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6. 드러나는 상처 3
정신이는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 너무 무서워”
어제 회의 때 보이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정신이는 사라지고
불안에 떨고 있는 정신이만 남아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정신이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고 사무실 안으로 이끌었다.
“내가 커피 가져올게.
회의실에 앉아있을래?”
정신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들어갔고
난 서둘러 따뜻한 커피를 준비했다.
“정신아. 커피 한잔하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혀보자”
커피잔으로 향하는 정신이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 어제 기억이 하나도 안나···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
집으로 최대가 데려다 준거지?”
“어···다행히 네가 아파트 이름을 말해줘서
잘 찾아갔어. 때마침 언니가 나와 계시더라”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내가 어디에 있었어?”
정신이는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까···
“음··· 그게 말이야···
어젯밤에 경찰한테 연락이 왔어”
“너한테?”
“응··· 너가 경찰서에 있다고···
좀 와달라고···”
“내가 경찰서에 있었어?
왜?”
너무 놀라 하는 정신이의 표정 때문에
괜히 내가 더 미안해졌다···
뭔가 비밀을 움켜진 느낌이었다.
“너가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걸
누군가가 보고 경찰에 신고를 했대.
그래서 급히 출동한 경찰이
널 보호하려고 경찰서로 데려갔나 봐”
“근데 경찰에 왜 너한테 전화를 한 거야?”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묻고 싶은데···
오히려 내가 취조를 받고 있다···
“응.. 그게···
나한테 전화를 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대··· 그렇게 취했는데도···
내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래”
“아··· 맞아···
금방 외웠어··· 뒷번호가 쉬워서···
7749···”
“머리 좋다. 너···
난 숫자 잘 못 외우는데···”
“번호가 쉽잖아···
내 생일을 곱하면 되더라고···
7749”
“어? 생일?
아··· 7월 7일?”
“응···
칠칠에 사십구”
“아! 맞네.
와. 몰랐어. 이제 알았네”
얘길 듣고 나니 금방 이해가 됐지만.
정신이의 비상한 머리에 난 감탄했다.
아··· 이런 식으로 연관시켜 기억할 수 있는 거구나···
“미안해··· 최대···
이런 모습 보여서···”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 듯하다가
정신이가 금세 우울해졌다.
“아니야. 술 많이 취하면···
누구나 실수도 좀 하고···
때론 사고도 치고 그래. 나도 그런데 뭘”
“나 어제 말이야···
사실은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어···”
“응? 가지 말아야 할 곳?
그곳이 어딘데?”
무거운 표정의 정신이는 입이 안 떨어지는지
한참을 우물쭈물 거렸다.
“아무한테도 하지 못했던 얘긴데···
비밀 지켜줄 수 있어?”
고개를 푹 숙인 정신이에겐
의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 입 무거워. 비밀 지킬게.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
“사실··· 내가 한동안 만나던 남자가 있었어···”
아··· 그렇지···
남자친구가 있었구나···
그래···
이렇게 예쁜 정신이가
애인이 없을 리가 없겠지··· 당연한 거야···
왠지 모를 질투와 아쉬움이 컸지만
행여 얼굴에 티가 날까 얼굴 표정에 신경 쓰며
정신이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싸우고 다시 만나고··· 또 싸우고···
다시 만나고··· 여러 차례를 그랬어···
한참을 안 만났었는데···
어제 내가 그놈을 찾아간 거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 어제 친구 만나러 간다던 게···
그 사람이었구나···”
“응··· 맞아.
그놈 만나면서 뭔가···
내가 쌓인 게 많았어···
날 이용해 먹는 듯한 느낌···
날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
그걸 알면서도 내가 계속 참아냈던 거야···
사랑이라고 믿으며··· 어리석게도···”
말을 이어나가는 정신이의 표정 속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억울함과 분노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놈한테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어.
너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마.
그리고 난! 이제 이렇게 잘나가는 사람이야.
이게 하고 싶었나 봐··· 그놈 앞에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어제 경찰서에서 그렇게 잡아오라고 한
그 새끼가··· 바로 그놈이었구나···
정신이 남자친구···
애인···
“정신이 네가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얘기만 들어도 아픔이 느껴지네”
“그런 거 같아. 오랫동안 참아왔던 거 같아.
그래서 그걸 풀어내려고
그놈이 하는 술집엘 간 거야. 어제···”
“아··· 술집을 하시는구나”
정신이가 왜···
뭐가 아쉬워서··· 정신이 니가 뭐가 부족해서···
술집 하는 사람을 왜 만나···
속상했다. 얘기만 들어도 속상했다.
아름다운 정신이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놈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감정이 격해지고 언성을 높이게 되고···
그러면서···
내 감정 컨트롤을 못 했던 거 같아···
또 엄청 싸운 거 같은데···
그 뒤엔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 최대···
나··· 무서워···”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신이가 울고 있었다.
“정신아.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뭐라도 도울게.
네가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라면
뭐든 찾아서 같이 해보자”
“자꾸··· 나도 모르게
사고를 치는 내 자신이 무서워···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나···
하나도 낫지 않았나 봐···”
“방법이 있을 거야. 정신아.
괜찮아. 분명 있을 거야”
“기억이 나질 않아
그놈한테 뭘 했는지도 모르겠어.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그놈이 날 죽인다고 했던 것도 같고···
그래서 더 무서워.
그놈이 날 찾아올까 봐.
죽이러 올까 봐···”
정신이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안정··· 안정이 필요하다···
“아냐. 정신아.
그런 일은 없어. 그래도 만났던 사인데.
널 위협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걘 다 알아.
우리 집이며··· 내 사무실이며···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어.
그러고도 남을 새끼야···”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어떻게 해야 정신이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
“그러면 정신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정신이는 울음을 그치고
무언가 간절히 소망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우리 수원 프로젝트···
같이 해야 하잖아···
당분간 내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건 어때?
네가 좀 안정될 때 까지만···”
“어떻게 그래···”
“너가 인테리어 해줘서 알잖아.
공간은 넓은데 나 혼자야.
나도 무서워”
풋. 정신이가 웃었다.
무섭다는 내 말이 좀 먹힌듯하다.
“책상이야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거고.
너희 사무실에 있는 짐은
일하는 데 당장 필요한 것들만
챙겨오면 되지 않겠어?”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래.
너한테 피해끼치고 신세 지는 건 싫어”
“피해 아니야. 정신아.
당분간만. 니가 좀 안정될 때 까지만.
그렇게 해보면 어때?
그동안은 내가 너희 집까지 데려다 줄게”
“최대···”
내가 갑자기 너무 들이민 건 아닌지
슬쩍 불안해졌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불안해하는 정신이에게
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같이 사무실을 쓰자고 하면
뭔가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최대···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몰라··· 일단 나도 혼자 있는 게 무섭기도 하고···
또··· 도와주고 싶어”
“왜···?”
“모르겠어. 난 너를 보호해주고 싶어”
내가 말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내가 정신이를 좋아한다···
여자에게 느끼는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내가···
또 다시 심장이 뛴다···
“내가 불쌍해 보이는거야?
정신병 있다고 해서···
혹시 동정심이야?”
정신이가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는다.
동정심이냐니?
미친 소리···
사심이겠지···
내가··· 널···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
“동정심 아니야.
그리고 무섭다는 말 진심이야.
왜냐면···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 무서워.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들이 있어.
그런데 정신이 너랑 같은 곳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바라보며 일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서로 의지도 될 수 있고···
잡담도 같이 나누고···
혼자 밥 안 먹어도 되고···”
그리고 난
너를 매일매일 볼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난 좋아···
매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최대··· 나 그래도 돼?”
정신이가 넘어온 거 같다.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태연함을 유지했다.
“어. 그럼. 부담 가질 필요 전혀 없어.
좀 안정될 때 까지만 그러자고”
아니··· 그냥 계속 쭉···
같이 있어주면 고맙지··· 난···
“사실은 이 말··· 내가 먼저 하려고 했어”
정신이의 얼굴엔 미안함과
또 어떤 알 수 없는 표정이 묻어 있었다.
“어떤 거?”
“당분간 최대 사무실에 좀 있어도 될까 하고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온 거야.
그래서 아침부터 온 거야··· 무서워서···”
“어? 그래?
잘 됐네. 그럼. 생각이 통했네.
우리 좀 통한다. 그치?”
“나 어때 보여?”
어때 보이냐고?
뭐가 어때? 예뻐 보이지···
“음··· 좀 불안해 보이긴 해”
“나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사실은 머릿속이 많이 고장 난 상태야.
회로가 엉망진창이야.
근데 최대 너는···
반대로 엄청 안정적이야.
차분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기댈 수 있다···
나에게 정신이가···
얼마든지 환영이야. 정신아.
맘껏 기대!
“그래서 아마···
어제도··· 너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나 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정신아”
“고마워. 최대···
정말 고마워···
나 흔들리지 않게··· 조금만 잡아줘”
이제서야 정신이가 살며시 웃는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꽉 잡아줄게.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놓치지 않을게.
정신아.
이제 정신이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곳을 볼 수 있게 됐다.
이 시작은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2024년 3월. 공감출판사.
최병재 회장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을 이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꿈에서 만난 그녀를
실제로 만나게 됐고
그런 그녀와 같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된 우연한 사건이
벌어지게 된 거죠”
“예지몽이었군요. 정말 신기하네요.
저 같아도 꿈에서 본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면
운명이라 생각할 것 같습니다”
최회장의 말을 경청하던
공감출판사 황민후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최병재 회장은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던 김하영 작가를 바라보며
다시 얘기를 이었다.
“운명이라 믿었고
모든 게 꿈만 같았어요.
하지만···그땐 몰랐지요···
그 시작이... 행복이 아니라
지옥의 시작이었단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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