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2)

“케엑! 그래서? 너흰 도대체 정체가 뭐냐? 고블린이냐? 아니면 인간의 노예냐?”
“라의 칸이시여. 저흰 엄연한 랩시티의 사신입니다. 먼저 그 사실을 존중 받기를 원합니다.”
라 왕국의 칸차-후툰은 인간과 함께 온 고블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하여 자신들의 이상향에 반하는 저 고블린들에게 환멸감까지 느껴졌다.
이번 세상에서까지 고블린이 노예 종족으로 불려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이미 자신들이 노예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쫓아내고 싶었지만 어쨌든 저들은 북쪽의 강자들이 보내서 온 사신들이었다.
그리고 저 어리석은 고블린 옆에 선 인간들은 분위기만으로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자신들도 최근에 가장 민감해 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바로 오크의 습격에 대한 건이었다.
“.... 북쪽 인간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전쟁중단과 상호인정. 두 번째, 식인 금지 및 인간 해방입니다.”
“케엑! 우리가 왜 그런 요구를 들어줘야 되지?”
“라의 칸이시여.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서로에게? 인간들에게만 유리한 게 아닌가? 너희도 노예로 있으면서 인간은 해방하라고?”
“저희는 약탈당하지도 않고, 잡아먹히지도 않습니다. 작은 신수 부족은 랩시티의 일원이지 노예가 아닙니다.”
카사-토토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칸차-후툰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 저 인간들에게 협박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나? 그렇다면 저 인간들을 우리가 처리해 주지. 어떤가? 라 왕국으로 합류하는 것이.”
“라의 칸이시여.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만약 저희들 중 누구라도 헤치시면 라 왕국은 저희와 전면전을 치르셔야 할 겁니다. 아마도 감당하지 못하실 겁니다.”
“케엑! 뭐라? 감히 우릴 협박하는 것이냐!”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3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생각해 보시고 다시 얘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케에엑! 이런 건방진 것들이! 경비병!”
“라의 칸이시여! 저흰 이곳에 약자의 입장으로 온 게 아닙니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드렸으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을 억압하고 먹으면서 인간과 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진정 고블린만의 왕국을 꿈꾸신다면 인간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런 괘씸한 ....”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달리 칸차-후툰은 불러 놓은 경비병에게 더 이상의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그저 떠나는 사신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들의 제안이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쾅~!”
칸차-후툰은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분노에 주변에 신하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특사 일행들은 경부 전진기지로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번 특사는 작은 신수 부족의 부족장인 카사-토토를 중심으로 호위 병력이 더해져 구성되었다.
호위 병력에는 고블린 전사들도 있었지만 외작3조와 순찰견-레이저가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위험도가 너무 높아 외작조의 투입을 망설였지만, 작은 신수 부족만 보낼 수도 없었다.
자칫 작은 신수 부족과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예상대로 외작조와 순찰견의 합류는 작은 신수 부족의 신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고블린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인간은 고블린 사회에서도 호응을 받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카사-토토, 저들에게 너무 강하게 나간 건 아닐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고블린은 저희가 잘 알아요. 지금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이정도 충격이 아니면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들만의 세계라면? 그들만 존재하는 세상인가요?’
‘말씀처럼 그런 내용도 있죠. 하지만 더 나아가면 노예로 그리고 산속에서 비참한 도망자로 살았던 고대의 고블린들에 대한 기억이 그 근본에 있어요.’
외작3조장 하동식은 이번 임무에 지원하면서 고블린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고블린 얘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게 지금 상황까지 지배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네요.’
‘저도 이전에 붉은 이빨 부족에 있을 때는 저들처럼 생각했으니, 라 왕국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 예요. 다만 오랜 염원을 이루는 방법이 더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그럼 요즘 작은 신수 부족은 어떤가요?’
‘고대의 한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아요. 아마 다른 부족의 고블린들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내재된 본능을 이기기 어려울 때도 생기지 않을까요?’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신수가 옆에 있다면 위기가 있어도 잘 견뎌 낼 거예요. 작은 신수 부족의 고블린들에게는 신수가 정신적인 뿌리니까요.’
‘오늘 라 왕국의 고블린들을 보고나니 작은 신수 부족은 확실히 다르네요. 카사-토토께서 잘 중재해서 그들도 왕국을 잘 가꾸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간혹 보면 인간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어요.’
‘?’
‘미래에 적이 될지 모르는데 라 왕국이 신경 쓰이지 않나요?’
‘하하. 신경 쓰이죠. 하지만 저흰 그 미래에 더욱 강해져 있을 거니까요. 인간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라면 모르겠지만, 저흰 그렇지 않잖아요. 인간, 고블린, 세계수, 순찰견, 하이엔트 그리고 새롭게 합류할 종족들까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카사-토토는 하동식의 말에서 뭔가 느꼈는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인간과 고블린을 태운 차량들은 조용히 경부 전진기지로 달려갔다.
라 왕국 쪽 도로망은 제대로 보수되지 않아 속도를 내기 힘들었지만, 전진기지에 가까워지자 점점 길이 좋아져 행렬의 이동속도도 빨라졌다.
경부 전진기지에 도착하자 특사 일행들은 그제야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라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이곳 전진기지에서 들른 덕분에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여전히 기지 사람들은 특사 일행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이들에게 고블린은 명확한 적이었는데, 랩시티에서 보내온 고블린 사절은 아군이라고 했다.
잠시간의 부적응이 왔지만 이건 이것대로 신선했다.
사람들의 생각에선 어쩌면 고블린과 계속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기지 사람들은 고블린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얘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외작조원들이 대부분 통역을 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특사로 온 이 고블린들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대목에서 크게 한 번 놀랐다.
게다가 카사-토토는 어눌하지만 인간의 말을 몇 마디씩 말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는 외작조원들도 감짝 놀랐다.
그동안 각자의 에고를 통해 불편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카사-토토가 육성으로 말하는 모습은 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카사-토토의 말로는 엄청나게 연습했다고 했다.
언어에 대한 부분은 마나브레인의 에고에게 많이 의지했다.
에고는 대화에 사용되는 몇 백의 단어들과 문법에 대해 파악하고 나면 그때부터 그 언어를 번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본체가 원한다면 언어를 훈련시켜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는데 카사-토토가 인간의 언어를 연습해 온 것이었다.
“샴쪼장, 요게 고래 신기하님까?”
“와~ 카사-토토 대단합니다. 이렇게 육성으로 대화하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네요.”
“넥, 쩌들 몃은 신수님의 갸호를 박았지만, 딴 놈들은 아닝이니.... 까요. 딴 놈들 갈키야 됨니다.”
“하하. 멋집니다. 역시 작은 신수 부족이네요.”
이후에도 카사-토토와 사람들은 깊은 밤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인간들과 육성으로 대화하는 카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고블린 전사들은 자신들의 부족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카사에 대한 충성심이 솟구쳤다.
특사들이 경부 전진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랩시티에서는 변이를 마친 고블린 알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이 신기한 광경에 랩시티 구성원들은 모두 나와 지켜보았다.
분명히 고블린 알이었지만 밖으로 나온 존재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심지어는 언어까지도 고블린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체리가 알에서 나오는 존재들 모두에게 다가가며 일일이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이 모두들 건강해. 레이첼 이들이 입을 옷 좀 구해줘.’
밖으로 나온 존재는 두 종족이었다.
두 종족 모두 고블린처럼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피부색은 녹색이 아닌 인간의 피부색과 비슷했다.
그리고 한 종족은 고블린 보다 약간 더 통통한 편이었고, 나머지 한 종족은 온 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부화한 새로운 종족은 고블린 보다 인간의 모습에 가까웠다.
혼-냐르와 두란 또한 2차 변이를 무사히 마쳤다.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린 둘은 이전의 기억도 일부분만 전승되어 자신들이 고블린이었고,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정도만 기억했다.
이 둘은 각 종족이 지도자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변이 전 마나메모리를 이식해 두었었다.
다행이 변이 후에도 에고는 무사히 남아 있어 대화가 가능했다.
‘신수의 대리자시여. 저는 제작과 전투의 종족인 드워프(Dwarf) 종족으로, 신수의 불꽃 부족장인 냐룬 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저희 부족은 신수와 함께하는 인간 부족인 랩시티의 지도자를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는 음악과 농업의 종족인 호빗(Hobbit) 드랑 이라고 합니다. 저희 신수의 뿌리 부족도 랩시티의 지도자를 왕으로 모시며 함께하겠습니다.’
두 부족장 뒤로 각각 4백의 부족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냐룬과 드랑이 자신들의 언어로 그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 새로운 종족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리곤 세계수-마더에서 시작된 빛줄기들이 8백의 드워프와 호빗에게 스며들었다.
랩시티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체리가 설명해 주었다.
‘부족각인이야. 원래는 부족장이 해야 되는데 너무 많은 숫자라서 마더가 한 거야. 태어났을 때 저걸 해야만 자기 소속을 인지하게 되거든.’
두 부족의 부족각인까지 끝나자 그들은 필요한 물자를 챙겨 이동할 준비를 했다.
모두가 랩시티에 머물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종족에 맞는 적당한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드워프는 계룡산을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정했고, 호빗들은 계룡산과 랩시티 사이의 평지를 낀 산자락에 정착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이들이 어떤 종족인지 겪어보진 못했지만 체리의 말로는 든든한 동맹이 될 거라고 했다.
“라의 칸이시여. 결정 하셨습니까?”
“케엑! 건방진 고블린이여. 결정했다. 너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들에 대한 협의를 시작해도 되겠군요.”
카사-토토는 라 왕국의 신하들과 몇 시간에 걸쳐 협의안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인간과 고블린 사이의 최초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체결된 조약의 내용은 시티연합을 비롯하여 남부연합까지 상호이해 관계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공동체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인간과 라 왕국의 고블린 사이의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남부연합은 당사자인 자신들이 참가하지 않은 조약에 불편함을 드러냈으나 별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 왕국을 포함하여 라와 국경을 맞댄 남부연합과 이스트는 이제 온전히 오크의 침략에 대응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런 상황이었다.
[랩-라 조약]
* 국경의 확정
라 왕국과 인접한 각 공동체들은 현재의 영역을 국경으로 정한다. 각 국경은 별도로 관리되며, 만약 조약을 어기고 침략을 하더라도 침략한 공동체만 조약에서 해제된다.
* 각 종족에 대한 처우
인간과 고블린은 서로 먹지 않으며, 자국 내 인간과 고블린에 대해 자유를 보장한다.
* 조약의 유지
조약의 유지와 갱신을 위하여 5년에 한 번씩 협의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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