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 꿈에서본 그녀
2024년 3월. 공감출판사.
“야야, 회장님 도착하셨단다. 주차 중이시래”
출판사 대표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직원들에게 말했다.
“으. 떨려. 테레비에서만 보던 사람을 직접 보게 되다니. 후덜덜”
출판사 대표와 같이 긴장을 하는 막내 여작가.
“대표님. 긴장하지 마시고. 심호흡 하세요. 쑵. 파~ 쑵. 파~”
대표님을 달래주는 직원들도 다 같이 긴장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앗, 저기. 오신 거 같아요”
어느 직원이 외친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쏠렸다.
국내 최고급 5성 호텔 ‘그랜드나르스’의 실소유자이자
국내 숙박업에 살아있는 전설인 최병재 회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출판사 대표는 후다닥 최회장에게 다가가 90도로 인사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제..제가 여기.. 공감출판사 대표.
황민후 입니다”
“아이고. 대표님. 반갑습니다. 허리 아파요. 어서 일어나세요.
제가 나이를 먹어서 대표님처럼 허리를 못 숙입니다. 허허”
“아닙니다. 회장님.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누추하긴요. 사무실이 좋네요.
제가 생각한 출판사에 대한 이미지랑은 많이 다르네요.
인테리어가 아주 감각적입니다. 심플하구요. 화이트 톤에”
“인테리어는 오늘 회의에 같이 참석할
김 작가가 많이 신경 썼습니다. 김작가 인사드려”
출판사 대표 옆으로 막내 작가가 쪼르르 다가와 최회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대필을 맡게 된 김하영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회장은 막내 여작가의 풋풋함을 보고 밝은 미소를 보였다.
“작가님. 반갑습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주 미인이시네요”
“헤헷. 칭찬 감사합니다”
최회장과 막내작가의 짧은 인사가 끝나자.
“회장님.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황대표는 최회장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다과가 준비된 원형테이블에 최회장과 출판사 대표,
막내 여작가가 둥글게 앉았다.
“회장님. 오늘 회의는 저랑 김작가만 참석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금씩 마음이 편해지네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라
실은 오면서도 많이 떨렸습니다”
“저희 출판사를 선택해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말씀 주셨던 대로 보안유지는 철저히 하겠습니다”
“네. 제가 글쓰는 재주가 없어서. 허허.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외람되지만
회장님의 비밀 얘기를 책으로 내고 싶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음···”
최병재 회장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출판사 황대표는 자기가 말 실수한 게 아닌가 싶어
최회장과 김작가의 얼굴을 살폈다.
김작가가 눈으로 황대표를 혼내는 사이
최회장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오래된 저의 사랑 얘기 입니다.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던.
3년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황대표와 김작가는 숨죽인 채
최회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왜 책으로 내냐고요···?”
“예. 예.. 회장님”
“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너무 아파서요.
시간이 지나면 아물 줄 알았는데.
여전히 너무 아파서요.
이렇게라도 쏟아내면 좀 괜찮아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4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말이죠..”
“아··· 회장님. 제가 괜한 얘기를···”
“아닙니다. 어차피 말씀드려야 했던 거고.
그러려고 오늘 출판사에 온 것이고요.
자, 그럼 시작할까요?”
“네. 회장님. 준비됐습니다”
김작가가 똘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참. 책 제목은
‘정신병자 보고서’
라고 해주세요”
“정신병자 보고서···
제목이 엄청 쎄네요”
“제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녀의 이름이 정신이었어요.
김정신···”
“아”
“제 이야기의 시작은 IMF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8년도 그 해는 IMF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해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던
나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구조조정···
회사는 나에게 사직을 권고했고
대신 옥외 사인물 회사를 차리라고 했다.
그러면 회사의 물량들을 나에게 몰아준다는
전관예우 약속을 한 채.
아무런 준비도 못 했고. 당황스러웠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부할 순 없었다.
외벌이 가장이었던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회사의 조건을 받아들여 사무실을 구했다.
모든 게 급작스러웠지만 그렇게··· 운명이 다가왔다.
강북의 한 동네에 난 사무실을 구했고.
사무실 인테리어를 꾸미기 위해
외주업체와 만나기로 한 1998년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앗, 대표님. 안녕하세용.
저 김정신 입니다.
어머어머 우리 대표님 엄청 젊으시다.
우아. 멋지세요”
김정신.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 만나기로 한 인테리어 회사의 대표였다.
헉!!!
이 여자는??!!
간밤에 꿈에 나왔던 여자!
분명 그녀였다.
꿈에서 알 수 없는 여자와 미친듯한 사랑을 나눴다.
꿈이었지만 너무나도 선명했다.
꿈속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서있다.
“아··· 안··· 안녕하세요? 전 최병재라고 합니다.
엄청 미인이시네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간밤에 꿈에 나왔던 여자가 눈앞에 있다니···
꿈에서 본 그녀를 실제로 보니
그냥 천사였다.
세련된 스타일. 고급스러운 외모.
게다가 몸매까지 늘씬했다.
그야 말로 여신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근데 이제 다 늙어서 별 볼일도 없어요.
푸헷”
얼굴도 예쁜 데다가 성격까지 시원시원했다.
이거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나도 모르게 악수를 청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내가.
그것도 여자한테 먼저 악수를 청하다니···
왜 그랬을까···
손이 잡고 싶었을까?
“잘 부탁드립니다. 대푯님!”
그녀는 밝은 미소와 함께
내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내 손엔 전율이 흘렀다.
뭔가 찌릿한 게 흘러 들어왔다.
아··· 이 느낌은 뭐지···?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구마구.
“아, 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사무실 계약을 막 해서 보시는 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건설회사를 다니긴 했는데.
인테리어는 제 분야가 아니라.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힉! 건설회사 다니셨어요?
어디요 어디요?”
“저.. 에이앤건설이라고···”
“으악, 거기 대기업 이잖아요!
우와. 대표님. 엄청나신 분이셨군요!”
“짤렸어요”
“아···아···
죄송해요. 힝”
미안해하는 모습조차 귀여웠다.
“아니예요. 다행히 회사에서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를 몰아준다고 해서
사인물 회사를 차린거구요”
“오, 사인물이면.
저희 인테리어 쪽이랑 엄청 밀접한 관계인대요”
“아? 그런가요?
저 아직 잘 몰라요.
회사에서 권유해서 차리긴 한 건데
제가 마케팅 파트여서 이쪽 실무는 잘 몰라요”
“우아. 암튼. 뭔가 저희 인연이네요.
새로 시작하시는 일이 제 분야 쪽이기도 하고.
저 좀 키워주십시욧. 대푯님!”
인연···
필연이다···
이건 운명이다···
너무나도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이 성격조차 훌륭하다니...
내성적 성격인 나는
나와 반대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항상 부러웠다.
그런 나에게 적극적인 태도로 다가와주는
꿈속의 그녀가 첫 내 심장에 강하게 박혔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알려주세요”
그렇게 첫인사가 끝나고.
정신이는 전문가답게 사무실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뭔가를 분주하게 적으며 인테리어 계획을 세우는 듯했다.
그녀가 사무실 이곳 저곳을 살피는 동안
난 그녀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계속 눈이 갔다.
이놈의 심장이 계속 날뛴다.
심장아··· 그만 좀 나대거라.
제발···
“대표님~ 제가 체크할 건 다 했고요.
제가 오늘부터 바로 샘플들 구해서
빨리 연락 드릴게요. 사무실 이쁘게 꾸미겠습니당.
저만 믿으시라구용. 힛”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네. 잘 부탁드릴게요”
“대표님, 근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너무 동안이셔서 감이 안 오네요.
제가 원래 사람 나이 디게 잘 맞추거든요.
근데 잘 모르겠다··· 대표님은.. 훔···
저보다 어리신 거 같은데.
말씀하시는 거 보면 또래인 거 같기도 하고.
좀 알려주시면 안돼용?”
애교 섞인 정신이의 목소리에
난 웃으며 말했다.
“서른 아홉이에요. 곧 불혹이네요”
“어? 60년생?”
“네”
“대표님. 나도 나도 60년생.
우리 친군데요?”
“아, 정말요? 김대표님이야 말로
저 되게 어리게 보고 있었는데.
한참 동생인 줄 알았어요”
“아이쿠. 히힛, 우리 뭐가 좀 잘 맞는데요.
신기하네. 애기는 어떻게 되세요?
“딸이 하나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이요”
“헉, 전 아들. 3학년.
세상에. 소름.
뭐가 이리 똑같대.
안되겠어요. 대표님.
우리 점심 같이 해요. 제가 식사 모시겠습니닷”
안 그래도 점심을 혼자 먹어야 해서
고민 중이었는데 센스있는
정신이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우린 점심식사를 같이했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나이가 같다 보니 말이 잘 통했다.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세 시간을 넘게 수다 떨었다.
“대표님. 오늘 너무너무너무 즐거웠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죠? 힛”
“아..아니에요.
말씀을 워낙 재밌게 하셔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감사해요. 저 실은
많이 외로웠거든요.
좋은 친구를 얻은 거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앞으로 자주 뵈면 좋겠어요”
“네넷. 아까 말씀드렸지만.
제 프로젝트 들어갈 때 꼭 같이 들어가요.
김대표님이 같이 가주시면
저도 많이 든든할 거 같습니다”
“아이고, 저야.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헷.
제가 일단 대표님 사무실부터.
아주 그냥 끝장나게 만들어보겠슴돠~
첫 작품을 합격해야 앞으로 기회를 주실 테니까요”
“에이. 무슨 말씀을.
제 사무실과 상관없이 같이 해봐요.
윈윈”
“감사합니다. 대표님.
전 이제 사무실로 넘어가서
열일 해보겠습니닷!”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정신이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골목길로 들어가 이젠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난 제자리에 계속 서있었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운명적인 첫 만남이 있은 후
정신이는 사무실 인테리어를
너무 멋지게 만들어 주었고
난 보답으로 정신이에게 저녁을 사기로 했다.
자주 가던 일식집으로 정신이를 데려가고 싶었다.
금액이 만만치는 않지만 그러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좋은 곳에
가보고 싶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격 때문에 이 정도로 만석인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돌아갈 순 없다.
닷지 테이블이라도 앉기로 했고
정신이도 흔쾌히 응해줬다.
“룸으로 모셨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몰랐어요”
“아녜요. 대표님.
자리는 어디든 상관없는데···
여기 디게 비싼데 아니예요?
저 입 싸요.
이런 거 부담스러운데··· 끙”
“부담 갖지 마세요. 여기 가성비가 좋습니다.
이집 셰프님이 어디 호텔 메인이셨다고 하더라고요.
5성급 호텔이요”
“뜨헉. 더 부담된다. 힝.
전 포장마차도 좋은데요”
“어이구. 김대표님 같은 미인을
그런 허름한 곳에 모실 순 없죠.
여기 참치가 끝내줍니다.
혼마구로 코스로 먹어요”
“네.. 뭔진 모르지만.
시켜 주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제가 먹는 건 또. 어디 가서 안 빠집니다. 큿”
“술 한잔 하실래요?
이집 사케도 좋아요”
“저.. 그럼.
맥주 한 잔만 마실게요.
제가 술을 잘은 못해요”
“아. 그럼요.
무리하지 마시고 드실 수 있을 만큼만 하세요”
혼마구로 코스가 나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식사를 즐기며 술을 곁들였다.
내가 좋아하는 참치에
이런 미인과 하는 저녁이라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두가 날 부러워하는 듯했다.
마치 날 남편쯤으로 생각하는 부러움이었다.
“아, 취해.
나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어떡하죵. 힝”
“술 잘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 맥주 세 병 째네요”
술이 살짝 오른 정신이가 더욱 귀여워 보였다.
“오늘 기부니가 너무 좋거든요.
이렇게 멋진 대표님이.
이렇게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참치가 아주 살살 녹아요”
닷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는
나와 정신이···
우리···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정신이가 내 어깨에 스르르 기댔다.
난 매우 놀랬지만
한편으론 설레고 기분까지 좋았다.
나에게··· 기댄다···
내 심장이 또다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대표님. 저 잠깐 기대고 있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편히 기대세요.
술 좀 깨고 나가시죠”
이 미녀가 내 어깨에 있다.
이런 미녀가···
마치 정신이의 남자친구···
남편이 된 느낌이었다.
이 순간이 진짜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냥 멈췄으면···
“대표님···”
정신이가 눈을 감은 채 날 불렀다.
난 정신이의 머리를 잘 받친 채
그녀의 얘기를 들을 준비했다.
“네. 말씀하세요”
“대표님. 실은요···
저 아파요···”
“네? 어디가 안 좋으세요?”
“아픈지 오래 됐어요.
제 머리가 망가졌어요.
많이 아파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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