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3
"일어나."
"강은겸?"
"일어나라고."
"....."
이 눈동자는.. 이 눈동자 색깔은..
우리 나라에 단 두명 뿐이겠지..
각도에 따라서 회색 아니면
옅은 초록색으로 변하는 눈동자는..
그리고 그 눈동자 색을 가진 남자들 중
조금 더 일찍 태어난 놈에게 또 다시 끌려와버렸다.
내 의지와 상관 없는 이 집에...
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없는 팔자다.
왕따로 힘들어할 때 전학 보내달라는 애원을
깡그리 무시하던 엄마아빠를 보면서.. 느꼈다..
삼일 내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그렇게 힘들어 했음에도.. 외면했던 엄마, 아빠.
술 기운 탓인건지..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은겸이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숨도 못 쉴만큼 울고..
그렇게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를 세게 안아버렸다.
당황한 은겸이가 날 밀쳐내려고 하면..
이상하게 유호 품보다 따뜻하고..
더 편안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자꾸 밀어내는 은겸이를 꽉 안아 버렸다..
쾅!
큰 소리를 내며 정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강씨 집안의 막내아들.
예쁜 눈동자색을 가진 놈.
"영화를 찍어라 아주.
걸리적거리니까 둘 다 비켜."
얜 항상 이 시간에 들어 오는건가..
저번에도 늦게 들어오더니..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고 우릴 내려다보는 강은재.
일어서서 한마디 하려는 듯 움찔하는 은겸이의 귓가에..
싸움은 너 같이 부모님께 사랑만 받고 자란
왕자님이 하는 게 아닌 나 같은 천방지축에게
어울린다는 말로 은겸이를 달랬고.
내 앞에 서서 건방지게 내려다보는
이 집 막내 아들내미에게 건네진 내 첫마디는..
"넌 뭔데 맨날 이 시간에 들어오냐~~?
올빼미도 아닌게 왜 만날 이 시간이냔 말이야?"
"너 어따대고 술주정이야. 네 주제 파악해라."
화난 듯한 강은재..
올빼미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냐..
"...은재야.."
“일어나. 길 막지 말고.”
은겸이를 안고 있던 내 손목을 잡고
거칠게 일으키는 은재.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당황한 듯
잡고 있던 손목을 슬며시 놓는다.
"나 왜 그렇게 미워해..?
난 너희들이랑 친해지고 싶다.
나 사실 왕따야.. 학교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울 엄마 아빠도 나 미워한다..
난 이제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본적 없고..
초등학생 때부터 준비물 살 돈을 안줘서
동네 문방구 앞에서 쭈그려 앉아
학교 끝날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엄마 손 잡고
준비물을 사고 나오는 아이들 얼굴을
부러워 미치게 쳐다보면서..
그리고 최근에는 이 외로운 내가 가진 거..
딱 한개 그거...
....사랑..
그거마저 뺐겼다...
그것도 제일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한테....
........................
근데 너희는 왜... 너희는 다 가졌잖아...
갖고 싶어하는 거...
하고싶은 거.. 그거 다 해 줄 수 있는 부모님,
돈, 큰 집.. 다 가져 놓고...
왜 ...
도대체 왜!!!!!!! 왜 그런 슬픈 눈을 하고 있어
다들!!!!!!!!!!!!!!!!!"
...술 주정 이었을까....
아니면 술을 빌린 내 진심..?
두 손을 꽉 쥐고 부들거리며 소리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예쁜 색의 네 눈동자..
"나는 발버둥 쳐도 가질 수 없다...
특히 날 사랑해주는 부모님..
날 걱정해주는 부모님..
나 아플 때 지켜주는 부모님..
그거 절대 가질 수 없어···
왜냐면.. 너희도 알다시피 난 돈 때문에
여기로 팔려온 걸 알아버린 순간에...
깨달아 버렸거든.....
나에겐..
처음부터 부모님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래도..
날 만들고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사람들인데..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어도..
겉으로 티가 안나는 거 뿐이지 맘 속으로는
날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었는데..
억지로 믿고 부정했던 진실들이 결국은
내 앞에 다가와 버렸구나............"
"......."
"내가 그냥 불청객이었구나..
엄마, 아빠, 서주원이 살고 있는 집에서..
난.. 아무도 반기지 않는..
...............
그냥 밥그릇 하나 더 살 구실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구나.."
"........."
"4일내내 집에 안 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남동생 빼고 그 누구도 찾지 않은 건
너무하지 않냐... 하하..."
".............."
"그래도 다행이지 뭐!!!
나 하나로 부모님이 행복해진다면..
나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들이어도..
가족이잖아..
나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니까..
나 이용해서 앞으로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
빌빌 길 일도, 도망 다닐 일도,
협박 당할 일도 없으니까..
그걸로 된거라고 생각한다!!!"
10분간 말이 없는 이 남자들..
공기를 얼어붙게 만드는 긴 침묵이 싫어서
괜히 밝은 척 큰 소리로 쉴 틈 없이 말하면..
"아.. 자존심 상하..
끝까지 지키고 싶던 비밀을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에이씨 오늘 잠 다 잤네."
............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네가 봤어?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아는 척 이야."
.....의외였지만
화난 듯한 표정과 자세로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겸이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말.
"나 말 실수 했냐.. 그런 거면 미안.."
나를 등지고 서서 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 아이를 잡는 내 용기 있는 말.
"근데 있잖아."
그렇게 또 네 눈동자가 나를 향하면..
닮은 듯 안 닮은 저 눈동자..
분명히 저 눈 어디서 봤어..
"그럼 우리 셋이서 친구할래......?
우리 셋 다 외롭잖아... 헤헤.
한명은 외로운데 두명은 안 외로워..
근데 세 명이면......"
"즐거워서 뒤로 나자빠지겠네."
다른 사람들과 한 눈에도 구별되어지는..
은겸이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회색과 초록색이 섞인 오묘한 눈동자 색으로
날 노려보며 말하는 강은재.
"응...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해볼래...?
친구말이야. 둘도 없는 친구.
부모님들이 자식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 더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친구.."
......
..또 다시 나를 빤히 보는 비슷한 색의 눈을 가진
두 잘난 남정네들.
이거 잘생긴 놈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네.
그 때,
"큰 오빠 짝은 오빠 거기서 뭐해?'
눈을 비비며 계단에서 나타난 이 집 막내 딸 주아..
"..."
"아빠 무지 화났어."
그래... 그러셨겠지..
근데...
내가 늦게 들어온 사실에 화나신 게 아니라...
어제 취한채로 끌려온 일 때문에 분노하신 거라면..
난 잽싸게 튀었겠지...
/궁 거실
"잘 듣거라."
처음에 날 다정하게 맞이해주셨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그렇게 날 다시 한 번 움츠러들게 만드는.....
이 집 대왕..
근데.. 취했던 건 어떻게 안 거야..
역시 김 기사님인가..
"여긴 궁이다.
네가 살던 그 일반적인 생활들은
버릴 생각을 해야해."
..일반적인 생활들..
"그게 뭔데요 아저씨가 말하는 그.."
내 말을 자르고,
"네가 온 뒤로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구나..
이래서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다.."
"아저씨 저는요.."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왕이다.
한 나라를 대통령 위에서 다스리는 왕.
알아듣겠니."
"....."
"처신 똑바로 하길 바란다.
그리고 은겸이한테는 은겸이라고 해도 좋지만
다른 가족들한테는 지금처럼 하는 태도
용서할 수 없다.
알겠느냐."
"....."
갑자기 밀려드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내 무릎 위로 떨어진 건
다행히도 못 보셨는지..
...................
"혹시나 널 알아본 사람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면..
내가 어떻게든 막겠지만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
"혼자 생활할 수 있는 궁으로 멀리 보낼 테니
그리 알거라."
"..."
"곧 있으면 결혼식인데...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해라.
상견례 날짜도 나왔고..
부모님께는 말씀드려서 날짜는 조율했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서러운 맘에 흘러나온 속마음..
"...결혼만 하면 끝난단다.
네가 입을 한복, 예물 모든 건 우리가 다 준비 할테니.
세자빈은 쓸 데 없는데 신경쓰지 말고
이미지 관리에만 신경 써라."
쓸 데 없는 거.....
.. 내 결혼식인데..
왜 모든 걸 이 아저씨가 정하는거야..?
그리고..
내 꿈은 평범한 회사원이랑 결혼해서
된장찌개 끓여 놓고 남편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고..
남편 옷들 내 손으로 직접 빨고...
쌍둥이도 낳고 남편 뒷바라지 하며
행복한 현모양처가 되는게 꿈이었는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지.
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런 일들에
책임을 져야하는 건지..
억울한 마음에..
한마디만 더 들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주아보다 더 어린 표정으로 엉엉 울 것 같아서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인사도 드리지 않은 채
2층으로 올라와버렸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2층 복도에서 날 기다린
은겸이..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은재..
나에게 다가서는 은겸이.
은겸이에게서 그리 자주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
그럴때마다 보이는 아저씨와 많이 닮은 얼굴..
"아빠가 원래 화나면 좀 차가워. 신경쓰지마."
"그래 고마워."
그렇게.. 눈물 한 방울 떨어 트리지 않으려고,
아니, 들키지 않으려고 방으로 급히 들어가버렸다.
/방
뒤 쫓아온 은겸이.
우는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당겨
뒤에서 끌어 안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은겸이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버렸다.
품이 너무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데..
이대로 잠들어도 좋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포근하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내가 유호한테 처음 안겼을 때 그 느낌과
아주 흡사한 건..
그건 아마..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흥분해버린
미친듯이 요동치는 심장 때문일거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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