수 없는 강력한 젠탈리온의 외벽이었다.


‘나는 들어왔지만.’


저런 벽을 우회해서 잠입했다는 묘한 고양감 탓에 나도 모르게 헤실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오멜에게 지금 나의 얼굴을 들켰더라면 상당히 부끄러웠을 거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왕도로는 어떻게든 들어왔는데···”


하지만 짧은 승리감도 잠시, 이제부터 진짜 문제가 있었다.

시엘라가 제시했던 잠입의 루트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왕도에서 왕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에는 고대에 만들어진 비밀통로라든가, 경비의 빈틈이라든가, 그런 꼼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전 공주를 암살하려 했던 두 명도 왕도에서 왕성으로 진입하는 데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들었다.

아마도 나와 마주쳤던 그들이 왕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어떤 방법으로 그 옷을 얻은 후 그걸 가지고 왕성으로 들어갔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찌 됐든 일단 왕도로 들어왔으니 한숨은 돌렸다. 천천히 고민하기에는 언제 이들과 주변국이 엘 메이아로 들이닥칠지 조금 조급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왕도와 왕성 내벽 근처를 돌아다니며 직접 고민을 해 봐야겠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


나는 젠탈리온 왕성에서 일했던 메이드였다.

따라서 익숙한 왕도의 지리라고 해봤자 메이드의 일로서 다녔던 몇 곳이 전부였다.

예를 들면, 주방장님의 주방용 칼 심부름을 위해 들렸던 에스마이어씨의 대장간 같은 곳 말이다.


“그렇게 재촉한다 해도 걸리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아. 나를 들들 볶는다고 쇳덩이가 갑자기 잘 벼린 칼날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말일세.”

“저희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상황이 상당히 급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필요하다면 그게 가능한 다른 대장장이를 찾게!”

“에스마이어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특히 왕실에 물품을 납품하시는 에스마이어님 같은 경우는 전적으로 협조해 주셔야 하실 텐데요.”

“지금 나를 협박이라도 하는 겐가?!”


-쿵!


에스마이어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땅 위로 발을 굴렀다. 그건 단 한 번이었지만, 나는 그 발아래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마나가 지면을 흔드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에스마이어씨 앞에 있던 기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그 정도로 눈에 띄게 분노하는 에스마이어씨에게 기사들은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알, 알겠습니다. 일단은 말씀하신 납품 일정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젠장, 가자고. 저 영감탱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뭐?! 이 새파랗게 어린 망할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어?”

“가자, 가자고. 대꾸하지 말고.”

“이리 안 와?!”


상황은 이랬다.

아무리 이전에 한 번 에스마이어씨를 뵌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불쑥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모든 젠탈리온인들은 나이트메어가 남겼다는 그 예언석에 대해 믿고 또 배우며 자라왔다. 따라서 내가 이미 드래곤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누구에게도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곳은 나에게 있어서 익숙한 장소기도 했다. 따라서 일단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상황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에스마이어씨는 기사들이 떠난 후에도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마도 왕실 기사단에서 검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을 언제까지 완성하느냐에 대해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봐!”

“네, 네···? 저요?”


그때, 맞은편 길가에서 슬쩍슬쩍 그 상황을 보고 있던 나를 향해 에스마이어씨가 소리쳤다.

나도 알고 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나를 부르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와 버렸다.


혹시나 나를 알아보신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스카프는 코까지 잘 덮고 있고···

손을 까닥거리며 이리로 오라는 그 제스처에 나는 짧은 시간 천 번도 넘는 고민을 했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아니, 이대로 도망친다면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일 뿐이다. 에스마이어씨가 이대로 경비를 부르기라도 한다면···


“무, 무슨 일로···?”


금방이라도 도망칠 작정으로 다리를 엉거주춤하게 뒤로한 채로, 나는 천천히 에스마이어씨에게 다가 갔다.

조금 전 기사와 싸웠기 때문일까, 그 표정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주름 가득한 눈이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 내려다보았다.


“놀랐는가?”

“...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네. 다른 사람을 겁먹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에스마이어씨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내 상태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그는 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하나 가지고 나와 나에게 내밀었다.


“변명이지만 심술궂은 영감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게. 평소에는 그렇지 않으니까.”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한 그 거친 손가락 끝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사탕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허허,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최근에 손녀가 생겼거든. 자네가 나 때문에 겁을 먹은 걸 보니 그게 생각이 나서 말야. 미안하네.”


나를 보고 손녀를 떠올렸다는 건··· 조금 묘한 기분이기는 했다. 커다란 외투나 스카프로 몸을 덮고 있어서 더 왜소하게 보이는 걸까.


“조금 전에 그 기사들은··· 왕실 기사단이죠?”

“맞아. 요즘 전쟁이니 뭐니, 쓸데없는 짓을 하느라 바쁘지 않는가? 그것 때문에 나를 잠시도 편하게 두지를 않는군.”


아하하, 하고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 망할 녀석들··· 며칠은 더 걸리는 걸 뻔히 알면서 당장 내일 있는 1차 납품에 함께 올려 보내 달라니. 내가 몸이 열 개라도 불가능하다고.”

“원래는 언제였는데요?”

“한 주는 더 있었어. 하루도 아니고 한 주를 당겨달라는 말을 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망치 한 번 쳐보지 않은 녀석들이 도대체 뭘 알겠냐만.”

“그렇게 급하게 요청한다는 건··· 이유가 있겠죠?”

“있기야 하겠지. 소문으로 듣자 하니 엘 메이아 공격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당장 거기에 쓰고 싶다는 거겠지. 그게 잘 마무리되면 좀 평화로워지려나.”


왕실 기사단에서는 한 주 후에 납품되어야 할 검들을 당장 내일 올라올 1차 납품에 함께 전달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것은 아마도 엘 메이아 총공격에 사용될 무기이다. 즉, 한 주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마지막 공격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유가 없었다. 늦어도 한 주 안에 나는 어떤 성과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한 주 안으로 복귀해서 오멜과 함께 젠탈리온의 병력을 막아 내기라도 해야 한다.

그건 한 주가 아닐 수도 있다. 단 며칠일 수도 있다.

목이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 자식들이 또 메이드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기려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메이드요?”

“왕실 기사단에 납품하는 건인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한가하게 이런 걸 인계할 기사들은 없다는 모양이야. 이런 귀찮은 일에 왕성 메이드 애들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더군. 그 애들이 오면 나도 성질을 부릴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는 애들마다 잔뜩 겁에 질려서 말이지··· 불쌍할 따름이야.”


끌끌, 하고 에스마이어씨는 혀를 찼다.


왕성 메이드라.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하지만 메이드들은 특별한 전투 훈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제압하는 것은 정말 간단하다.

그다지 그녀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잠깐 옷을 빌릴 뿐이니까. 그리고 할 일만 끝난다면 무사히 돌려보낼 테니까.


나는 왕성에서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외부에서 왕성으로 납품을 하는 경우 전문 납품업자의 수레로 물건들을 옮겨서 들여 온다. 하지만 그 납품 건과 함께 왕성의 담당자가 미리 물건을 확인한 후 동행하여 왕성 안으로 들여 오게 되는데, 아마도 이 역할을 왕성 메이드가 담당한다는 것일 거다.

그렇다면 메이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납품 확인을 위해 이곳으로 오는 메이드를 중간에서 몰래 잡은 후, 옷을 빌리고 메이드는 잠시 어딘가에 묶어 둔다. 그리고 내가 그 담당 메이드인 척을 하며 왕성 안까지 물건을 인계한다.

왕성 메이드인 척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내 전 직장이기도 하니까.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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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18. 맹세 (6) 25.02.10 6 0 12쪽
114 #18. 맹세 (5) 25.02.06 7 0 11쪽
113 #18. 맹세 (4) 25.02.03 7 0 13쪽
112 #18. 맹세 (3) 25.01.30 7 0 12쪽
111 #18. 맹세 (2) 25.01.27 7 0 12쪽
110 #18. 맹세 (1) 25.01.23 9 0 12쪽
109 #17. 보름꽃 (8) 25.01.20 7 0 11쪽
108 #17. 보름꽃 (7) 25.01.16 10 0 13쪽
107 #17. 보름꽃 (6) 25.01.13 8 0 13쪽
106 #17. 보름꽃 (5) 25.01.09 8 0 11쪽
» #17. 보름꽃 (4) 25.01.06 8 0 12쪽
104 #17. 보름꽃 (3) 25.01.02 9 0 11쪽
103 #17. 보름꽃 (2) 24.12.30 11 0 12쪽
102 #17. 보름꽃 (1) 24.12.26 10 0 11쪽
101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4) 24.12.23 11 0 14쪽
100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3) 24.12.19 10 0 16쪽
99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2) 24.12.16 11 0 11쪽
98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1) 24.12.12 10 0 12쪽
97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5) 24.12.09 12 0 16쪽
96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4) 24.12.05 11 0 11쪽
95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3) 24.12.02 11 0 11쪽
94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2) 24.11.28 10 0 12쪽
93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1) 24.11.25 11 0 11쪽
92 #14. 조우 (6) 24.11.21 13 0 11쪽
91 #14. 조우 (5) 24.11.18 12 0 12쪽
90 #14. 조우 (4) 24.11.14 12 0 11쪽
89 #14. 조우 (3) 24.11.11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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