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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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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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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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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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맹세 (1)

DUMMY

#18. 맹세


“슬픈 이야기네요.”


그건 내 이야기를 잠잠히 들은 그녀의 첫 마디였다.


나는 드래곤에 대해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줄곧 담아 두고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그녀에게 모두 전했다.

후회는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가감 없이 전했다.

플로리스와 다미안의 이야기부터, 내 여동생인 올리비아가 죽은 이야기까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하는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묵묵히 들어 주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다지 공감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아직 제가 늘어놓은 말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으실 테니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는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나 위화감을 설명할 수 있어요. 제가 줄곧 아버님과 사울로 단장에게서 느껴왔던 위화감 말이에요. 그것 이상으로 더 좋은 설명이 있지 않다면 말이죠.”

“...제 말을 믿겠다는 말인가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지금 저의 여러 상황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라고 해 둘까요. 그리고 만약 그 설명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루시는 잠깐 주저한 후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이 이야기를 저에게 숨기셨던 이유도 알 것 같아요. 저라면 그 진실을 알면서 모르는 채 연기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제 천성을 아버님께서는 아셨겠죠. 고마워요, 루비.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이 겪은 그 일들에 대해서요. 제 말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거기에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루시, 부탁할 게 있어요. 이 전쟁을 멈춰주세요. 당신이 만약 제가 말한 그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언제든지 몇 번이고 검증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곧 있을 엘 메이아를 향한 공격을 멈춰줘요.”

“...어째서 엘 메이아를? 드래곤인 당신은 그다지 엘 메이아와는 연이 없지 않나요?”

“지금 엘 메이아를 공격하는 대의명분이 드래곤의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젠탈리온이 그 명분을 써서 엘 메이아를 무너뜨리게 되면, 진실을 밝힐 기회는 이번 세대에는 없을지도 몰라요. 젠탈리온의 그 누구도 자신이 잘못된 명분을 가지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젠탈리온이 지금 주변국과 함께 엘 메이아에게 마지막 공격을 하려는 명분은 엘 메이아가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되는 드래곤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엘 메이아가 끝장나고 나면 그 명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거꾸로 젠탈리온 내부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미안해요. 루비.”

“루시··· 제발 잘 생각해 봐요. 드래곤과 젠탈리온 사이에 천 년에 걸친 악연을 끊을 기회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요.”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제 말은··· 저로서는 그 공격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 앞의 루시는 젠탈리온의 국왕이다. 비록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명실상부 젠탈리온의 유일한 권력자다.

그런 루시가 젠탈리온의 군사적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니?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는 사실 이 전쟁에 관여를 하지 않은 지 꽤 되었어요. 군사적인 움직임은 사울로 단장이 전적으로 결정하고 있거든요.”

“...사울로가?”

“어리석고 무능한 국왕이라고 질책해도 좋아요. 변명하지 않겠어요.”

“그러지는 않아요.”

“그것도 아마 드래곤에 대한 진실을 제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사울로 단장은 줄곧 아주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거든요. 예언에 대한 분노나 두려움은 전혀 없이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그저 전략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저라면 그러지 못했겠죠. 그 진실을 아는 자만이 젠탈리온이라는 한 나라의 진정한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당연히 전쟁과 관련된 모든 최종 결정은 루시 여왕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여전히 그녀는 젠탈리온의 국왕으로서 최종 결정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녀가 판단하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사울로가 가져온 계획에 도장을 찍는 정도의 역할 만을 했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전쟁에 대한 판도를 바꾸기는 어렵다. 그녀는 젠탈리온을 군사적으로 통솔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단장님께만 잘 보이면 되는 게 아니겠어?’


나는 별관 앞을 지나가던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제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루시에게 말해야 할지, 내 말을 루시가 납득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젠탈리온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다들 속았던 거잖아요? 그들을 속인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고칠 수만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내가 왕성에 있을 때 이곳에서 함께 이야기했던, 지금은 여왕이 된 당신이 그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당신도 전혀 몰랐다는 거죠.”

“루비···”

“저는 드래곤 나이트가 제 엄마를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리고 여동생을 죽였을 때에도, 끝까지 조금의 연민이 있었어요. 그들도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거짓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죽음과 죽음이 꼬리를 무는 악순환 위에 서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사울로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모든 것을 알고··· 그런 짓을 했던 거였어요.”


하아.

깊은 한숨을 따라 새까만 하늘 위로 하얀 입김이 올라갔다.


“정말로 저는 모두에게 나쁜 감정이 없어요. 하지만, 사울로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어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그를 찢어발기고야 말 거예요. 케라링그리드의 피 위에 맹세하겠어요.”


언제부터였을까, 손톱이 손바닥 위를 강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아팠지만,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사울로를 죽인다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거짓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사울로는 젠탈리온을 상징하는 두 기사단을 동시에 이끄는 위대한 기사다. 젠탈리온이라는 하나의 왕국의 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나는 젠탈리온의 국왕 앞에서 그런 사울로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꽤나 이상한 광경이라고는 생각했다.


루시는 내 말에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는 듯,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제가 어떻게 말하든 당신이 사울로를 죽이겠다는 그 계획에 변함은 없겠죠?”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저에게 솔직하게 말했으니 저도 조금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그때처럼, 저희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꽃밭 앞에서 이야기했을 때처럼요.”

“...부디 말해줘요.”

“저를 겁쟁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은 저를 겁쟁이에, 비겁자라고 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는 두려워요. 이대로 간다면 우리 왕국은 다른 동맹국들과 함께 엘 메이아를 점령할 거예요. 그리고 번성하겠죠. 더 넓어진 영토와, 거기서 나오는 더 강한 힘으로요. 평화로운 시대가 될 거예요. 그건 이 왕국을 다스리는 국왕인 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일이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침묵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잠잠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은 채로 말이죠. 진실은 모조리 사울로 단장에게 의탁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며 말이에요.”

“...당신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이제는 모르지 않잖아요.”

“맞아요. 루비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그것이 국왕으로서 평생 짊어져야 할 고뇌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기꺼이 그 짐을 짊어질 수 있어요.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요.”


루시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젠탈리온은 유래없는 번영을 맞이할 거다. 오랜 적국이었던 엘 메이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드래곤의 위협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으로 그 영토까지 온전히 점령하게 된다면, 그녀가 다스리는 젠탈리온은 평화와 성장의 길을 걷게 될 거다.

괜히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불편할 뿐이다. 굳이 그런 위험성을 짊어질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루시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당신의 오빠가 죽었을 때, 다들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세요?”

“...오멜이 말해주었나요?”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름다운 은발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모두가 드래곤의 저주라고 했었죠. 아버님까지도요. 그게 제가 드래곤에 대해 가진 가장 첫 번째 기억이었어요.”

“부정적인 기억 말이죠?”

“맞아요. 부정적인 기억이죠. 분노, 또는 원망··· 그런 것에 가까운 감정이었어요.”


그녀와 이 보름꽃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보름꽃을 보며 분노를 되새긴다고 했다.

그리고 드래곤 때문에 젠탈리온 사람들이 평생 고통받고 두려워한다고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젠탈리온인들에게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악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상, 저 왕성 남문에 예언석이 박혀 있는 이상, 모두는 평생을 고통받아요. 그 분노, 두려움, 그리고 원망··· 그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루시만 그 진실을 모르는 척, 고뇌를 품고 살아가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 거짓말은 천 년 전부터, 첫 발자국을 내딛을 때부터 망가져 있었다.


다미안은 최초의 초월자가 되었다.

그리고 젠탈리온 왕실의 부름을 따랐다가 죽음을 당했다.


플로리스는 자신이 사랑하던 인간의 죽음을 되갚으려 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렇게 플로리스의 영혼은 조각나서 천 년의 시간을 떠돌게 되었다.


탐구자들은 무엇보다 젠탈리온의 발전을 위해 애써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박해받고 조국으로부터 버려진 채 누군가는 잊혀진 이들이 되어 땅 아래로, 누군가는 에본윙이 되어 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젠탈리온 백성들은 왕실의 거짓말을 믿었다. 그건 나이트메어의 예언석이라 불리우는 공포스러운 예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평생동안 드래곤의 예언에 사로잡힌 채, 생각 깊은 곳에 깔려 있는 드래곤에 대한 공포에 묶여서 살아가게 되었다.


루시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오빠의 죽음이 드래곤의 저주라는 거짓말에서부터 드래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인생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거짓된 분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멜은 충성스러운 왕실 기사단과 드래곤 나이트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거짓은 오멜에게 지워지지 않는 죄를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가슴에 새기도록 만들었다.

내가 오멜에게 백 번을 괜찮다고 말하더라도 그는 그 죄를 결코 지우지 못할 것이다. 평생 동안 그 죄의 흉터를 보며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짓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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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맹세 (1) 25.01.23 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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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17. 보름꽃 (4) 25.01.06 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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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14. 조우 (1) 24.11.04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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