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9. 무너지는 정신
『정대리.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환장을 한다니? 작업?』
『아, 지금 사무실이라 듣는 귀가 있어서 길게는 말 못하는데···』
『잠깐 커피 한잔할 수 있어? 내가 회사 앞으로 갈게』
『어유, 회사로 오신다는데 당연히 나가야죠. 저의 주님이셨던 분인데요』
(*광고업계에서는 클라이언트 광고주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주님은 무슨. 치.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30분 뒤에 봐』
『네네. 최프로님』
정대리가 안다.
권기철 개새끼.
여자라면 환장을 해?
대체 뭘 하고 다니는 놈이냐 너는···
정신이를···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면
넌 내가 죽인다. 진짜 죽인다.
사무실에서 나와 애드씨에프로 미친듯이 차를 몰았다.
페달을 힘껏 밟아 이리저리 다른 차들을 추월하며 달렸다.
머릿속엔 그저 빨리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약속한 커피숍에 도착하니 자리잡고 앉아있는 정대리가 보였다.
“일찍 나와있었네. 정대리. 너무 오랜만이지?”
“우아, 최대표님. 더 멋있어 지셨다. 살도 빠지신 거 같고. 운동하세요?”
“운동은 무슨. 요새 수원 프로젝트 준비하느라 정신없지. 뭐.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싶은데 업무시간이라 용건만 물어봐야겠네”
“그러니까요. 그 직원 얘기는 뭐예요? 무슨 일인거예요?”
정신이가 피해보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포장해서 얘기해야 한다.
“어.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외주로 고용한 여자 직원이 있었는데, 아마 업무 때문에 권이사랑 통화도 자주 하고 실무 미팅 때도 같이 보고 그러면서 좀 친분이 있었나 봐”
“전 뭐 미팅 자체를 참석하질 못했으니··· 어휴···”
정대리의 한숨을 더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우리 여자직원이랑 권이사랑 어제 저녁을 먹는다고 하는 거야”
“헥. 설마···”
“오늘 여직원이 출근을 안 했어. 연락도 없고. 그럴 친구가 아닌데··· 권이사를 만나고 나서 아직까지 연락이 안 돼.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서···”
“있었겠네요. 분명. 단둘이 하는 저녁자리라면···.”
덩달아 같이 걱정해주는 정대리가 고마웠다.
“우리 직원 집에 연락을 해보니 방문을 잠그고 나오질 않는데. 상황이 이쯤 되니 대체 권이사 그놈이 어떤 놈인지 너무 궁금한 거야”
“음··· 대표님. 어제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권이사··· 정말 더러운 사람이예요”
“더러워?”
“우리 회사에 좀 이쁘게 생긴 여직원들한테는 다 한 번씩 찝쩍거렸더라고요”
“회사 직원들을?”
“네. 저한테도 몇 번이나 수작 거는 걸 제가 소리를 한 번 빽 질렀거든요. 회사에서. 슬쩍슬쩍 손을 더듬고 스킨쉽 하려고 하길래. 좀! 적당히 하세요! 하고 직원들 다 있는 곳에서 소리쳤죠”
“미친놈이구나”
“그 이후로 수작은 안 거는데. 참나원”
난 실소하는 정대리의 말에 점점 빨려 들어갔다.
“정말 일만 시켜요. 일만. 아니. 광고기획자가 광고주 컨트롤도 하고 미팅도 하고.
전체적인 핸들링을 해야 하는 건데. 온갖 자료조사나 페이퍼워크는 저한테 다 시키고
미팅은 지만 쏙 간단 말이죠.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래서 제가 프로젝트 미팅 참여를 못하는 거예요”
“배대표님도 아셔? 이걸?”
“말씀드렸죠. 그런데 수원 프로젝트가 중요하니 경험 있는 권이사가 클라이언트 관리하는 게
맞다고 그 인간 편만 드세요. 둘이 좀 이상하다니까요”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배대표랑 통화할 때 묘하게 권이사를 감싸고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더럽다는 얘기는 뭐야?”
“아, 작년 퇴사자 중에 권이사한테 당해서 그만 둔 언니가 있어요”
“당하다니?”
“잔거죠. 뭐. 어우. 더러워. 그 변태 같은 새끼가 뭐가 좋다고.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유부남 새끼를···”
“그럼 권이사를 잘라야지. 왜 피해자가 그만 둬?”
“권이사가 옥외매체 몇 개를 갖고 있거든요. 전광판들이요. 거기서 꽤 수입이 나나 봐요.
배대표한텐 아주 땡큐죠. 권이사가 영업라인도 몇 개 있는 거 같고요. 회사 돈줄인데 자르고 싶겠어요?”
“심각하구나. 애드씨에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매우 심각하죠. 그래서 한 달이 멀다 하고 직원들이 퇴사하죠. 이런데도 겉으로 보면 메이저 광고주들 많이 갖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좋은 회사인 줄 알고 계속 지원하고. 또 그만큼 연봉은 많이 줘요. 페이가 쎄니까 더러워도 이 회사 다니려고 하는 거예요. 후···”
“정대리. 힘들었겠구나··· 정말··· 몰랐네. 난”
“게다가 권이사 말이죠. 외주업체에 뒷돈도 많이 받아 처먹었어요. 그 어디더라? 옥외업체 큰데. 아. 망고애드. 걔네한테는 매달 상납도 받는다고 하던데요?”
“진짜 미친놈 아니야? 제 정신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에이앤 재직 당시엔 그저 뺀질거리는 광고회사 직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정대리 얘기를 들어보니 부정부패의 온상, 그 자체였다.
“저도 이번 프로젝트만 치고 그만두려고요. 좀 규모가 작아도 미친놈들 없는 곳에서 일할래요”
정대리 얘기를 듣고 나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야겠네.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겠네. 조금만 더 버텨보자. 정대리. 경기가 회복되는 대로
내가 건설사 홍보팀 자리 좀 알아볼게. 내 동기들이 다 건설사 다니고 있으니까”
“오, 주님. 감사합니다”
두 손 모아 날 응원해 주는 정대리가 고맙기도, 또 안쓰럽기도 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했던 정대리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마음 한구석이 더욱 시려왔다.
망고애드··· 망고애드···
고··· 고영민 사장···
나도 알지··· 고사장님···
건설협회 행사 때 식사도 한 적 있고..
망고 사무실이 이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강남의 거리를 좀 더 걸어 나갔다.
20여 분쯤을 걸어 망고애드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금융위기로 많은 기업들이 떠난 테헤란로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망고애드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평소의 나 같으면 무턱대고 행동을 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나는 정신이를 건드리는 권기철을 파헤치고 싶음 마음뿐이었다.
똑똑.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포데스크에 여직원이 앉아있었다.
“저 혹시, 고영민 사장님 자리에 계실까요?”
“대표님하고 약속 잡고 오신건가요?”
“아, 약속은 못했는데 이 근처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에이앤 건설 최병재라고 합니다”
“에이앤 건설이요? 잠시만요”
내 얘기를 들은 여직원은 내선전화로 통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이면 대기업을 다녔던 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느꼈다.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에이앤 건설이니···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고영민 사장에게 향했다.
대표실 문을 여니 고영민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겨주었다.
“어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최프로님. 아니, 최대표님 이시죠?”
악수하는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는 넉살 좋은 사장님.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난 사이지만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시니 고맙고 죄송하기까지 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자자. 일단 여기 앉으시죠. 차라도 한잔?”
“아닙니다. 먹고 왔습니다. 사장님”
“아니,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이렇게 찾아오시기까지 하고요. 허허허”
“잘못이라뇨. 아닙니다. 사장님. 이 근처 올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생각이 나서 한번 들렀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업은 어떠세요? 막상 해보니 쉽지 않죠?”
“네. 어렵네요. 운영도 그렇고. 책임감도 무거워지고요”
“제가 그래도 사장 노릇은 먼저 시작했으니까 고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럼요. 선배님이신데요. 저···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좀 대놓고 물어봐서 죄송하긴 하지만··· 권기철한테 돈을 주고 계십니까?”
호탕하게 웃고 있던 고영민 사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애드씨에프 라인입니까?”
“사장님. 도와주십시오. 저희 직원이 권기철한테 당했습니다”
“당해요?”
난 고영민 사장에게 정신이의 이름만 뺀
얘기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음··· 안 그래도 정리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이 타이밍인가 보네요”
“돈을 왜 주고 계셨던 겁니까?”
“이면계약 때문이예요”
“이면계약이요?”
“사실 우리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옥외매체 50프로 이상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그중 명동사거리에 있는 빌보드가 있어요. 완전 노른자죠. 입찰을 통해서 정당하게 우리가 따 낸건데 권기철 이 새끼가 공무원 몇을 공사 쳐서 명동 빌보드 지분을 좀 갖고 있어요. 그래서 매달 수수료의 일부를 권이사한테 줘야 하는 거예요”
“권기철이 공무원까지 공사 칠 정도입니까?”
“뭐 술 먹고 기집질 시켰겠죠. 워낙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니까. 뭐 듣기로는 여자친구도 엄청 이쁘다고 하던데요”
“아, 그래요?”
“뭐 수수료는 그렇다 치는데, 권기철 이 새끼가 진짜 악질인 게. 우리한테는 광고회사가 갑이잖아요. 갑을관계. 쳇. 이게 더러운 겁니다. 광고회사한테 잘 보여야, 광고회사가 옥외업체한테 일을 내려주니까요. 그래서 원래 줘야할 수수료의 1.5배를 권기철한테 주는 겁니다. 개같죠?”
“1.5배나요? 그렇게나 많이요?”
“혼자 해처먹겠습니까? 배대표랑 같이 처먹겠죠?”
“아··· 애드씨에프 대표니 그럴 수 있겠네요”
“말하나 마나죠. 뭐 어쩌겠습니까. 갑이니 더러워도 참을 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에이앤 다닐 때는 몰랐던 이야기가 정말 많네요”
“IMF 때문에 경기도 안 좋은데 언제까지 갖다 바칠 수도 없고, 그래서 저도 타이밍을 보고 있었습니다”
정대리, 고사장님···
이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정신이를 보호하기 위해선 악의 무리부터 처단해야 할 거 같은 사명감이 생겼다.
“사장님. 제가 방법을 찾아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어이구, 최대표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니 힘이 납니다. 우리 같이 해봅시다”
“네. 사장님”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 머릿속은
막히는 길만큼이나 꽉 막혀있었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쁜 놈들이 많다.
더럽다···
어제 저녁 정신이가 권이사를 만나러 간 순간 이후부터
짧은 하룻 사이에 내 머릿속까지 더럽혀지고 있었다.
힘겹게 사무실로 돌아와 지친 몸을 의자에 맡겨본다.
정신이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빈자리가 더욱 슬퍼 보였다.
정신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제발 연락 좀 해줘···
뚜두두두두 뚜두두두두
전화벨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비제이기획 입니다』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최대···』
『정신이니? 정신아. 정신이 맞아?』
『응. 맞아. 최대』
『야, 김정신. 너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얼마나 놀랬다고』
놀람 반, 안도 반. 나의 호들갑을 잠자코 듣고 있는 정신이었다.
『최대··· 나···』
『괜찮은거야? 정신아?』
『나 있잖아···』
『말해』
『프로젝트에서 빠질게··· 그만 할래. 나···』
정신이의 이 말 한마디에··· 나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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