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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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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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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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름꽃 (5)

DUMMY

-


그렇게 이튿날이 되었다.

왕성 메이드가 에스마이어씨의 대장간에 언제 올지는 예상할 수 없어서 나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길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왕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뻔하다는 점이었다. 굳이 다른 길로 와서 엇갈리게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왕성 메이드가 보이는 대로 제압하기 위하여 적당한 길목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가엾은 사냥감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입을 틀어막고 등 뒤에 있는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데리고 간 후, 조용히 협박하여 옷을 얻어낸다.


“......”


그야말로 전형적인 악당 같은 생각을 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조금 질려 버렸다.

하지만 조금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메이드들은 이런 싸움을 경험하지 못했고, 훈련되지 않은 인간은 조금의 위협만으로도 그 의지가 꺾인다.

여왕님만 만난 후에는 안전하게 풀어 줄 테니까요. 약속해요···


‘온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점점 사그라들 무렵, 혹시나 내가 놓친 것은 아닐까 불안해질 무렵.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뚜렷한 흑백의 메이드 옷을 입은 여성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니었다. 오히려 꽤나 큰 키의 여성이었다.

왕성 외부 업무에 조금은 긴장하고 있는 듯, 고개는 뻣뻣하고 시야는 조금 부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나는 그녀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키는 컸지만 얼굴은 상당히 앳된 끼가 남아 있었다. 젖살이 덜 빠진 말랑말랑한 볼과 크고 둥근 눈동자까지, 마치 강아지같이 순한 인상이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빗으로 잘 빗어 어디 하나 엉킨 곳 없이 곧게 어깨 아래까지 뻗어 있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그녀는-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그녀는 나에게 가까워졌다. 몇 번이고 동선을 확인했지만, 에스마이어씨에게 가는 왕성 메이드를 붙잡을 수 있는 포인트는 이곳이 유일했다.

이 타이밍을 놓친다면, 메이드로 위장하여 왕성으로 향한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타박, 타박.


그녀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노리는 위협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딘다.

나는 주저할 수 없었다.


“으읍···!”

“조용히.”


모든 것은 계획한 대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치 덫처럼 그녀를 낚아챈 나는, 곧장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 깊은 곳까지 단숨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예상대로 갑작스러운 위협에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약간의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덜덜 떨면서 내 명령을 따라 얌전히 골목 안으로 끌려 들었다.


“...어.”


나는 여전히 커다란 외투와 얼굴을 코까지 덮는 스카프로 철저하게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에는 더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가 미흡했던 것일까. 이 메이드는- 엘리샤는 구석에서 자신을 제압하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얼빠진 소리를 냈다.


“루비 언니···?”

“......”


엘리샤의 입에서 주저하며 뱉어진 내 이름에, 나 역시 그녀 못지않게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게 누구냐고 해야 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했다. 모르는 척 내가 할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엘리샤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몸이 우뚝 멈추었다.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저 엘리샤의 얼굴만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잘못 봤어.”

“...루비 언니잖아요? 그 목소리에 그 눈··· 루비 언니 말고 저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제서야 나는 내 손이 꼴사납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미칠 것 같은 갈등에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이라도 하지 못한다면 이대로 젠탈리온과 주변국들은 엘 메이아를 공격하고 그대로 전쟁은 끝난다. 젠탈리온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또다시 드래곤 토벌을 할 것이고, 드래곤에 대한 대를 잇는 거짓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순한 동물같이 나를 바라보는 엘리샤의 시선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지. 내 사사로운 인연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희생할 수는 없는데도.


“...내가 루비라고 해도 달리질 건 없어. 너도 사악한 드래곤에 대해 모르지는 않을 거야.”

“......”


내 말에 엘리샤는 그제서야 조금 주저하듯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게 맞아. 그다지 엘리샤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건 역사적으로 이어진 젠탈리온의 거짓말이다. 플로리스의 죽음으로부터 이어진 드래곤에 대한 거짓말이다. 엘리샤도 그렇게 배웠고, 그건 그다지 엘리샤의 탓이 아니었다.

엘리샤의 그런 반응은 차라리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알아요. 알지만··· 그래도 모르겠어요. 루비 언니가 정말 그런 드래곤이었다는 걸까요.”


하지만, 엘리샤는 시선을 피한 채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의심하는 거야. 내가 그 드래곤이라는 걸 이제 모두가 알고 있잖아. 나를 혐오하고, 토벌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 거잖아.


“지금 내가 네게 하는 짓을 봐. 네가 알고 있던 루비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어. 착한 척을 하고 있었다고.”

“정말 그런 걸까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거죠? 정말로 언니가 그 인간의 적인 드래곤이라고 한다면?”

“그건···”

“제가 알고 있던 언니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라 지금이 거짓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떨고 계시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

“저는··· 믿고 싶어요.”


믿고 싶다.

어째서일까. 모든 젠탈리온인들은 평생을 드래곤에 대한 공포를 배운다. 심지어 왕성 남문에 보란 듯 박혀 있는 저 예언석을 왕성을 드나드는 모두는 질리도록 보았을 거다. 그리고 그 예언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닥쳐올 종말의 예언에 대해 공포에 떨게 된다.

그럼에도 엘리샤는 나를 믿고 싶다는 건가. 어리석었다. 너무나 어리석고, 합리적이지 못하다.


“루비 언니, 정말 보고 싶었다구요···”


엘리샤는 눈을 찡그렸다.

엘리샤는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저 뚝, 하고 차마 삼키지 못한 눈물방울이 덜덜 떨며 엘리샤의 목을 틀어잡고 있는 내 손 위로 떨어졌다.


아아. 모르겠어. 이제는 정말 모르겠어.

내가 엘리샤를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데려온 이유도, 그렇게나 친하게 지냈던 그녀를 위협하고 있는 이유도, 소중했던 내 모든 관계를 자꾸만 망가뜨려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어.


-


“...손수건 잘 썼어.”

“천만에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왕성에 함께 있었을 때에도 언니는 정말로 동생 같았으니까요.”

“이 녀석, 건방진 걸.”

“흐아, 흐앗··· 죄송해요. 간지러워요!”


장난스럽게 엘리샤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마구 간지럽혀 주었다. 엘리샤는 상당히 간지럼에 약한지, 조금 전에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또다시 눈 아래에 고이기 시작했다.

뭐,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닌가. 엘리샤의 손수건까지 빌렸어야 했을 정도로 너무 울어서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결론적으로 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왕성 메이드를 중간에 붙잡지도, 제압하지도, 그 옷을 빼앗지도 못했다.

완전히 실패. 계획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만약 여기에서 눈을 딱 감고 엘리샤를 제압한 후 이 골목에 버려 두고 나왔더라면,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엘리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 나름대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각. 나이트메어라 불리오는 플로리스에 대한 진실. 그리고 천 년을 이어진 젠탈리온의 거짓말.

엘리샤는 상당히 진지한 자세로 내 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다 들은 그녀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이 모두 이해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나는 자신이 평생 들어왔던 이야기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걸 다짜고짜 믿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요··· 저는 언니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무엇보다 같이 메이드로서 일했었던 저의 판단이에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너는 언젠가 나쁜 사람에게 사기라도 당할 것 같아서 걱정되네.”

“에헤헤.”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샤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왕성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씀이시죠···?”

“응. 가서 루시··· 여왕 폐하와 이야기를 해 볼 거야. 메이드로 들어간다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었거든. 말했던 대로 절대로 해를 끼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로 이야기만 하고 싶은 거니까.”

“그렇게 잘못된 계획은 아니었어요. 실제로 왕성 메이드의 배지만 있다면 그렇게 매번 엄격하게 확인하지는 않으니까요. 메이드들도 왕성 안팍을 드나들며 일하느라 바쁘기도 하구요. 하지만 메이드복은 여분을 쓴다고 해도 배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요···”


엘리샤는 고맙게도 진지한 표정으로 내 문제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샤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최근에 왕성 메이드로 일하다가 왕도의 평민과 결혼을 하면서 메이드를 그만두게 된 친구가 있거든요. 원칙적으로 왕성 메이드의 배지는 그만두는 시점에 곧장 반납하게 되어 있는데 전쟁 준비 때문에 절차가 지연되면서 제가 반납 전에 임시로 보관하고 있거든요.”

“네 방에?”

“맞아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왕성 남문을 통과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제가 그걸 가지고 나올게요.”

“잠, 잠깐. 그래도 되는 거야?”

“왕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에게 돌려주신다면 아무도 알지 못할 테니까요. 여벌 옷도 같이 챙겨 올게요.”


내 일에 엘리샤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엘리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준다는 말에, 나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젠탈리온의 입장에서는 엄연한 배신이 된다.


“걱정 마세요.”


걱정 섞인 내 말에 엘리샤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다른 거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구요. 언니가 말한 계획도 듣지 못한 걸로 할게요. 저는 그저 언니가 곤란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걸 돕고 싶을 뿐이에요.”

“어째서 나를 돕는 거야?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어?”

“저 말이죠, 오멜님을 좋아했어요.”


내 물음에 엘리샤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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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18. 맹세 (5) 25.02.06 7 0 11쪽
113 #18. 맹세 (4) 25.02.03 7 0 13쪽
112 #18. 맹세 (3) 25.01.30 7 0 12쪽
111 #18. 맹세 (2) 25.01.27 7 0 12쪽
110 #18. 맹세 (1) 25.01.23 9 0 12쪽
109 #17. 보름꽃 (8) 25.01.20 7 0 11쪽
108 #17. 보름꽃 (7) 25.01.16 10 0 13쪽
107 #17. 보름꽃 (6) 25.01.13 7 0 13쪽
» #17. 보름꽃 (5) 25.01.09 8 0 11쪽
105 #17. 보름꽃 (4) 25.01.06 7 0 12쪽
104 #17. 보름꽃 (3) 25.01.02 8 0 11쪽
103 #17. 보름꽃 (2) 24.12.30 11 0 12쪽
102 #17. 보름꽃 (1) 24.12.26 10 0 11쪽
101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4) 24.12.23 11 0 14쪽
100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3) 24.12.19 10 0 16쪽
99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2) 24.12.16 11 0 11쪽
98 #16. 우리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에 (1) 24.12.12 10 0 12쪽
97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5) 24.12.09 12 0 16쪽
96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4) 24.12.05 11 0 11쪽
95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3) 24.12.02 11 0 11쪽
94 #15. 너를 향한 마지막 인사 (2) 24.11.28 1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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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14. 조우 (6) 24.11.21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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