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에서 만난 인연(1)

여수지역 사람들은 랩시티 정찰대가 그들을 떠나는 동안 특별히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난처해하는 표정은 멀리서도 보였다.
그들이 우유부단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뀐 세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다.
분명히 주변에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세상은 망가졌다.
모든 게 멈추었고 이제 이전의 규칙들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지 그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정말 군대를 끌고 올까? 하는 의심은 그들이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랩시티 정찰대는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전주시 방향으로 북상했다.
레인저들에게 전할 내용이 있어서였다.
랩장은 여수지역 공동체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 맛을 들이면 포기하기 힘든 게 권력이라는 힘이었다.
이미 계급사회의 기틀을 만들어 가고 있는 여수지역 공동체는 아마도 힘을 가지게 되면 주변 지역을 넘볼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래서 좀 더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랩시티 정찰대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무선통신으로 레이저들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치이익~! 여기는 랩시티 정찰대. 레인저 응답바랍니다.”
그렇게 일정 거리를 이동할 때마다 통신을 시도하던 중 드디어 응답이 들려왔다.
“치익! 레인저 알파대입니다. 랩시티 정찰대 들리십니까?”
“치익~! 잘 들립니다. 저희가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고 북상중입니다. 중간에 만나시죠. 긴히 전할 얘기가 있습니다.”
“치이익! 카피댓!”
통신이 연결된 후 편한 마음으로 북상하던 랩시티 정찰대는 드디어 레인저 알파대를 만날 수 있었다.
알파대는 첫 번째 레인저대로 노넴이 리더였다.
헤어 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노넴 옆에는 다른 동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바이크를 타고 멀리서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한동안 못 보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다시 만났네요. 하하.”
“그렇게 됐어요. 급하게 전할 얘기가 있어서요. 그나저나 일행이 늘었네요.”
“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인데 그냥 둘 수가 있어야죠. 제가 설득해서 같이 하기로 했어요. 하하.”
급한 마음에 다시 만난 레인저 노넴에게 우선 새로운 레인저 지대 영역부터 알려주었다.
“영산강 라인까지를 레인저 지대로 관리해 주세요.”
“우리 영역이 많이 커 졌네요. 특별히 이유라도 있나요?”
“여수 쪽에 있는 세력이 찜찜해서요. 그들이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영산강을 한계선으로 설정하겠다는 거군요.”
이후에도 노넴과 지역 간 구도와 레인저 지대의 역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노넴은 무엇보다 레인저 지대가 어쩌면 자유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지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에 말이죠. 다른 세력이 저희 레인저 지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죠?”
“하하. 저희는 인정했잖아요. 저희는 레인저 지대와 함께할 겁니다.”
“든든하군요. 다시 봄이 되면 저희도 주변 땅에 농사도 좀 짓고 가축도 키우고 싶은데, 그런 도움도 받을 수 있을까요?”
“하하. 당연하죠. 지금 모습이, 뭔가 처음 노넴씨를 봤을 때하고는 많이 바뀌셨네요.”
“그때는 인류가 곧 멸망할줄 알았거든요. 아닌 걸 알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노넴은 아포칼립스를 겪는 동안 자신의 가족들과 지인들 모두를 잃었었다.
그 충격으로 자신도 생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 목숨조차 못 끊어내는 못난 모습에 실망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그에게 랩시티 정찰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넴은 다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호출명을 딴 공동체를 만들었다.
레인저 알파대! 그리고 알파대를 계기로 다른 레인저들도 각자의 호출명을 딴 공동체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찰대는 레인저 알파대와 헤어진 후 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함양군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진주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예정이었다.
여수지역을 떠나 온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남부연합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연합은 해안지역을 위주로 세력을 형성중이라 상대적으로 북쪽인 광주대구고속도로 인근은 남부연합의 통제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도로도 관리되지 않아 군데군데 방치된 차량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해안지역에 관리되는 도로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랩시티 정찰대는 도로 위를 달리다 방치된 차량이 길을 막고 있으면 앞쪽 범퍼를 보강한 SUV를 이용해 그 차를 밀어내고 길어 열었다.
이동 속도는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로 느렸다.
느린 이동속도 때문에 결국 남원시 외곽에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휴식을 취할 장소부터 찾아야 했다.
가급적 임시 캠프는 방어와 감시에 용이한 장소가 우선 순위였다.
만약에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하면 사방이 트인 장소를 골라 차박을 해야 했다.
다행이 오래지 않아 팬션으로 쓰였을 법한 적당한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여장을 푼 뒤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마나가 도래하고 아포칼립스를 맞이한 뒤, 이후의 지난 일 년은 경이로운 자연의 능력을 견식하게 된 한해였다.
지난 해 겨울과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을 때 생명체들은 경쟁하듯 세상을 채워 나갔다.
아직 동물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식물들은 세상에 넘쳐났다.
그리고 물속의 어류들이 눈에 띄는 성장을 보였다.
마나로 인해 난생 생물의 번식이 유리한 것이 한 몫 했지만, 그것보다 물이 마나농도의 변화 속도를 완충해 주었던 게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쪽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불을 피우고 자리를 셋팅하는 동안, 다른 몇 명은 주변에 물길을 찾아 갔다.
물길이 있다면 사냥할 수 있는 물고기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랩장과 소희, 호준은 바로 옆에 있던 물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소희야 저쪽 막아줘. 호준이는 이쪽으로 몰아오고.”
“형님! 갑니다~”
호준이 몰고 온 물고기들이 그물로 돌진하고 있었다.
마나는 물고기들도 더 크게 성장시켰다.
이렇게 작은 물길에 저렇게 큰 물고기가 어떻게 살아갈까 싶을 정도로 큰 녀석들이었다.
“고기 잡는 맛이 나네. 하하.”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다슬기나 좀 주워서 그만 돌아갈까?”
“좋아~”
물고기는 충분히 잡았기에 이번엔 다슬기를 주웠다.
다슬기 중에 큰 것들은 작은 소라만한 크기였다.
정찰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가끔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짧은 사냥 후 임시 캠프로 돌아 온 사람들은 이내 불 곁에 모여들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마나훈련으로 단련된 몸은 예전만큼 추위에 움츠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닥불은 사람의 영혼을 당기는 힘이 있었다.
불가에 모여 잡아온 물고기와 다슬기를 요리하며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풍경 속으로 퍼져 나갔다.
아침이 되었다.
임시 캠프를 설치한 김에 주변을 좀 더 정찰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캠프를 지키기 위한 한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정찰을 떠났다.
랩장이 속한 그룹은 5조와 순찰견-된장 그리고 송규희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남쪽으로 정찰 방향을 잡았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 후,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순찰견-된장의 감각에 인간과 고블린의 흔적이 동시에 감지됐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블린은 눈대중으로 봐도 그 수가 200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에 비해 인간은 30명 정도였고 심지어 꽤 어려 보이는 전투원도 있었다.
이지역이 여수지역 공동체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라는 것이 생각나 잠시 망설여졌지만, 공격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도와줍시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들의 무장을 빠르게 점검하기 시작했다.
등에 멘 방패를 한 쪽 팔에 걸치고 장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송규희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랩시티 정찰대로부터 선물 받은 시티연합 표준 무장을 자연스레 다루었다.
그녀까지 가세하여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인간 병력이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주희는 어쩌면 오늘이 끝이라는 생각에 두고 온 동생이 떠올렸다.
아직 어린 남동생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심경이 복잡해 졌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한주희조차도 이제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속한 공동체는 인원이 적어 어린 그녀조차도 귀중한 인력일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을 향해 내지르는 조잡한 창은 고블린의 방패에 막히며 이내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고블린의 칼날이 그녀가 만들어 준 빈틈을 향해 날아들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 주호를 내가 지켜야 하는데.’
다가오는 칼날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이게 생의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혼자 남겨질 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자포자기 했을 때, 마지막이 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아니 모든 게 끝나고 자신은 이미 영혼이 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맹아, 괜찮아?”
“?”
소녀는 눈앞에 서 있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구한 게 분명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와 같은 복장을 한 4명의 사람들이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사신과도 같았다.
지나가는 길마다 고블린들이 쓰러졌고, 고블린들은 수가 훨씬 많았음에도 이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고블린들도 그들은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모두들 괜찮아요?”
“....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다치신 분들부터 응급조치 하시죠.”
이들은 남원지역의 생존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였다.
위기에서 벗어난 이 사람들은 자기 동료들을 챙기면서 고블린 사체들을 모아 줄을 세웠다.
이들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랩시티 정찰대는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고블린 사체들을 모두 모은 뒤 이들은 이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취미라고 생각하기에는 괴상해 보였다.
랩시티 정찰대로 마나결정을 수집하기 위해 남원지역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블린 사체들을 마나화 시켰다.
이번에는 저들이 정찰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장 정리가 끝나자 이들에게 이 지역 고블린 분포에 대해 물었고, 이미 신세를 진터라 그들은 정성껏 알려주려 했다.
충분한 정보를 얻은 뒤 캠프로 복귀하기 위해 이들과 헤어지려 할 때 그들이 곤란한 듯 말을 걸어왔다.
“저, 저희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 위치를 알려주실 수 있으시면 저희 일행들과 함께 들르죠.”
이 시대에 자신의 위치를 함부로 노출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랩시티 정찰대에 대해 크게 괘의치 않는 듯했다.
위치를 받아든 정찰대는 다음날 점심 때 찾아가기로 하고 캠프로 복귀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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