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보름꽃 (6)

“저는 꽤나 진심이어서 왕성 메이드로 들어왔을 때부터 오멜님의 전속 자리를 계속 노리고 있었을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언니가 갑자기 오멜님의 전속이 되었다고 들었을 때에는 솔직히 질투했어요.”
엘리샤가 오멜에 대해 연심이 있다는 것은 왕성에 있을 때에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전속을 노리고 있었을 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비 언니와 오멜님이 같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느 순간 내가 그다지 오멜님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오멜님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은 이성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존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존경? 오멜을?”
“네에. 오멜님은 멋지시잖아요.”
“...글쎄, 멋진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또 지적이시고, 메이드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게 해 주셨고요. 그리고··· 제 목숨도 구해주셨어요.”
다시금 오멜을 떠올리는 듯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꺄아, 꺄아, 하는 소녀스러운 소리를 내던 엘리샤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왕성 메이드로 들어오기 전, 어릴 적에 상당히 크게 다쳤던 적이 있었어요. 끔찍한 얘기기도 하고 다쳤을 때의 기억이 꽤나 날아가버렸기도 해서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죽어 가는 저를 어머니가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가 우연히 오멜님을 마주치셨어요. 그리고 오멜님의 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어요. 오멜님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으셨구요.”
“오멜도 그게 너였다는 걸 알고 있어?”
“아뇨. 오멜님은 지금도 모르실 거예요. 그 사건을 기억하고 계시다 하더라도 그게 저인 것은 모르실 거예요. 왜냐하면 정말로 저희를 마주친 것이 우연이기도 했고, 제 이름도 듣지 못하셨으니까요. 어머니가 간신히 오멜님의 이름을 들었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제 얼굴도 꽤 달라졌구요, 라고 엘리샤는 덧붙였다.
“그래서 존경이라고 했구나.”
“맞아요. 어쨌든 오멜님은 저에게 생명의 은인이시니까요. 그리고, 그 오멜님이 모든 것을 포기하시면서까지 드래곤인 언니와 함께하고 계신 거니까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어요. 오멜님이 저를 도와주셨던 것처럼요.”
오멜은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이후로 치료 마법 연구에 그야말로 전념했다. 그래서 중상을 입은 어린 엘리샤를 지나칠 수 없었고, 또 충분히 치료할 능력도 있었다.
그런 녀석이다. 자신의 손으로 궁지에 몰아 넣은, 죽어 가는 드래곤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어리석고, 또 좋은 녀석이니까.
“그리고 오멜님을 빼더라도 저에게 언니는 정말로 사악한 드래곤 같은 게 아니었어요. 제가 본 언니는 그런 게 아니라 장난기 많고, 누구에게나 당당한 언니였으니까요. 저는 그걸 믿으니까요.”
“...고마워, 엘리샤.”
왕도에 오면서 나는 줄곧 두려웠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나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오멜도 내 곁에 없는 지금, 이 왕도는 분명 익숙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바다 한가운데라도 떠 있는 것 같은 고독한 공간이었다.
너무나 익숙했기에,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엘리샤가 나를 믿어 준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졌다.
내 과거가 부정당하지 않는다.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도 않는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엘리샤가 나를 믿어 준다고 하는 그 한마디는 내 안에 남아 있던 두려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
그렇게 엘리샤가 ‘곧 돌아올게요’ 라는 말을 남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 지 얼마가 흘렀을까.
어두컴컴한 골목 구석에 몸을 숨기고 무력하게 앉아 있던 나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 그러나 미묘하게 조급함이 섞여 있는 그 발소리는 분명 엘리샤의 것이었다.
“언니···!”
누군가가 버려둔 커다란 나무판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내가 엘리샤의 소리를 듣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자, 그제서야 엘리샤의 조금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게 아니라··· 언니가 없어진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구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는 엘리샤를 나는 달려가서 덥석 껴안았다.
귀여운 동생이야, 정말.
나는 올리비아도··· 이렇게 껴안아 주었던 걸까.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언니? 울어요?”
“...으응, 아니. 아니야.”
갑작스럽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엘리샤를 껴안은 채 잠시 아무 말없이 얼굴을 그녀의 품에 콕 박아 넣고 있었다.
이렇게 바쁠 때에 감상적으로 될 수는 없다. 나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에 엘리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않은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엘리샤가 고맙게도 가져와 준 여벌의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후 붉은색의 배지도 잘 보이는 어깨 근처에 달았다.
엘리샤가 나보다 훨씬 키가 크다 보니 메이드복은 내 몸에 딱 맞지는 않았다. 이곳저곳이 헐렁해서,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옷에 푹 빠진 기분이었다.
“...우헤헤··· 귀여워요.”
“......”
헐렁한 옷을 입은 채로 나를 보며 헤벌쭉한 표정을 짓는 엘리샤를 보고 있으면 조금 묘한 느낌이 들어 버린다. 그런 표정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지만.
이 다음부터의 계획은 간단했다.
에스마이어씨의 가게로 가서 납품업자가 도착하는 대로 함께 왕성 안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원래의 옷으로 환복한 후 옷과 배지를 엘리샤에게 곧장 반납한다.
“배지는 그렇다 쳐도 메이드복은 계속 입고 계시는 편이 눈에 덜 띄지 않겠어요?”
엘리샤의 의문도 틀리지는 않았다. 메이드복을 계속 입고 있다면 조금 더 몸을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옷은 엘리샤의 여벌 옷이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분명히 그 옷의 주인인 엘리샤가 추궁당하게 된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메이드복을 입게 되면 얼굴을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멀리서는 메이드로 위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가까이서 내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눈과 머리카락은 너무나 시선을 잡아끌어 버린다.
메이드 일을 할 때에도 몇 번이나 아네즈 출신이라고 둘러대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젠탈리온 안에서는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임은 틀림없었다.
심지어 내 외모는 이미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요란스럽게 대자보가 나붙었으니 말이다.
“에스마이어씨. 그··· 다음 납품이 언제쯤 가능할 것 같냐고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아서요···”
“에이, 나쁜 자식들. 메이드에게 떠넘길 줄 알았어.”
“죄,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너무한 건 기사단 녀석들이지. 안 그러냐?”
“그··· 아하하···”
나는 이미 메이드복을 입은 상태다. 더 이상 얼굴을 가릴 수 없었다.
난 메이드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외투에 달린 후드를 최대한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채로 멀찌감치에서 에스마이어씨와 엘리샤가 실랑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리샤는 상당히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
“6일. 더 줄일 수는 없다고 전하게.”
“죄송하지만··· 3일을 얘기하셔서요···”
“3일? 허, 참. 가서 이 에스마이어의 자존심을 걸고 그 시간 안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고 하게.”
“네에···”
아마도 엘리샤가 받은 지시는 무조건 납품 기간을 줄이라는 것이었을 거다. 에스마이어씨가 메이드들에게는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을 왕실 기사단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밀어붙일 생각이었겠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바로 엘리샤였다. 하지만 결국 에스마이어씨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 이상, 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기 때문에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고생했어.”
“우우···”
나는 엘리샤가 녹초가 된 채 납품업자의 수레와 함께 도로로 나온 후 합류했다.
여전히 후드는 깊게 눌러 쓴 상태였지만 그다지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나처럼 후드를 덮어 쓰지는 않았지만 엘리샤도 같은 외투를 메이드복 위에 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앞서가는 수레를 뒤따라가는 우리는 점점 왕성 내벽의 남문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됐다. 엘리샤는 충분히 문제가 없을 거라고는 했지만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바로 도망쳐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엘리샤는 어떡하고?
조마조마한 그 마음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마지막 건물의 코너를 돌자, 왕도의 외벽 만큼은 아니었지만 좌우로 견고하게 뻗은 내벽과 커다란 남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문 바로 오른쪽에 마치 주춧돌인 것 마냥 박아 넣어진 돌비석- 젠탈리온의 예언석이 보였다.
그건 천 년을 거쳐 만들어진 젠탈리온 이념의 상징이자 플로리스의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짓말의 상징이었다.
정말로 여왕이 된 루시가 그 거짓말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까?
“멈춰라.”
“안녕하세요. 왕성 메이드 엘리샤입니다.”
수레가 남문에 도착하고 왕성 경비대가 길을 가로막았다.
외투를 살짝 걷어 메이드복 가슴 근처에 달린 배지를 보여 준 엘리샤가 그들에게 납품과 관련된 서류를 보여 주었고, 뒤이어 그들은 수레에 담긴 물품을 간단하게 확인하였다.
“통과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엘리샤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납품업자의 수레와 함께 남문을 통과했다.
나 역시 엘리샤가 한 대로 외투를 살짝 걷어 붉은색의 왕성 메이드 배지를 경비병에게 보여 주었다. 후드는 여전히 얼굴을 푹 덮은 채였다.
“......”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있었지만 경비병의 시선이 내 배지를 날카롭게 확인하는 그 순간, 외투 끝을 잡은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냐. 없어. 에스마이어 대장간에서 납품하는 물건이랑 왕성 메이드 둘이야.”
“메이드 애들도 고생하는구만. 저런 거는 기사단에서 할 일이었을 텐데.”
“전쟁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경비병은 별다른 말 없이 나에게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고, 그들 두 명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등 뒤로하며 나는 남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익숙한 왕성의 풍경이었다.
내가 떠난 이후로 그다지 바뀐 부분은 없었다. 심지어 옷까지 메이드복을 입은 채로 이렇게 들어오니, 마치 금방이라도 오멜의 도서관으로 달려가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펜하임님은 잘 계실까. 메이드장님은, 조리장님은 잘 계실까.
마치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잊으려고 노력했던 온갖 생각이 머릿속으로 일시에 밀려들어왔다. 착잡한 기분이었다.
“언니, 이쪽으로.”
엘리샤는 남문을 통과한 납품업자에게 물품을 전달할 창고의 위치를 알려 준 후 나를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동쪽의 건물 사이로 이끌었다.
“그 외투는 언니 가지셔도 돼요.”
그곳에서 나는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엘리샤의 메이드복은 다시 돌려주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메이드에게 지급되는 겨울용 외투는 다시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돼?”
“네. 외투는 메이드복이랑 다르게 언제나 다시 사고 버릴 수 있으니까요. 언니도 이왕이면 이 외투를 쓰는 게 시선을 덜 끌지 않겠어요? 메이드복은 아니라서 완전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요.”
“정말 고마워, 엘리샤. 엄청 도움이 될 거야.”
“제가 줄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이에요···”
훌쩍.
발랄하게 말을 하던 엘리샤는 순간에 눈물이 고여서 코를 훌쩍였다.
나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고마워, 라고 진심으로 전하며 엘리샤를 세게 안아 줄 뿐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그래도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으응. 알겠어요. 고마워요. 건강한 모습으로 또 봐요.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도··· 잘 풀렸으면 좋겠어요. 사실 여전히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고마워.”
엘리샤가 나를 도운 것은 드래곤에 대한 그 모든 오해가 풀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드래곤을 도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함께 생활했던 루비라는 언니를 도운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너무나 기뻐서, 오멜에게 달려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엘리샤를 위해서, 나는 드래곤에 대한 젠탈리온의 거짓말을 무너뜨린다.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모두가 속지 않도록.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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