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보름꽃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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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샤가 떠난 이후로도 나는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젠탈리온의 왕성이다. 드래곤 나이트는 최전선으로 나가서 왕성에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왕을 지키기 위한 왕실 기사단의 일부와 왕성 경비대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하지만 분명 내가 알고 있던 장면과는 조금 달랐다. 그 당시에는 루시 공주의 암살 사건이 막 일어나기도 했던 터라 정말 삼엄하다고 할 정도로 왕성 내부의 경비가 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 그것에 비해서는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암살 사건 전의 느낌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확실히 전쟁 때문에 전력이 바깥으로 많이 이동했기 때문일까.’
짐작건데 대부분의 전력은 전선에 나가 있기 때문일 거다. 아니면 지금의 여왕을 호위하는 기사들 정도면 팽팽한 전선 사이로 몰래 들어온 암살자 한 둘 정도는 쉽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이곳에 숨어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멀리서 움직이는 경비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했다.
그들은 예상대로 짜여진 루트와 시간을 따라 경계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간격은 넓었다. 특히 교차 지점에서 두 경비대가 만나는 시간은 눈에 띄게 길었다.
분명 기억하기로는 경비가 삼엄해졌을 때에는 경비대가 특정 지점을 교차하는 간격이 아주 촘촘했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상당히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내가 메이드로서 지내며 파악하고 있었던 경비대의 경계 경로와 배치를 최대한 떠올리며 내가 보고 있는 일부 경비대의 움직임에서 전체적인 경계 경로를 천천히 역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계산이 얼추 마무리되었을 무렵, 이미 해는 지고 하늘로부터 짙은 어둠이 땅 위로 내려앉았다.
나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어둠은 눈에 띄는 내 눈과 머리카락을 가려 준다. 몰래 움직이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시간이었다.
계산대로 경비대의 경계 경로를 아슬아슬하게 우회하며 나는 신중하게 왕성의 별관으로 먼저 접근했다.
여왕을 포함한 왕가의 사람들이 머물며 여러 집무를 보는 곳은 본관이다. 그리고 그 본관을 또 다른 작은 성처럼 두르고 있는 것이 별관이었다.
나는 루시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루시는 이 시간이라면 틀림없이 침실에 머물 거다. 하지만 본관 내부를 통해 침실까지 다가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왕실 기사를 비롯한 여러 호위가 겹겹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선택지는 본관 외부에서 창문을 통해 곧장 침실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게 정말 가능한 걸까. 아무리 전쟁 중이라서 정신이 없다고는 해도 여왕이 머무는 본관 근처에는 벌레 하나도 기사들의 허락 없이는 다가갈 수 없을 거다.
‘...생각보다 더 막막하네.’
아무래도 조용히 루시와 대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히려 루시가 활동하는 낮까지 기다리는 것이 확률이 높을까?
그렇다면 그녀가 올 만한 어딘가에서 미리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회를 엿본다든가···
그럼에도 나는 우선 본관의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별관을 통해 본관 근처로 이동하고자 했다. 상황을 확인해야 소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 진입할지, 아니면 낮을 노릴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
“...라고 하던데.”
“그렇게나 빨리 준비를 했다고?”
“그렇다니까.”
하지만 그때, 조용히 몸을 숙이고 별관으로 접근하는 내 등 뒤에서 남자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대였다.
분명 경계 순찰을 하는 간격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확인했을 터다. 지금은 이곳에 올 경비대는 없었을 텐데.
“그들 입장에서도 드래곤이 코앞까지 나타난 거니까. 위기감을 느끼는 건 우리만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러면 이미 준비는 다 됐다는 거지? 우리가 엘 메이아의 전선을 압박하는 대로 양동을 한다는 거고.”
“아직 조율 중인 몇 왕국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쪽도 곧 마무리될 거야.”
몸을 숨길 곳이 있는 건가? 아니, 없다.
순간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머리 위에 있는 별관 내부로 들어가는 창문이었다. 하지만 별관 내부의 경계 경로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대로 들어갔다가 운이 나쁘게 그곳을 지나치는 경비대의 코앞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젠장···’
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두 명의 남성의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들키느니, 갑작스럽게 조우한 내부의 누군가를 빠르게 제압하는 쪽을 택해야 했다.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머리 위의 창문을 내가 몸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살짝 열었다. 그리고 벽을 딛고는 세게 몸을 앞으로 밀어 넣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로 이루어진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복도 곳곳에는 조각상과 장식품 같은 소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우연히 그곳에 있던 경비대의 눈앞에 뚝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일단 숨을 돌리기 위해 나는 빠르게 몸을 숙이고 근처에 보이는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어휴. 됐어. 따분한 일 얘기는 그만하자고. 종일 납품한 무기의 개수를 세느라 눈이 빠질 것 같으니까.”
“그래도 여왕 폐하께서도 이 정도면 우리 편의를 많이 봐 주셨으니까 불평하지는 말라고. 메이드 애들도 붙여 주셨으니까.”
“그래. 알지. 선대 폐하라면 아무리 왕실 기사단이라고는 해도 우리 같은 말단 기사 나부랭이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으셨겠지. 그래도 뭐랄까··· 여왕 폐하의 그런 부분 말이지···”
창문을 통해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들이 이곳을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뭐, 말하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아니까.”
“그다지 불평하려는 건 아니야. 좋으신 분이시지. 성군이신 건 맞지만, 뭐랄까··· 너무 유하시단 말이지. 뭐, 그게 폐하의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지만.”
“그래서 사울로 단장님이 계시잖아. 드래곤 나이트와 왕실 기사단 두 곳의 전권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고 성향도 폐하와는 정반대니까. 적절한 균형이지, 뭐.”
“그래서 우리는 단장님께만 잘 보이면 되는 게 아니겠어?”
“이봐,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지 마.”
“뭐 어때. 나만 하는 생각도 아니잖아? 이 왕성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하다못해 메이드들까지도.”
말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시간에 이곳으로 경계를 올 경비대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누는 대화를 보니 왕성 경비대가 아닌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다.
아마도 낮에 엘리샤가 인계한 에스마이어씨의 납품 건을 마무리하고 복귀하는 길일 거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뚜벅, 뚜벅.
하지만 잠시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오른쪽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였다.
책상 아래에 몸을 구겨 넣고는 있지만 그다지 완벽하게 숨은 것도 아니다. 이대로라면 이곳으로 오는 경비대에게 들킬 확률이 높았다.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며, 그곳에서 벗어나 천천히 반대편 복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렇게 길게 뻗은 서쪽 방향의 코너에 막 다가갔을 때였다.
코너 너머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 이것도 틀림없이 경비대다.
구석에 몰린 쥐였다.
경계 동선은 기본적으로 교차점을 만들도록 계획된다. 그 교차점이 하필 이곳이라니. 이대로라면 앞뒤로 다가오는 경비대를 피할 도리가 없다.
아니. 잠깐만.
나는 이 복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을 넘어서 몇 번이나 이곳을 지나쳤다.
사소한 부분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이곳의 구조나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의 위치.
그렇다면 내 옆에 있는 이 문은-
“고생하십니다.”
“그쪽도.”
-뚜벅, 뚜벅.
문 바깥으로 두 그룹의 경비대들이 스쳐 지나가며 짧게 인사하는 말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좌우로 천천히 멀어지는 발소리.
“...하아.”
지금 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거울도 없고.
이곳은 내 기억과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여전했다. 천장은 높고 공간은 넓었다. 공간의 한쪽으로 마치 미로같이 늘어선 높은 책장들도 여전했다.
이곳은 도서관이자 동시에 오멜이 생활하는 방이기도 했다. 뜬금없는 위치에 놓여 있던 침대와 소파. 나는 그 가구들을 보며 오멜이 상당히 집을 꾸미는 센스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멜이 생활했던 흔적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이제는 그저 도서관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뭐, 이들에게는 배신자의 흔적이니까. 그걸 남겨둘 이유는 없겠지.”
오멜이 나를 데리고 왕성에서 도망간 후, 아마도 오멜의 방은 먼지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색 당했을 거다.
당연했다. 당연히 예상했었지만, 막상 이 황량한 도서관을 보니 심장 한구석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꽤나 다른 느낌이었다.
“오멜이 조금은 슬퍼하려나.”
자신의 방이 사라졌다는 건 오멜에게도 썩 즐거운 이야기는 아닐 거다. 짧게나마 이곳에서 지냈던 나에게도 이렇게 허무하게 다가올 정도였으니까.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조용히 문을 열어 복도를 살폈다.
방금 경비대의 동선으로 확실히 알겠다. 별관 내부를 통해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본관과 가까워서 그런지 실내의 동선은 생각보다 더 촘촘하게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나는 별관을 나가서 바깥에서 이동한 후, 별관 서문을 통과하여 별관과 본관 사이의 공터로 진입하기로 했다.
참고로 도서관의 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그 잠금장치를 박살 냈기 때문에 그걸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분명히 날이 밝으면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을 경비대들이 눈치채게 될 거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그렇게 나는 별관 창문을 통과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온 후, 차분하게 경비대의 동선을 계산하며 사각지대를 따라 별관의 서쪽으로 향했다.
‘...어라.’
내가 택한 것은 사각지대를 따라 가느라 곳곳의 건물을 엄폐물 삼아 어쩔 수 없이 우회하는 경로였다.
이곳은 서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 그리고 그다지 남들의 시선이 향하지 않는 곳.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예쁘다.’
마치 고개를 숙인 채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들. 어딜 둘러보나 반짝거리며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별들.
그 풍경이 하늘이 아닌 바닥 위로 펼쳐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조금 끼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구름 사이로 스치듯 떠 있는 보름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니. 얼마나 내가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걸까.
감수성이 메말라 버린 내 마음을 그제서야 깨달으며, 나는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보름꽃.
왕성에는 여러 아름다운 꽃밭이 있다. 하지만 특별히 이곳에 심겨진 꽃이 보름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건 보름달이 뜨는 늦은 밤에 이곳에 굳이 오는 누군가만이 발견할 수 있는 사소한 비밀이었다.
거기에 보름꽃은 지금의 나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바로 플로리스의 이야기다. 보름꽃이라고 불리는 이 꽃은, 지금은 완전한 안식에 들어선 플로리스가 생전 직접 만들어 낸 꽃이기도 했다. 천 년 전에 플로리스와 다미안이 남긴 추억의 한 파편이었다.
나는 홀린 듯 보름꽃이 가득 펼쳐진 꽃밭을 향해 다가 갔다.
단순히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추억이 그 꽃 위로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을 잡아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름답지요?”
그렇게 반짝이는 보름꽃에 시선이 뺏긴 채 다가가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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