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1. 몰아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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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이 익고 있던 불판에서 성난 불꽃이 활활 피어올랐다.
“탄다”
“이씨, 진짜 탔네. 니 얘기 듣다가 방심했네”
내 속도 고기와 같이 타들어갔다.
오성이에게 응원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더욱 냉랭한 반응에 나의 정신은 뿌예졌다.
선···
넘으면 안 되는 선···
나도 알아.
넘을 마음도 없어.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고···
그냥 그렇다고···
“그런데···”
불판을 정리하던 오성이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이쁘냐?”
피식 웃음이 났다.
“뭐야. 생뚱맞게”
“이쁘냐고?”
“이쁘다. 매우 많이”
“한번 보고싶기는 하네. 얼마나 예쁜지”
“그냥 예뻐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런지”
“난 아는데”
“뭔데?”
“이것 봐. 참이슬”
오성이는 테이블에 있던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게 왜?”
“이게 이번에 새로 나온 소주잖아.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요새는 사람들이 이것만 찾아. 왜? 새롭거든. 새것. 안 해봤던 것에 대한 호기심. 이게 바로 사람이야”
새것··· 호기심···
정신이에 대한 나의 호기심···
나 역시 그런 건가···
“계속 먹던 거에서 새로운 게 나오니 궁금하고 맛보고 싶고.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 게다가 넌 더 심하지”
“내가 왜?”
“넌 화진이가 첫 여자잖아”
그랬다. 화진이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만나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결혼까지 골인한
내 인생에 단 한 번 있었던 여자였다.
“내가 지금까지 몇 명 만났더라? 한 스무 명 될 것 같은데?”
“자랑이다. 자랑이야. 그렇게 잘난 놈이 왜 아직 결혼도 못하냐?”
자신을 연애경력을 자랑하며 골똘히 생각하는 오성이가 은근히 얄미워 보였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지. 여자를 보면 대충 예상이 되거든. 얜 어떨 것이다. 쟨 어떨 것이다. 딱 그려지지. 그런데 넌 화진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뭐? 정신이? 그런 새로운 여자를 보면 그냥 확 끌리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다고··· 뭔가 자꾸 운명처럼 이어진다고···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일하는 분야도 그렇고. 같이 사무실 쓰게 된 것도··· 다 그래. 내가 뭘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닌데··· 그냥 이어진다니까. 운명처럼···”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 마.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
“꿈에서 먼저 본 것도?”
“그건 좀 신기하긴 하네. 그 이후론 꿈 꾼 거 없어?”
“어. 아직은···”
“또 한 번 꿔봐. 예지몽. 정말 운명이라면 뭔가 또 나오겠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오성이와 정신이 얘기를 곁들어 회포를 풀었다.
정신이 얘기뿐 아니라 서로의 근황을 나누느라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소주 네 병을 비워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자주 연락하겠다는 나의 약속을 받아낸 채 오성이는 웃으며 돌아갔고
나 역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운명···
운명이란 틀로 결부시키는 건
결국 내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그냥 우연의 일치일 수 있는데···
운명이라고 내 스스로가 믿고 싶은 거 아닐까?
어?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서있는 게
보였다. 김정신!
잔돈을 챙기고 있는 기사님을 뒤로 하고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야, 김정신”
내 목소리를 들은 정신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으··· 최대··· 춥다”
이곳에 얼마나 서있었던 걸까?
정신이는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난 재빨리 외투를 벗어 정신이 몸을 감싸주었다.
“야, 너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괜찮아?”
“하나씩 물어. 최대도 나 닮아가냐?”
“놀라니까 그렇지. 어떻게 된 거야?”
“최대 만나려고 왔지. 너가 나 불안하게 하니까”
“사무실에서 보면 되지.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뭐야. 전에 알려주고선. 사무실 서류에 주소도 나와있고”
“아, 그랬나. 그래도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면 어떻게. 추운데. 몸은 괜찮아?”
“안 괜찮아. 불안하고 추워”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내 품에 안아 꼬옥 껴안아주고 싶었다.
“가자. 집으로 데려다 줄게”
“가긴 어딜 가. 여기가 최대 집인데”
“안색이 안 좋잖아. 날도 쌀쌀한데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자꾸 걱정 시킬 거야?”
“날 걱정한다는 사람이 전화를 그렇게 끊냐. 말하고 있는데 그냥 툭 끊고는”
“미안해. 그건. 내가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내가 불안해서 집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전화도 안 받고”
“전화했구나. 내가 오늘 사무실 안 나간다고 했잖아. 미안해”
“최대표. 지금 일 크게 만드는 거 아니지? 그런 거지?”
고작 하루 못 봤을 뿐인데 정신이는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하루 종일 불안에 떨었을 정신이를 생각하니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사업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정신이 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 뭐 하려고 그래?”
“그것보다 정신아.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사무실도 안 나오고. 또 갑자기 전화해서 프로젝트도 빠진다고 하고”
“그게··· 내가 문제가 많잖아. 나 때문에 최대가 피해 보면 안 되니까. 내가 빠져주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그게. 너가 왜 문제가 많아? 너가 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면서. 문제는 권이사한테 있지”
“너가 뭐를 안다고 그래. 무슨 문제?”
“다 알아. 이제는. 다··· 알아. 대답해줘. 권이사랑 무슨 일 있었어? 얘기해 봐”
“그런 거 아니야. 아무것도. 다··· 내가···”
정신이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 자식이 너 건드린 거야?”
단호한 나의 질문에 정신이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정신이는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정신이의 표정에서 내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맞아? 힘들겠지만 대답해 줘. 그래야 해”
정신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또 술이야. 자꾸 사고만 치잖아. 나는. 미안해. 최대···”
“정신아. 제발···”
무거웠던 정신이의 입이 열렸다.
“불도저 같았어. 권이사 그 사람··· 저녁 먹고. 술도 마시고. 오랜만에 밖에서 먹으니 또 내가 조절을 못 했어. 많이 취했나 봐”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정신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한편으론 정신이에겐 이런 일이 안 생기길 바랐는데
내가 예상한 그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내가 많이 취해서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했던 것 같아. 권이사가. 그리고···”
정신이가 말을 멈춘 잠깐의 정적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나의 소리가 더해졌다.
“권이사 차 안에서 눈을 떠보니. 날 더듬고 있었어. 힘껏 밀어내려고 했는데 불도저처럼 들이댔어.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 불도저가 잠시 주춤할 때 차 안에서 도망쳐 달리기 시작한 거야. 익숙한 풍경이 보이더라. 집 근방이어서 본능적으로 달린 거 같아”
정신이 얘기를 들을수록 내 두 주먹은 점점 떨려왔다.
“더 심한 건 없었어. 도망쳤으니까. 방 안에서 지쳐 쓰러져 잠들다. 깼다가. 자다가. 놀래고. 계속 무한 반복이었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다 망친 거야. 이제 어떻게 일 할 수 있겠어···”
나는 정신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안정과 믿음···
이 두 손은 정신이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많이 놀랬지? 괜찮아?”
나의 말에 정신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괜찮아. 아무 문제없게 만들게”
“미안해. 최대. 나 정말 사고뭉치 맞아”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데 왜 자꾸 스스로를 탓하는 거야? 그러지 마. 이제. 넌 문제없어”
마주잡은 손등 위로 정신이의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조절만 잘 했어도 이런 일은 안 생겼을 텐데···”
“정신아. 니 문제가 아니야. 내가 다 알아봤어. 권이사 그 새끼”
“최대. 왜 그래. 무섭게”
“권이사 그 자식은 여자한테 수작 거는 걸로 이미 업계에선 유명하대. 개자식이래”
“최대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애드씨에프 다니는 내 후배한테 들었어. 다른 협력업체도 만나봤고. 다 들었어. 그 놈이 어떤 놈인지”
“많이 심각한 거야?”
“매우 많이. 게다가 협력 업체들에게 뒷돈까지 받아먹고 있었더라고”
“정말 그 정도였던 거야? 권이사가?”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나는 정신이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한 의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정신이가 무언가 말하려던 그 순간.
나의 등 뒤에서 또 하나의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네요”
화진이.
나의 아내 화진이.
화진이는 나와 정신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걸린 소감이 어때?”
정신이와 나. 그리고 화진이를 에워싸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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