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2)

“사령관님! 요새 안에서 탈출이 마무리 됐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이군. 우리도 퇴각한다.”
방어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서벌군이 방어군 쪽으로 접근하려 했지만 방어군이 불을 너무 많이 질러 놓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서벌군은 이순자가 이끄는 군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요새 앞 바다에서 방어군과 요새군이 합류했다.
이순자와 손달호가 타고 있던 선박이 해상에서 붙었고, 손달호와 몇 명이 넘어왔다.
넘어 온 손달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인 대검을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이순자는 그의 칼을 받아들고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당신들의 합류를 허락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신의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거제지역 대표가 묶여 있었다.
손달호는 뒤끝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령관님. 이 자를 제 손으로 처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요. 그럴 순 없죠. 더러운 피를 묻히는 건 수장의 몫입니다.”
“제 제발~ 목숨만.”
이순자는 생존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러곤 크게 소리쳤다.
“사익에 눈이 멀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생존자들이 위임한 권한으로 사형에 처한다!”
그 말을 끝으로 김순자는 빠르게 뽑아든 그녀의 장검으로 거제지역 대표의 목을 날려버렸다.
“바다에 버려 그 몸뚱어리만이라도 회개하게 하라!”
“넵! 사령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달호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격한 감정을 느꼈다.
옆에 있던 그와 친한 부하가 조용히 말했다.
“와~ 행님. 카리스마 쩝니다.”
“조용해라. 시끼야. 분위기 깨진다.”
한껏 달아올랐던 현장의 분위기가 수습되자 이순자는 모두에게 명령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통영이예요. 그 곳에서부터 생존자들을 모두 수습한 뒤 삼천포에서 최종 목적지를 정할게요.”
“넵! 사령관!”
방어군에 소속된 생존자들은 거제지역 외 각지 공동체에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목숨을 도외시하고 싸워왔지만 희생이 컸다.
처음 왔던 인원의 40%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이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하나뿐인 갓난쟁이 손녀가 삼천포에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아들부부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마나화되어 사라졌다.
다만 선천적 마나적응자인 이순자와 손녀 한명만 살아남았다.
그녀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 아이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켜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은 이번 전쟁을 통해 이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바뀌어졌다.
이번 전쟁은 그녀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단은 새벽녘에 통영지역 공동체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사천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통영지역 공동체도 항구를 낀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선박도 관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탈주하면서 손달호가 기름이 가득채워진 연료유운반선까지 한 척 가져오는 바람에 연료는 충분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아침까지 기다렸다 덩치가 큰 배들은 항만 내에 투묘하여 대기하고 그 외의 선박들은 모두 접안시켰다.
이곳에서 통영지역 공동체가 이사를 준비하는 며칠 동안 대기한 후 사천지역 공동체의 핵심지역인 삼천포항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지역들은 각 지역 출신 방어군 병사들을 중심으로 추가 병력을 충원하여 떠났다.
그들은 그들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아 삼천포로 집결할 예정이었다.
이순자는 서벌군의 잔여 병력의 수를 대략 4천 정도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제도를 통하는 모든 육상경로를 차단해 놓았기 때문에 인근에 한 척의 탐지선만 배치해 놓아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상황을 정리하고 가능한 많은 생존자를 규합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서벌군 사령관은 거제지역을 정복했지만 물자도 인간노예도 거의 얻지 못한 이번 전쟁은 사실상 이름뿐인 승리라고 생각했다.
현장을 수습하며 확인한 생존 병력은 4천 밖에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1만1천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인간이 두려워졌다.
서벌군은 왕국에서 병력이 충원될 때까지 이 섬을 수색하며 전열을 정비하기로 했다.
씁쓸하지만 어찌되었든 승리였다.
아직 곳곳에 숨어 있는 인간들을 사냥하고 물자들을 찾아내야 했다.
그들이 최근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던 연료유는 인간들이 마지막에 땅으로 배출되도록 파이프라인들을 파괴해 버린 바람에 그리 많이 노획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름이 흘러 넘친 요새인근 땅은 고블린들이 생각해도 아무것도 기르거나 살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
왕국에서 전해오는 전황 소식에는 북벌군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벌군의 병력 충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보고서 – 대 고브린, 거제지역 방어전]
- 상륙차단전투 (사살 2,000, 전사 42)
- 평지 방어전 (사살 2,100, 전사 66)
- 터널 방어전 (사살 3,300, 전사 325)
- 상륙전 (사살 300, 전사 2)
- 대교 탈환전 (사살 600, 전사 없음)
- 요새전 (사살 2,800, 전사 없음)
※ 요새병력 제외, 중상 후 치료 중 전사자 포함
- 총 사살 수 (추정)11,100
- 총 전사 수 435
전투보고서를 받아든 이순자의 시선이 전사자 부분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녀와 같이 사천지역에서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도 전사자는 있었다.
그 중에는 친분이 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잠시 우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게다가 방어전에서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에 더욱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순자는 그녀의 공동체인 사천지역의 삼천포항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선박을 이용해 통영지역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바로 삼천포항으로 넘어왔다.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육로로 넘어 올 예정이어서 지금은 삼천포항에서 다시 전력을 가다듬으며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오른팔 그리고 왼팔이 된 김성칠과 손달호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명령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열렬한 추종자들이었다.
“진도 쪽이 어때? 남부연합 현황을 볼 때 그 지역에는 특정 세력도 없고, 연합 영역의 끝단에 있어 영향도 적게 받을 것 같은데.”
“대장, 차라리 제주도로 가서 조용히 사는 건 어때요?”
“육지의 물자 공급이 끊긴 제주도는 나중에는 옷감 구하기도 힘들어 질수 있어.”
“아! 그렇겠네요.”
성칠의 빠른 수긍에 달호가 키득거렸다.
성칠과 달호는 의외로 빨리 친해졌다.
달호의 성격이 털털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좀 의외인 부분도 있었다.
“행님. 뭐 그래 수긍이 빠릅니까.”
“달호야. 대장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
“킥킥.”
“대장님, 저는 진도 찬성입니다.”
“그래요? 이유는요?”
“일단은 대장님 말씀대로 남부연합 정확히는 여수지역의 영향권 밖입니다. 여수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남해고속도로를 끼고 있죠. 그라고 주변에 농사지을 땅, 해산물을 채집할 바다. 그곳은 조금만 노력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는 곳이죠. 게다가....”
“게다가요?”
“조금만 올라가면 다른 세력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영산강을 경계로 하는 레인저 지대가 있고, 더 위쪽에는 랩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시티연합이 있죠.”
“와~! 달호야.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그냥 주워들었죠. 하하. 한 번씩 여수에서 사람들이 왔거든요.”
“레인저 지대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네. 대장님. 저도 잘은 모르는데, 영산강 위로부터 금강까지, 동쪽으로는 소백산맥까지를 경계로 한다고 들었어요. 그 쪽에서 거기가 자기들 영역이라고 말하고 갔었거든요. 그라고..”
“?”
“시티연합과 반쯤 동맹 관계라고도 하고요.”
“시티연합, 랩시티는요?”
“세종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인데, 상당히 강하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영토 확장이나 그런 욕심은 없고, 왠만하면 각 지역을 인정한다고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그 세력이 북쪽을 거의 막아내고 있다 네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과 교류를 시도해 봐야겠네요.”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남원지역에 대추마을 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랩시티랑 교류가 있는 거 같아요. 정확히는 지원을 받고 있는 거죠.”
“남부연합에 그런 곳이 있었어요?”
“진도처럼 여수지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곳인데, 거기서 물물교환이 꽤 크게 이뤄지고 있다더라고요. 것 때매 여수지역에서는 벼루고 있고요. 심지어는 사람들한테 생존기술도 가르쳐 주고 연료유도 여수지역에 비하면 엄청 싸게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인류애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네요. 느낌이 좋아요. 진도에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다른 세력과 교류하여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는 방향이 좋겠어요. 여수지역은 거제지역처럼 우리를 이용하기만 하고 버릴 것 같아요.”
“대장님, 적극 찬성입니다. 하하.”
이순자는 여러 세력이 모인 만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명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외부 세력과의 교류를 남부연합의 이름으로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정한 이름 ‘해븐(heaven)’이였다.
거창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 보자는 사람들의 희망이 담겨져 있었다.
통영지역에서 헤어졌던 사람들이 그들의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데리고 하나둘 삼천포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개인 생존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지옥견이라는 존재가 개인 쉘터의 생존자들까지 모조리 찾아낸다는 대목에서는 모두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헤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이순자는 이들 모두를 데리고 바닷길을 통해 진도로 향했다.
몇 배나 많아진 선박이 선단을 이루며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대장. 드디어 떠나네요.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응. 당연하지. 언젠가 저 고블린들을 모두 몰아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해븐는 거제지역의 패망 소식을 굳이 여수지역에 전하지 않았다.
여수지역은 서진하는 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간 지역의 공동체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려 할 게 뻔했다.
그런 취지에서 해븐의 새로운 정착을 방해할 여지도 있었기에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해븐 세력이 새로운 정착지로 향해 갈 때, 여수지역은 정찰선을 파견하여 거제지역의 패망을 직접 확인하였다.
이제 남부연합의 유일한 맹주가 된 것이었다.
전투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고블린들이 거제도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거제지역을 비롯한 주변 일대의 세력들이 충분히 역할을 해준 것으로 보였다.
여수지역으로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진도로 이동한 해븐 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수지역에 감지되었지만, 여수지역에선 피난민 정도로 생각하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도 지역은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지역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븐은 진도에 무사히 안착하며 세력을 진도섬과 해남지역 서편 일대까지 넓혀 나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착이 완료되었을 때 해븐 세력은 영산강 넘어 레인저 지대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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