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에서 만난 인연(2)

랩시티 정찰대는 남원지역의 정찰을 마치고 함양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 곳을 들르기로 했다.
그곳은 지난번 남쪽 방면 순찰에서 만난 이 지역 공동체였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외작5조장인 박수연이 한번 들르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그녀가 구했던 아이가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그들이 알려준 장소는 예전부터 있었던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특별히 생존을 위해 뭔가 개조된 시설도 없었다.
덕분에 차량들은 마을 입구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 싶어 마을 밖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잠시 후 몇몇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경계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이내 랩시티 정찰대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박수연이 한번 보고 싶어 했던 한주희도 있었다.
마을의 대표라는 남자와 얘기를 나누며 마을의 규모가 80명 정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전에 고블린과 싸우던 사람들은 이 공동체의 거의 반에 가까운 수였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곳에서 전멸했었다면, 아마 이 공동체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제야 이들이 왜 그리 고마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고 소박해 보였다.
그리고 마을 주변 농지와 텃밭이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냥 보다는 농사가 주력인 것 같았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대접 받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보이는 작물과 물에서 잡아 온 것으로 보이는 어류를 준비하였다.
‘음식에서 이상한 냄새는 안 난다. 랩장.’
‘고마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순찰견-된장에게 부탁해 놓은 답변이 들려왔다.
아무리 은혜를 입혔다고 하지만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은 대상이라 최소한의 조심은 해야 했다.
먹는 것에 장난을 쳐 상대를 암습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만큼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반대의 의미도 있었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는다는 것은 이전 시대 때 보다 훨씬 의미가 컸다.
지금의 식량은 곧 생명이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다고 해서 음식이 배달되어 오지도 않았고, 마트나 시장에 가서 구매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채집하거나 길러내야 했다.
지난 봄여름까지만 하더라도 빈 가게들로부터 장기보존이 가능한 음식물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곳에서 음식물들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남원지역 사람들은 원래 이 마을 토박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천적 마나 적응자들 이었다.
생존에 성공한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외지인들이 하나둘 더해져 지금의 공동체가 형성되다 보니 공동체 내 유대감이 끈끈한 편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날 고블린 사체들을 정렬해서 사진은 왜 찍은 거예요?”
“그거요. 하하. 이상하게 보였겠네요. 그게 고블린을 처리하고 증거를 여수로 가져가면 많은 양은 아니지만 연료유를 주거든요.”
“아~ 그래서 숫자를 확인하기 좋게 줄을 세워 촬영했던 거군요. 그런데 이쪽 분들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보이던데, 고블린 사냥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저희가 주로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많이 서툴죠. 한데 연료유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밖에 없어서요. 곡식으로도 바꿀 수도 있긴 한데 많이 비쌉니다. 연료유는 없어도 저희가 겨울을 버틸 수 있지만 식량은 아니거든요.”
“그런 사정이 있었네요.”
얘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저 멀리서 박수연과 함께 있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박수연이 낯설지 않은지 웃으며 그녀에게 뭔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저 아이 때문에 이곳에 들렸어요.”
“네? 주희요?”
“이름이 주희인가 보네요. 아시다시피 사람이 무서운 세상이 되어 버렸잖아요. 불편하실 거 같아 그냥 다음 지역으로 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저기 주희와 얘기 중인 저희 일행이 주희를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요.”
“그랬군요. 저 아이는 제 친척 조카인데, 엄마는 마나화되고, 아빠마저 얼마 전에 고블린에게 당하고 나서 혼자서 동생을 챙기고 있어요. 어린 나이지만 저런 고사리 손을 빌려야 될 상황이라 저희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세상이 이러니 어쩔 수 없죠. 너무 맘 쓰지 마세요.”
많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이동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정에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아침에 떠나기로 했다.
식사 자리가 끝난 후 타자1호에 모인 정찰대는 남원지역 사람들과 나눈 얘기들을 공유했다.
“랩장 촉대로 여수지역이 연료유로 주변 지역을 통제하고 있네요. 자발적인 연합 공동체는 아닌 거 같아요.”
“우려한 게 맞은듯해서 나도 마음이 별로야. 저들 정도의 전투력이면 살아남기 어려울 텐데. 너무 무리하는 거 같기도 하고.”
박수연이 뭔가 애기하려는 듯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먼저 물었다.
“박수연 조장이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괜찮으니 편하게 얘기해봐.”
“랩장. 그게 말이죠. 저희가 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수연 조장한테 이런 얘길 다 듣네. 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서 조장을 맡긴 걸로 들었는데 말이야.”
“.... 죄송해요.”
옆에서 하루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감성적인 면이 강한 하루가 자신의 조장에게서 자주 야단맞던 게 생각나서였다.
“아니, 아니야. 하하.”
“선한 사람들로 보이는데 우리가 여력이 된다면 당연히 도와야지. 근데 방법이 떠오르질 않네.”
소희가 방법을 먼저 방법을 제시했다.
“시티연합으로 데리고 갈까?”
“그거도 방법이긴 한데, 이 사람들이 떠나려고 할까? 이 사람들 열악해도 나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거 같은데. 가려고 할까? 일단 나중에 물어는 볼 수 있겠지.”
박수연이 주희와 나눈 대화를 얘기했다.
“아마 이곳 사람들은 여기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머물려고 할 거예요. 제 생각에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어떨까요?”
“자립? 어떻게?”
“연료유 때문에 저러는 거니 연료유를 지원 한다던가 그리고 전투훈련을 저희가 좀 도와준다던가요.”
“방향성은 나쁘지 않은데, 전투훈련은 그렇다 치고 연료유는 그냥 주면 안 될 거 같아. 이런 마을이 한두 군데도 아닐 텐데.”
얘기를 가만히 듣던 호준이 끼어들었다.
“연료유 대가로 마나결정으로 받으면 어떨까요? 죽은 고블린을 마나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그거 나쁘지 않은데.”
송규희는 왜 이들이 고블린을 사냥한 후 사체를 마나화시켜 결정을 챙기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랩시티는 마나결정이 왜 필요한 거예요? 그게 쓸모가 있나요?”
“....”
모두들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그녀가 랩시티 외부인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규희는 낯설겠네. 랩시티에서는 마나결정을 사용할 수 있거든. 우리는 마나결정을 분해해서 그 안에 마나를 추출할 수 있어. 그리고 마나결정 자체로 다른 연구도 많이 하고 있고. 결국 우리에게는 값어치가 있는 거지.”
“아. 그랬었군요. 그런데 저한테 그런 걸 얘기해 주셔도 되나요?”
“왜~? 우릴 배신이라도 하려고?”
“네? 아니 그건 아니고, 호호 무슨 말씀이세요. 무섭게.”
“하하. 농담이야. 블루시티는 곧 시티연합에 가입할 가능성도 크고, 사실 마나결정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동체는 현재 랩시티 밖에 없거든. 그래서 괜찮아.”
다음날 아침 랩장은 마을대표 한홍표에게 지난밤 논의했던 제안을 전달했다.
한홍표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했으나 정찰대의 제의에 악의가 없음을 알아채고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살아남으세요. 하하.”
함양지역으로 이동은 당분간 보류되었다.
어쩌다 보니 생겨난 인연을 챙기기 위해 랩시티 정찰대는 한동안 남원지역에 남기로 했다.
마침 농사철이 아닌 겨울이라 사람들 모두를 모아 전투훈련을 시키기에 적당했다.
외작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호준은 사람들 이곳 사람들에게 고블린 사체를 마나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쳤다.
훈련이 없을 때는 사람들을 데리고 주변 지역을 뒤지며 쓸 만한 물건들을 찾아오기도 하고, 마을을 요새화하기 위해 필요한 방어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설프지만 마을 사람들도 이제 싸움에 많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랩시티 정찰대는 아직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했지만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정찰대는 다시 여정을 나설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랩장은 한 장의 편지와 무전기를 마을대표에게 주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시 쪽으로 가시면서 이 통신장치로 레인저를 찾으세요. 그들이 나타나면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그러면 레인저들이 한번씩 이 마을을 찾을 겁니다. 그 때 마나결정으로 필요한 물건이나 연료유를 거래하시면 됩니다. 참! 그리고 레인저들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정보도 공유해 줄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가신다니 너무 서운하네요. 언젠가 다시 뵐 날이 있겠죠?”
“네. 그럴 겁니다. 어려운 세상이지만 힘내서 행복하게 살아가세요.”
배웅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랩시티 정찰대는 다시 여정을 위한 길에 올랐다.
외작5조장 박수연은 점점 멀어지는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그 소녀는 한주희였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한주희는 박수연의 제자로 정찰대에 합류했다.
그녀는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박수연과 함께하며 성장해갈 예정이었다.
한주희는 동생이 마음에 계속 걸렸지만 친척인 마을대표 한홍표를 믿고 더 강해져서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함양지역은 주로 산지가 많아 중규모 이상의 고블린 집단이 발견되지 않았다.
랩시티 정찰대는 함양에서 며칠 머무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정찰이 무의미 하다고 판단하고 진주지역으로 출발했다.
진주지역으로는 통영대전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하였다.
이 도로도 관리가 되지 않는지 곳곳에 버려진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진주지역에도 곳곳에 생존자 공동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까지도 여수지역과 같은 연합체에 속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이곳에는 이곳의 지배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거제도지역 공동체였다.
그들도 거제도에 위치한 석유비축기지를 자원삼아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영향을 행사하면서도 여수지역과는 대립하지 않고 공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랩장은 남부지역은 남부지역대로 관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문명을 재건할지는 이들의 몫이었다.
시티연합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았다.
시티연합도 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한 줌의 생존자들 일뿐이었으니 말이다.
랩시티 정찰대는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끊고 부산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산지역은 시내를 관통하지 않고 외곽을 따라 동해 영역인 기장지역으로 바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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