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자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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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삽화
ZEUTION
작품등록일 :
2024.03.07 16:45
최근연재일 :
2024.11.24 17:28
연재수 :
1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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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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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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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보고서 3. 정신이의 고백

DUMMY

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단잠을 잔 거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몸이 무거웠는데

오늘은 너무 가볍다.

힘까지 넘친다.


10억짜리 프로젝트라···


역시···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가?

그 어느때보다 든든한 아침이었다.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아내와 아이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예민한 딸 아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잠을 따로 자고 있었다.

딸 아이 은아가 엄마와 같이 자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자는 이유도 있었고.


외벌이 가장인 남편이

우는 딸 아이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

회사일을 망친다는 화진이의 배려가 있었다.


처음 각방을 썼을 땐

무언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예민한 성격인 나는

어느새

혼자 자는, 혼자 있는 공간이 익숙해졌고

지금은 자연스런 일상이 되어버렸다.


엄마를 꼭 안고 자고 있는 아이와

그런 아이의 안정제가 되어주는 화진이를 보니

내 마음도 평온해진다.


오늘 프로젝트 회의가 잘 되면

화진이에게 그 동안 못 갖다 줬던

월급도··· 다시 갖다 줄 수 있으리라.

더욱 잘해 주리라 다짐을 해보았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여보? 벌써 나가?”


화진이가 나의 기척에 깼나 보다.


“어어. 더 자.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


“아침이라도 먹고 나가지”


“괜찮아. 사실은

좀 긴장해서 속을 비우는 게 좋을 거 같아”


“넘 부담 갖지 마. 태성이 오빠도 온다며?”


에이앤건설 재직 당시

가족모임으로 태성이 형 가족과도

자주 어울렸기 때문에 화진이는

태성이 형을 잘 알고 있었다.


“맞아. 태성이 형이 있어서 그나마 좀 나아.

잘될 거야. 갔다 올게. 좀 더 자”


“응. 운전 조심하고.

부담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해.

자기는 안 꾸며도 멋져”


“고마워. 화진양”


“사랑해. 여보”


“어. 나도”


아내와 웃으며 인사한 후

집을 나섰다.


사랑해···


아내의 말을 듣고

어제 정신이가 갑자기 꺼낸 말이 떠올랐다.


사랑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워낙 성격이 좋은 정신이니까

그냥 감사인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정신이와의 통화하는 내내

떨렸던 상태라 정신없이 끊기도 했지만.

사실 정신이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정신이가 웃으며 그냥 툭.

끊어버렸기에···


에잇.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의미를 두지 말자!

자! 가자. 최병재!


출근 시간대라 차가 많이 막혔지만

서둘러 움직인 탓에

미팅 장소엔 3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원 프로젝트···

에이앤건설 재직 당시 회사의 골칫거리였던 현장.

회사 소유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개발하려던 당시 문화재가 발굴되어

공사를 시작하려다 모든 게 무산되어 버린 사업.

진작에 웅장한 아파트가 세워졌어야 할 곳이

나대지로 버려졌던 비운의 현장.


아무것도 없는 이 대지에 세워질

아파트처럼 나도 웅장한 성을 세울 수 있을까?


주차하려고 공터에 들어서니

정신이가 벌써 도착해 임시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차 안에서 보아도 여신의 존재는 눈부셨다.


새하얀 정장 셔츠에 검은 치마를 입은 정신이.

정신이를 보자마자 또 심장이 뛰었다.


왜 정신이만 보면 심장이 뛰는 거야?

뭐야? 나 쟤 좋아해?

정신 차려 병재야. 이건 그냥 일이야. 일.


주차를 한 후 차에서 내리자

정신이가 내 쪽으로 다가와 주었다.


“어머. 대표님.

정장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와. 멋지시다”


여름이지만 중요한 자리인 만큼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는데 정신이가 칭찬을 해준다.


“야, 말 놓자며 왜 존댓말이야. 넌”


그러자 정신이가 몸을 밀착하며 귓속말을 하려했다.

고혹적인 향기가 날 꽉 움켜쥔다.


“미팅 자리에서 실수하면 안 되잖아.

정신 안 차려?”


아··· 맞다.

오늘 우리는 에이앤건설의 용역을 받는

외주업체의 신분이니까···


역시 정신이네···

프로구나···


정신이가 조금 더 내게 밀착하며

귓속말을 전할 때 그녀의 푹신한 살결이 느껴졌다.

별거 아닌 이 신체 접촉이 너무나도 짜릿했다···.


정신이가 다시 속삭였다.


“근데 너. 정장빨 죽인다.

디게 섹시해”


“응? 어··· 고마워”


얼굴이 잘 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운동을 꾸준히 했었고

나이를 먹어서도 나름 관리를 하고 있었던 터였는데.

막상 이렇게 정신이의 칭찬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가슴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섹시하다니··· 기분 좋은 걸?


다시 나와 간격을 두고 정신이가 말했다.


“최대표님. 오늘 잘해보아요”


“네. 김대표님. 잘 부탁드려요.

제가 실무가 좀 약합니다.

나름 공부를 하긴 했는데··· 어렵네요”


“넹. 걱정말고.

그냥 구경하시면 될 것 같아요. 힛”


정신이는 자신감에 넘친 표정을 하며

내게 윙크를 해 보였다.


때마침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차 한 대가 도착했다.

태성이형과 에이앤건설 측에서 실무를 담당할 직원들.

나도 에이앤 출신이었기에 다 아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난 오늘. 어디까지나 외주용역 업체일 뿐.


내 위치를 잊지 말자.


다가온 태성이 형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비제이기획 최병재 입니다”


이런 나의 의도들 알아챈 듯

태성이형도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네. 일찍 오셨네요.

최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저랑 같이 오신 분들은

이번 현장을 총괄책임 할 소장님과

각 파트 실무자 들입니다”


이미 서로가 얼굴을 아는 사이들이었기에

간단한 눈인사를 나눴고 그들의 시선이

정신이에게로 하나 둘 쏠렸다.


“아, 이쪽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저와 같이 컨소로 업무를 진행할

김정신 대표입니다”


“안녕하세요~ 고객에게 감동을 드리는

공감디자인 대표 김정신입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정신이의 똑 부러지는 말투와 아름다운 외모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반한 눈치다···


이미 게임은 끝났다.

이 프로젝트 성공할 수 밖에 없다.


“아. 인테리어 대표님 이셨군요.

아주 미인이십니다.

차 타고 들어오는데 웬 배우가 서 있어서

깜짝 놀랬어요”


태성이형의 칭찬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앗, 칭찬 감사합니다.

어휴~ 배우라뇨. 과분한 말씀이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각자 인사를 마치고 현장에 세워진

컨테이너 사무실로 이동하였다.


건축현장을 많이 가본 나는 익숙하지만

정신이는 이런 곳이 처음일 텐데 괜찮을까?


회의 테이블에 모두가 자리했고

태성이형이 회의를 주재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누추합니다만 오늘은

모두가 기다렸던 프로젝트가 시작하는 중요한 날이죠.

IMF라는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잘 버텨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태성이 형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날 위로해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고맙다.


“아마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눈 김정신 대표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은···”


“에이앤건설의 숙원사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성이형의 말을 바로 이어 대답한

정신이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치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알았지?


“선대회장님이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한 장소이자

최초의 토지를 매입하며 기반을 만들었던 곳.

그러나 문화재 개발에 묶여 24년간 허락되지 않았던 곳.

이 장소가 에이앤건설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생각해보니

책임감이 무거워지지만, 이런 의미있는 프로젝트에

제가 참여할 수 있다고 하니

너무 신나더라고요”


“아니··· 김대표님.

어떻게 이리 잘 알고 계세요?”


“아, 어제 밤새워 조사 좀 했습니닷. 헷”


다들 감탄하는 눈치였다.

건설사 직원이 아닌 다른 외부인이

회사의 역사를 이리 꿰뚫고 있는 건

정신이가 처음이었다.


“어이구, 대단하신데요”


“제가 조사를 좀 하면서 만들어 본 게 있는데

먼저 보여드려도 될까요?”


“네. 좋습니다. 같이 보시죠”


태성이형 말이 끝나자 정신이는 준비한 서류봉투에서

보고자료로 보이는 페이퍼를 꺼내 실무자들에게 나눠줬다.


“너무 성급해 보일까 조심스럽기 하지만

어제 공부를 하면서 에이앤건설 연혁과

이제껏 해오신 사업들을 보면서

이번 홍보관 컨셉을 정리한 페이퍼입니다”


“와”


자료를 받은 사람들은 짧은 탄성들을 뱉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이의 자료에 매료되어갔다.


“어떤 톤 앤 매너를 유지하고 계신지

어떤 패턴을 쓰고 계신지를 찾아보니.

이번 수원 프로젝트에는 이런 컨셉을

적용해 보시는 게 어떨지 제안을 드려봅니다.

마침 수원시가 추구하는 색상 컨셉과도 맞아 떨어지고요”


“아, 그래요? 수원시 컨셉까지 찾아보셨어요?”


“네. 어제 수원시청도 쭉 살펴봤어요”


“야··· 이거··· 회의 다했는데?

최사장. 이런 분을 어떻게 섭외한 거야?”


태성이형의 조크에 다들 미소 지었지만

모두가 정신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 실무회의를 통해 세부적인 내용은

조율을 해가겠지만 킥오프 회의자리에

이렇게 디테일한 보고서를 들고 온 사람은

내가 재직하던 기간에 난 본적이 없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생각 또한

나와 같을 것이다.


정신이가 미리 준비한 자료 덕분에

우리의 첫 회의는 순조롭게

아니 완벽하게 진행됐고

모두가 박수를 치며 마무리했다.


당연히 그 박수의 주인공은 정신이였다.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를

태성이형이 뒤따라왔다.


“김대표님.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큰 고민이 많이 해결됐네요”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많이 채워가겠습니다”


“아뇨. 첫 날부터 많이 채워서

이제 좀 적당히 채워야겠어요”


“어휴, 팀장님. 비행기 너무 태우지 마세요”


태성이형과 정신이의 대화에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형. 여기 김대표님이 내 사무실 인테리어도 도와주셨어”


“아. 그러셨구나. 이분이시구나.

얼굴도 이쁘신데 일까지 잘하시면

이거 너무 반칙 아닙니까? 김대표님”


“그런 반칙이라면 앞으로도 쭉 해볼게욧. 힛”


“아, 형.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식사 시간인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안에 있는 직원들하고 다음 회의장소로 넘어가야 해.

본사에서 설계회의가 있어서”


태성이형의 말에 정신이가 못내 아쉬워했다.


“아잉, 팀장님.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제가 수원 맛집 쫙 꿰고 있거든요”


“저도 김대표님과 같은 미인하고 식사하고 싶은데

본사가서 어르신들을 모셔야 한답니다. 슬프네요.

앞으로 자주 봐야 하니 다음에 제가 식사 모시겠습니다.”


“어휴. 저희가 모셔야죠.

다음에 저희가 확실히 모시겠습니닷”


저희가···

정신이와 나···

우리팀··· 같은팀···

‘저희가’라는 정신이의 말에

무언가 뜨거워졌다.


“그럼. 최사장님. 김대표님.

오늘 고생 많으셨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봬요”


그렇게 태성이형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정신이와 둘만 남게 됐다.


“정신아. 고생했어.

너 진짜 멋지더라”


“어휴. 진땀 뺐네. 여기 땀 난 것 봐”


정신이의 손을 보니 땀이 흥건했다.


“빨리 뭐 좀 먹어야겠다.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살께”


“어헛. 오늘은 내가 살 거야.

지난번에 니가 참치 사줬잖아.

가자. 고기 먹으러. 수원은 갈비지”


내 차에 정신이를 태우고

정신이가 안내하는 갈비집으로 이동했다.


가게에 도착한 후

정신이는 능숙하게 주문을 하였고

오전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꿀맛이었다.


“정신아. 너 진짜 대단하더라.

그 많은 걸 언제 다 조사한거야?”


“어제 너랑 전화 끊고나서

바로 달렸지”


“아무리 그래도. 프로젝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루만에 자료를 다 조사하고.

너가 만들어온 페이퍼 수준이

장난 아니야”


“내가··· 좀···

한 번 꽂히면 좀 그래”


“소름 끼치더라. 무섭다. 너”


그 순간 정신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난 정신이의 준비성을 칭찬한 건데

뭐가 잘못됐나?

내가 실수라도?


“이게··· 음···

장점이자 또 단점이기도 한데···

이게··· 내 병이야···”


놀란 나는 손사레를 쳤다.


“아냐아냐, 난 그런 게 아니고

준비가 너무 완벽해서..”


“내가 원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해서.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 성격이 그래···”


“엄청난 장점이지. 집중력이 뛰어난 거고”


“근데···

너가 좀 전에 한 그 말”


“내가 한 말?

내가 뭐랬지···”


무슨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어

매우 당황스러웠다.


“소름 끼치게 무섭다···

이 말”


“어.. 준비가 너무 완벽해서···”


“죽기 전에 남편이 나한테 한 말이야.

나 소름 끼치게 무섭다고···

그리고 죽었어. 내 생일날···”


“아··· 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닌데···”


“병재야”


“어.. 어”


화들짝 놀라는 나에게

정신이가 무겁게 얘기했다.


“너하고 일을 계속 같이 해야 하니까..

미리 말을 해야 할 거 같은데...”


“어. 괜찮아. 얘기해”


“나···

정신병 있어. 실은··· 환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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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고서 17. 신이주신 세계 1 24.11.19 10 0 10쪽
16 보고서 16. 양아치의 제보 24.11.18 1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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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보고서 14. 마주보는 진심 24.11.16 11 0 10쪽
13 보고서 13. 다가오는 운명 24.11.15 9 0 11쪽
12 보고서 12. 바람후의 햇살 24.11.14 10 0 10쪽
11 보고서 11. 몰아치는 바람 24.11.13 9 0 9쪽
10 보고서 10. 사생결단 승부 24.11.12 12 0 11쪽
9 보고서 9. 무너지는 정신 24.11.11 11 0 12쪽
8 보고서 8. 권모술수 달인 24.11.10 11 0 10쪽
7 보고서 7. 일희일비 사고 24.11.09 10 0 12쪽
6 보고서 6. 드러나는 상처 3 24.11.08 9 0 11쪽
5 보고서 5. 드러나는 상처 2 24.11.07 8 0 10쪽
4 보고서 4. 드러나는 상처 1 24.11.06 9 0 10쪽
» 보고서 3. 정신이의 고백 24.11.04 8 0 13쪽
2 보고서 2. 신과함께 서곡 24.11.04 7 0 9쪽
1 보고서 1. 꿈에서본 그녀 24.11.03 1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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