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묵랑(墨狼, 검은 늑대)

“..........”
설은 조금 정신이 없었다.
분명 손목에서 뜨끈한 것들이 흘러 나가는 것을 보았다.
죄 많은 몸뚱이에서 생명의 기운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무와 그 가지 사이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이었다.
삐로롱- 삐로로로-
“..........”
평화로운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클래런스가 죽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치료한 뒤, 휴양하라고 산속에 던져 놓은 것일까.
“.........”
아니면 자신이 죽어 천국에 온 것일까.
“.........”
떠오르는 추측들이 하나같이 너무 말이 안 돼서, 설은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하고 눈을 뜬 자세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얇은 가운 차림이었으나, 따뜻한 햇살 덕에 춥지도 않아. 그렇게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손끝에 닿는 햇빛의 온기.
귓가에 들려오는 풀잎 스치는 소리.
온몸을 포근히 감싸는 부드러운 바람.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로워, 설은 처음으로 평온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
처음 느껴보는 그 소중한 감각을 깬 것은 근처에서 들려온 성난 고함소리였다.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여러 명이 흥분하여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깨져 버린 평화에 어쩔 수 없이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머리가 산발인 어린 남자아이가 험상궂게 생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순식간에 설의 표정이 구겨졌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 밖에 안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으니, 어린 아들의 엄마였던 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윽.....”
물론, 막 죽음을 겪은 몸은 쉽게 주인의 말을 듣지는 않아서.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생채기가 난 제 몸을 돌아볼 새도 없이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휘청휘청 불안한 걸음으로도, 그녀는 서둘러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악....!”
맨발로 험한 산길을 달리던 아이는 결국 돌부리에 걸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기겁한 아이는 네발로 기어서라도 도망가기 위해 애를 썼다.
“잡았다, 요 쥐새끼 같은 놈.”
“.......!!”
그래봐야 아이는 얼마 못 가 거친 손아귀에 덜미를 붙잡혀, 그대로 들어 올려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는 자신을 붙잡은 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작은 손발을 마구 휘둘러 댄 탓에 넝마와도 같던 옷이 흐트러지자, 그 아래에 있던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상처가 새겨질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아이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 아이를 놔줘!”
“......?!”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를 본 순간, 설은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도 모르게 수풀을 헤치고 뛰쳐나갔다.
“넌 또 뭐야? 너도 이 괴물 놈이랑 한패냐?”
“..........”
사내들이 설을 둘러싸며 외쳤다.
자신을 위협하듯 다가오는 그 험악한 행동보다도, 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인상을 구겼다.
물론 설도 하얗게 질린 여자가, 잠옷도 못 되는 가운 한 장 대충 걸치고 있는 모습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괴물이라니.
게다가 저 작은 아이는 또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식으로 칭하는 것인지.
설은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
그때, 사내의 손아귀에 붙들린 아이가 기어이 축 늘어졌다.
지친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설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를 구해주고 싶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만’ 했는데.
파직-
“?”
쾅-!
“!”
설의 손에서 파란 전기 같은 것이 튀어 오르더니,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
놀란 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몽땅 나가떨어진 후였다. 당황스러웠다.
“..........”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던 그녀는 그 난장판 가운데에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쉬....괜찮아.”
작은 몸이 잔뜩 날을 세우고 파드득 떨었으나, 설은 아이에게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꽉 안아주었다.
겁에 질린 작은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제게 닿아오는 온기가 좋았는지, 아이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그 연약한 행동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제품에서 가냘프게 떨고 있는 아이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허억.....허억.....”
한참을 달리던 설은 숨이 턱 끝에 차오를 때쯤,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멀리 온 것 같았다.
“하아.....아가, 괜찮......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품 안의 아이를 살피려던 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분명 상처투성이인 대여섯 살 남자아이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늑대.....?”
“.........”
“아닌가? 사이즈만 보면 개 같기도....?”
“..........”
설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제 품에 있는 까만 털의 짐승은 아주 작은 늑대거나, 조금 큰 개 같았다.
“..........”
늑대든 개든. 기절을 해 놓고도, 잘게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설은 고 작은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너무 힘들어서 이런 모습으로 변했나 보구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설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 번 죽었다 깨서 그런가. 그녀는 상식 같은 것 보다, 차라리 이 어린 짐승의 앞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더 신경 쓰였다.
지이익-
그나마도 얇았던 가운이 길게 찢겼다.
“..........뼈에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네. 다행이다.”
동물의 상처를 돌봐 본 경험은 없지만, 간단한 상처를 지혈하는 것 쯤이야. 의사였던 설에게 그리 어려울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온갖 곳을 다쳐오는 수 백의 저항군들도 돌봤던 그녀였으니,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흠.....그나저나, 분명 인간이었는데......”
“끼잉-”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설은 미약하게 우는 작은 짐승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보드라운 털을 쓸고 있으니, 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 게 애니멀 테라피인가......."
설은 저도 모르게 실없는 소리를 했다.
이상하게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이렇게 쓸어주는 것 만으로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진즉에 알았다면 반려견이라도 한 마리 들일걸 하는 잡생각이 잠깐 들었다.
콰직-
“아!”
“크릉-!”
“.........”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붙든 채, 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후다닥 도망가는 까만 꼬리를 바라보았다.
축 늘어져 있던 것이 무색하게 아주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저런 배은 망덕한.....”
설이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이래서 털 있는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하고 꿍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저리 빠르게 도망가는 걸 보니 상태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싶어, 마음은 좀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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