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4. 마주보는 진심
“얘기해봐.
뭘 어떻게 조심하면 될지”
차갑게 던진 나의 한 마디에
태성이 형이 흠칫 놀란다.
“최대표님. 왜 그래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정신이도
내 팔을 잡고 살며시 흔든다.
아무 말도 하지 말란 소리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둘.
아무 사이 아니라고 먼저 말을 할까?
아니면···
서로 안 친한 척하고 싸우는 연기라도 해볼까?”
“병재야.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
형 말은 혹시 모르니
행동을 좀 조심하자는 얘기야”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라고?”
“오해 살 만한 행동···
난 한 게 없는데···
뭐라도 하고 나서 이런 말 들으면
억울하진 않지···”
순간적으로 감정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나 혼자 정신이를 좋아한 것뿐인데···
그 어떤 내색도 한적이 없는데···
나와 정신이를 연인이라고?
불륜이라고?
그런 시각으로 남들이 봤다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아직 아무것도 해본 것이 없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저 팀장님···
제가 그동안 몸이 좀 안 좋아서
최대표가 절 많이 챙겨줬어요.
혹시나 그런 것들 때문에
누군가가 오해를 했을 수 있는데.
저 이제 괜찮습니다.
다 나았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아이, 그럼요. 두 분은 제가 믿죠.
제가 좀 취해서 별소리를 다 했네요.
죄송합니다. 김대표님.
소문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헛소리하는 놈들은 아주 그냥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괜찮아요. 팀장님.
결국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 최대표님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분이에요.
돌이예요. 돌.
저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다니까요.
헤헷”
“그건 그래요.
저놈이 워낙 융통성이 없어서···
저것 봐요. 형이 한마디 했다고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네.
병재야. 형이 임마. 너 잘 아니까.
너무 마음에 담지 말고
내년에도 잘 해보자”
태성이형과 정신이는
제발 그만하라는 눈빛을 담아
나에게 술잔을 부딪혔다.
속에 쌓인 답답함을 털어내야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잔에 담긴 소주를 털어내는 것 밖에는 없었다.
현재 내 위치···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일 뿐···
밤 열시를 넘겨서야
회식자리는 정리되기 시작했고
나와 정신이는
한 분 한 분 인사를 드리며
귀가하는 직원들을 배웅했다.
모두가 사라진 가게 앞에서
정신이와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어휴. 이제 다 가셨네.
다들 술을 엄청 잘 드시네.
최대. 나 술 마시는 척하려고
엄청 노력했어. 봤어?”
“응. 고생했어.
많이 늦었다. 택시 탈 거지?”
“앙. 그래야지.
야. 근데 연말이라 사람 엄청 많다.
택시 잡기도 쉽지 않겠어.
최대는 어떻게 갈 거야?”
“어.. 나는 식당에 잠깐 올라갔다가 갈게.
오늘은 먼저 갈래?”
“엥? 식당에는 왜 다시 가?”
“어.. 그냥···
술 한 잔만 더하고 가게..”
“술을? 혼자?
왜?”
내가 혼자 술을 마신다는 소리에
정신이가 무척이나 놀라며 물었다.
하긴···
회식이 끝났는데 혼자 술 먹고 간다는 게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지···
그런데··· 나···
왜 이렇게 답답하냐···
터질 거 같은데···
“그냥··· 좀 답답해서···”
“최대. 왜 그래?
오늘 회식 분위기 좋았잖아.
내년 프로젝트도 우리 밀어준다고 하시고.
뭐가 답답한 거야?”
“모르겠어. 그냥···
뭔가 막힌 느낌이야”
“혹시 하팀장님이 했던 말 때문에 그래?”
“이런 기분 싫어서···
술 먹은 것도 아니고, 안 먹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거면
그냥 확 먹어 버리게···”
“하... 나도 술 땡기네.
나도 한잔 더할래. 같이 마셔도 되지?”
“뭐?”
“아우. 춥다. 들어가자”
정신이는 앞장서서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모님. 여기 이슬이 한 병 주세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온 우릴 보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니, 회식 마치시고 다 가신 거 아니셨어요?”
“거래처 분들 계셔서 안주도 많이 못 먹었지 뭐예요.
아까 그 해물찜 엄청 맛있던데. 작은 걸로 하나 주세요”
“아이고. 다시 오실 줄 알았으면
안주 남은 거 그냥 둘걸··· 싹 다 치워버렸는데···”
“따뜻한 걸로 새로 만들어 주세요.
내숭 떠느라고 많이 못 먹었어.
이모. 나 배고파. 잉”
정신이는 아주머니와 능청스럽게 대화를 마치고
나에게 술까지 따라주며 잔을 부딪힌다.
“최대. 짠”
“정신아. 너 괜찮겠어? 시간이 좀 늦었는데?”
“그러는 최대는?
혼자 술 먹겠다는 사람은 뭐 괜찮냐?”
“나는 뭐··· 남자기도 하고”
“아빠기도 하시거든요.
와이프 걱정하겠다. 연말회식 싫어할 텐데···
오늘 아침에도 한 소리 들었다면서.
괜찮겠어?”
“괜찮아. 태성이 형이랑 잘 알아서
좀 늦을 거라고 얘기해뒀어”
“최대 와이프는 좋겠다.
이렇게 듬직하고 자상한 남자랑
같이 살고 있다니. 어우. 부러워”
내 속도 모르고 와이프 얘기를 늘어놓는
정신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하팀장님. 오늘 좀 취하신 거 같더라.
최병재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하실까··· 어유···”
“에이엔 내부에서 얘기가 나왔다잖아”
“에이. 얘기가 나왔어도···
팀장님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최대한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뭐 있어?
본인도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얘기를 꺼내셨겠지. 내 촉은 그런데?”
“그런가··· 태성이 형도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난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정신이와 드라마 같은 비밀연애를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작은 상상마저도
무참히 짓밟혀버린 상황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엇. 해물찜 나왔다”
“아가씨 이뻐서 좀 더 많이 담았어.
많이 먹어요”
“어머어머. 아가씨라니.
이모님 비행기 너무 태워주신다”
“아가씨 아니에요?
많아야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헥. 이모님. 아니에요.
저 아줌마예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인데요”
“어머.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예요.
엄청 동안이시네. 부럽다”
아주머니와 정신이의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야. 최대. 안주도 같이 먹어.
술만 마시지 말고.
근데 저 이모 넘 오버 아니야?
나보고 아가씨라니. 히힛”
“너 그래 보여. 아가씨 같아”
“에이, 아니야.
아무래도 저 이모님이
나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차리시고
기분 풀라고 그러신 거 같다”
“너가 왜 속상해?”
“속상하지. 최대를 돌려보내야 하니까”
이번엔 정신이가 술잔을 홀로 비우며
한숨을 털어냈다.
“돌려보내다니? 어디로?”
“가정으로”
“무슨 말이야?? 가정으로 보내다니?”
“나 딱 세 잔만 더 먹고 얘기해도 돼?
맨 정신에 말을 못하겠다”
정신이가 말없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나 역시 술잔을 채우며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최대···”
“응. 말해. 듣고 있어”
“있잖아··· 내가 너를···
맘 속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놓아줘야 할 거 같아”
“니가 나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고?”
“회식자리에서 하팀장님 얘기하실 때
너 엄청 기분 나빠했잖아.
치··· 서운하게··· 막 너랑 나랑 그렇다니까
그렇게 싫었냐. 칫”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하는 정신이의
얘기에 난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니 아니. 난 기분 나쁜 게 아니고···
나는···”
“알아. 괜찮아.
하팀장님이 하는 말이나···
너의 표정을 보면서 느꼈어···
나에겐 이런 감정도 사치라는걸···
그래도 오늘은 올해 마지막 날이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래.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속 터져 죽을지도 몰라”
또 다시 내 심장은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 최대 좋아해.
음··· 남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어···”
“정신아···”
“너 기억나?
최대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 끝나고
최대가 나 참치 사준 날···”
“기억나지”
당연하지 정신아···
난 너와 있었던 모든 걸 기억해.
너의 말 하나까지도···
“나 그때··· 니가 너무 따뜻했어.
기대고 싶었어. 마치 내 남자 같았어.
어쩌면 내가 평생 그려보았던 이상형이
바로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상하고, 따뜻하고, 흔들림 없는···
그런 사람··· 그런 남자···”
정신이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떨어졌다.
난 정신이에게 휴지를 건넸다.
“왜 울고 그래···”
“그러면서···
우리가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되고···
아파했던 내 모습을 보며
최대 사무실도 내어주고···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집까지 데려다주는
너를 보면서···
난 매일같이 상상했다···
이 남자··· 갖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정신이의 말에
난 목이 타들어갔다.
손까지 벌벌 떨며 물 잔을 들이켰다.
“근데 최대.
내가 왜 속상한지 알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
들킨 거 같아서···”
“어? 너 어떻게 알았어?”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시작도 하기 전에
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어서···”
“야··· 최대.
너 뭐냐. 신끼 있나?”
정신이의 큰 눈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어차피 넘지 못할 선이라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결국 이런 얘기 들을 거였다면···
한번 넘어가 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병재야···”
“김정신. 내가 그랬다.
내가 널 좋아해.
아니··· 널 사랑하고 있었어.
널··· 처음 만나던 그 날···
마치···
천사를 보는 것 같았어.
그날부터 지금까지 뛰고 있네···
내···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어···”
정신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아···”
“어.. 말해···”
“우리···
선 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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