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의 끝자락

동해시와 강릉시의 중간쯤의 어느 산골, 마나 도래 전 보다 인구가 더욱 늘어난 마을 한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어 이들이 얘기만 나누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인근에 고블린들이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계획대로 좀 더 남쪽으로 움직여 보시죠.”
“예정대로라면 랩시티 정찰대가 머지않아 저희 구역으로 들어 올 겁니다. 그들의 경로가 동해안의 7번 국도가 될 거니. 7번 국도 위주로 정리를 하는 게 좋겠어요.”
이들은 아포칼립스 전에 설치한 무선통신 장비를 이용해 랩시티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실제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무선통신으로 제공받은 정보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마을과 랩시티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바로 박차장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중심으로 마나초 씨앗을 주변에 공유하며 사람들을 모으는데 기여하고, 랩시티의 마나 관련 정보들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공유해 주었다.
공동체의 운영과 관리는 박차장의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유능한 인물들이 나서고 있었지만, 랩시티와의 연결에는 아무런 영향 없이 굳건했다.
이 공동체는 랩장의 어머니 마을과 근처 마을들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동해시와 강릉시의 생존자들이 합류하여 만들어졌다.
특히 동해지역 생존자들 중에는 해군 출신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더욱 쉽게 군장비와 물자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별도의 명칭 없이 지냈지만 아포칼립스로 각 지역이 고립되고 랩시티와 통신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존자들은 이 공동체의 이름을 ‘마나시티’라고 스스로 정했다.
다소 광의적인 명칭이었지만 랩시티와 이곳 공동체가 여기에서 발견된 마나초 한 포기에서 시작된 것을 알고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마나시티라고 이름을 지었다.
마나시티는 여러 출신의 생존자들의 합의에 따라 운영하고 있었다.
간혹 분란은 있었지만 마나시티의 관리자들은 서로 간의 협의라는 수단을 놓치지 않았다.
거주지는 마을 하나가 아니었다.
이곳은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모이는 장소일 뿐이었다.
생존자들이 합류하면서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건물을 새로 짓기도 하였지만, 최근에 치안이 안정되면서 일부는 인근의 다른 마을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마나시티는 랩시티의 조언에 따라 가능한 모든 곳에 작물을 키웠다.
원래 농업이 위주였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작업이었다.
그들은 마나의 영향으로 이전 보다 더 많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풍년 보다 더한 풍년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인근 바다로 가 수산물들을 사냥하고 채집했다.
최초의 마을에서 바다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육지에서의 풍년만큼 바다 또한 많은 것을 주었기에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겨울을 맞이한 마나시티의 창고에는 곡식들과 장기보존 처리된 해산물이 가득했다.
겨울을 맞이한 마나시티 사람들은 주변 지역의 고블린을 사냥하고 도로를 정비했다.
동해지역에 있던 석유비축기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료유는 충분했다.
이들은 여러모로 봤을 때 다른 공동체들과 비교해서도 약하지 않은 공동체였다.
“랩장. 도로가 정리 되어 있어?”
“거의 다 온 거 같네.”
소희의 물음에 짧게 대답하고 차량을 세웠다.
사람들에게 목적지에 대해 얘기할 시점이 되어서였다.
사실 랩시티 소속일지라도 마나시티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
두 시티 간의 거리도 멀었지만 더 큰 이유는 마나시티가 성장하는데 랩시티가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시티는 제대로 성장해 버렸다.
랩시티에서는 모를지라도 마나시티는 랩시티에서 생존에 필요한 많은 정보들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이들은 랩시티의 우호 세력이었다.
드디어 랩시티의 숨겨진 칼 한 자루가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그런 세력이 있었다고요?”
외작5조장 박수연이 당혹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맞아. 사실 이곳은 어릴 때 내가 자란 곳이야.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지만 나의 어머니를 포함한 혈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맙소사. 그런 걸 지금껏 숨기고 있으셨던 거예요!”
“진정해. 수연아. 숨긴 게 아니고 말할 이유가 없었지. 사실 이곳이 살아남을지도 몰랐고.”
“하지만 말씀을 들어보면 살아남은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아니에요?”
“자세한 건 나도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어찌됐든 랩시티에는 우호 세력이잖아. 하하.”
수연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랩장을 흘겨보았다.
그리곤 랩장의 등짝을 후려쳤다.
“호준 오빠도 알고 있었지?”
“나? 나는 왜? 알고는 있었지만. 악! 나는 왜?”
수연은 호준의 등짝이 아닌 정강이를 발로 찼다.
호준은 한 발로 제자리를 뛰며 고통을 호소했다.
잠시간의 작은 소동을 뒤로 하고 랩시티 정찰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낯선 차량들이 도로를 막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무장 병력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희가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저분들이 아까 말한 그 분들이 맞지?”
“확인해 봐야 알겠는데?”
“....?”
소희의 표정이 울 듯이 변하는 순간 외작팀원들이 먼저 대응하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외작팀원들은 전투방패로 상체를 가린 채 장검을 눈높이로 들어 적을 겨냥하였다.
시티연합 고유의 표준 대응 자세로 방어와 돌격 모두를 고려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차량에서 K-6 중대화기를 꺼내 타자1호 위에 거치하고 60mm 박격포를 타자1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했다.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뒤 도로를 막고 있던 측에서 먼저 백기를 흔들며 소리쳤다.
“얘기 좀 합시다.”
“길 막고 얘기 하자니 불안해서 얘기하겠어요.”
“미안합니다. 저희가 마중해야 될 사람들이 있어서요. 언제 올지 모르니 일단 막았어요.”
“누굴 마중한다는 겁니까?”
“혹시 랩시티에서 오셨나요?”
“....?”
수연이 랩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랩장. 쟤네들 아까 말한 그거 맞는지 확인해 보세요.”
“알았어.”
랩장은 백기를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연이 뭐라고 소리치며 방패를 들고 랩장 옆으로 붙었다.
“정말. 계속 이럴 거예요. 방패는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저쪽에서 먼저 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중에 저 양팀장한테 죽는다 말 이예요.”
박수연 외작5조장이 옆에서 계속 잔소리를 하며 방패를 들어 랩장의 상체를 막았다.
랩장은 그런 박소연이 조금은 성가셨지만 그녀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패는 그녀를 그대로 노출시킨 채 랩장만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랩장이 나서는 모습을 보고 상대편도 백기를 든 채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따로 방패를 들지 않은 채 사람만 앞으로 나섰다.
“여~ 이거 꽤 높으신 분인 거 같은데, 이렇게 무모하게 나서도 되나요? 우리가 먼저 쏘면 어떻게 하려고요. 하하.”
랩장이 뭐라 말하기 전에 박수연이 먼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랬다간 너흰 모두 내 손에 죽어.”
껄렁거리며 말하던 상대편은 박수연에 말에 뭐라 말하려 했으나 그녀의 눈빛을 보며 더 이상 장난스럽게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미안하게 됐군. 시비 걸려고 그런 건 아니고.”
계속 신경전을 벌일 수 없었기에 랩장은 저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맞아!”
“?”
“맞다고. 랩시티에서 왔다고.”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남자는 랩장의 말을 한 동안 알아듣지 못한 듯 쳐다보다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마나시티에서 마중 나온 안내자들입니다. 지금부턴 저희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
남자가 그의 일행을 향해 소리치자 길을 막고 있던 차량들이 길을 열며 일부가 먼저 앞으로 먼저 나섰다.
나머지 차량들은 랩시티 정찰대가 나서면 뒤따르며 뒤쪽을 호위할 계획이었다.
“혹시 모르니 저는 이쪽에 남아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하하.”
아무렇지 않은 듯 넉살 좋게 랩시티 정찰대 사이로 자리 잡은 남자는 정찰대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박수연은 마나네트워크로 어떻게 할 건지 물어 왔다.
“가 봅시다.”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 랩장이 차에 오르자 모두들 차에 올랐다.
그리고 앞선 낯선 차량들을 따라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움직였다.
북쪽으로 이어진 7번 국도는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어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여 동해시 북쪽 외곽까지 벗어나자 차량들은 속도를 줄여 나갔다.
“이제 곧 도착입니다.”
남자의 말과 함께 7번 국도를 이탈하여 지선을 타고 얼마가지 않아 멀리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마중 나온 사람들로 보였고 랩장의 표정이 밝아지자 랩시티 정찰대는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 안에는 랩장의 어머니가 있었다.
마나시티 사람들이 우호 세력이라고 들었지만, 랩시티 정찰대가 느낀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이건 마치 또 다른 랩시티에 온 듯 한 기분이었다.
랩시티 정찰대는 마나시티에 도착하여 여정의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였다.
중대규모 이상의 고블린 세력의 식별과 마나시티의 방문이 그 목적이었다.
이제는 무사히 랩시티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정찰대는 마나시티에 그들이 준비해 온 것들을 전달했다.
호준을 제외한 정찰대는 그 동안 누군가에게 전달할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전달할 물건이 너무 작아서 이기도 했지만 마나시티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달된 물건은 각종 연구 결과를 포함한 마나 관련 정보들이었다.
그리고 일부 샘플도 있었다.
이것들은 마나시티의 역량을 강화하는데 쓰일 예정이었다.
정찰대가 마나시티에 머무는 동안 호준은 각종 마나기술에 대한 훈련을 지원하고, 외작팀은 전투관련 훈련을 같이 참여하였다.
“어머니. 너무 오랜만이죠?”
“괜찮아. 이런 세상에 무사한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하지.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보다 어머니 혼자 여기 계시는 게 걱정이네요. 저랑 같이 랩시티로 넘어 가시는 건 어때요?”
“....음.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네. 어려워도 이렇게 서로 왕래도 가능하고, 무엇보다 난 이곳에서 평생 살아와서 그런지 떠나기가 싫구나. 미안해.”
“아니 예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어머니 삶이 이곳이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인데, 제 기준으로만 생각했네요.”
“고맙구나.”
랩장의 어머니는 예전처럼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 이웃들과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생전 해 본적 없는 싸우는 기술도 익혀야 했지만 그건 이 시대 누구나에게 필요한 일이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성급한 나무에서 새순이 나오려 할 때쯤 랩시티 정찰대는 귀환을 위한 여정에 올랐다.
그리고 귀환하는 여정에는 마나시티 병력도 일부가 같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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