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5. 선을넘는 자들
정신이는 아무 대답없이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넘을 건데? 선?”
“난··· 정신이 니가 내 여자였으면 좋겠어···”
“선을 넘어보자며···? 그래. 어디까지 넘어볼까?”
“어?”
어디까지 넘어볼 거냐는 정신이의 말이 내 머리를 흔들었다.
선을··· 어디까지···
어디까지···
그래··· 맞다···
너무 충동적으로 내뱉어 버린 것이다.
불쑥 들어온 정신이의 고백에··· 난··· 그저 본능에 끌려 말해버린 것이다.
그냥 정신이가 내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었을 뿐···
그 다음은 생각해 본 적 없다···
난···
나의 침묵을 정신이가 깨고 들어왔다.
“최대··· 나 되게 어렵게 꺼낸 말이야. 너 좋아한다고 고백한 거···
내 진심을 무시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아니야. 정신아. 무시한 거 아니야. 나도 니 생각 오랫동안 했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생각했어··· 솔직히 그래. 그냥 나 혼자만의 상상이었으니까···
그 다음에 뭘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었으니까···
그런데 너가 날··· 좋아했다고 말해주니까··· 나도 고백한 거야. 나도 널 좋아한다고···
니 진심··· 무시한 거 아니야. 정신아”
“최대. 너도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아.
차라리 한번 자자고 해. 나 그렇게 비싼 여자 아니야
그게 더 현실적이지 않니?”
“야! 김정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순간 식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릴 주목했다.
난 재빨리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의 고갯짓을 전달했다.
주위 시선들이 분산되자 정신이가 혼을 내며 내게 속삭였다.
“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조용히 말 안해?”
“김정신. 내가 갖고 싶은 건 네 몸이 아니야···
너의 마음이지···”
“내 마음 가져서 뭐 하려고.
최대. 다시 잘 생각해 봐. 내 감정과 너의 감정은 좀 다른 거 같아”
“그럼 넌? 너의 진심은 뭔데? 뭐가 하고 싶었던 건데?”
“결혼”
“뭐?”
“난 말했잖아. 최대 너가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심이야? 나랑 결혼하고 싶어?”
“웅. 하고싶어. 근데, 못해”
“뭐야. 한다고 했다가 못한다고 하는 건?”
“난 지금 혼자야. 하지만 최대 넌 아니야. 그러니까 못해. 그래서도 안되고.
난 여기까지야. 괜찮아. 그래도 고백했으니까. 이걸로 충분해”
“난 안 괜찮아”
내 말을 들은 정신이가 피식 웃는다.
“풉. 웃겨. 안 괜찮으면 뭐? 어쩌려고? 최대, 넌 그런 사람 아니야. 끝까지 멋진 아빠, 멋진 남편 해. 넌 그게 어울려”
“나 사실···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뭔데 또?”
호기심이 발동한 듯 정신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사실은··· 내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우리 처음 만나기 하루 전날···
꿈에서 널 미리 만났어”
“우리가 만나기도 전에 내 꿈을 꿨다고? 그게 말이 돼? 말 좀 지어내지 마. 최대. 이게 취했네”
“지어내는 거 아니야. 진짜야”
“뭐야? 예지몽? 뭐 그런거야? 최대, 너 진짜 신끼 있어?”
“없어. 그런 거 없어. 근데 진짜 나왔어. 내 꿈에. 니가”
“뭐 어떻게 나오던?”
정신이는 아주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다.
“음··· 그게···”
“하. 답답해. 빨랑 말해. 속 터지겠어”
“그게 말이야··· 너랑··· 막···”
“막. 뭐? 뭔데?”
“그거 있잖아··· 남자랑 여자랑 자는 거···”
“섹스했다고?!”
갑자기 커진 정신이의 목소리에 내가 놀라 다급히 정신이의 입을 막았다.
“야. 조용히 말해. 다른 사람들 듣겠어”
“푸핫, 너랑 나랑 꿈에서 잤다고?”
“어··· 아주 격렬하게···”
난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진짜야? 너랑 나랑 만나기도 전에 꿈에 나왔다고? 그걸 믿으라고?”
“진짜야. 그래서 다음날 너보고 놀라서 얼었던 거야..”
“최대, 너 있잖아. 막 야동 보고 그러냐? 그런 거 많이 보면 꿈에도 나오고 그런다던데?”
“이씨, 아니라니까···”
“나 맞아? 확실해?”
“맞아. 아주 선명했어”
“신기하네. 니 꿈이 진짜라면 우리 자겠네? 예지몽이 맞다면?”
“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어 보여서 그런 건지···
정신이는 말하는 내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 언제 자?”
“김정신, 그만 좀 놀려”
“장난 아닌데. 진짜 꿈에 나왔다며. 우리 운명이네”
“그 후에도 또 꾸었어. 니 꿈을”
“또? 이번엔 뭐하디?”
“둘이 손을 잡고 꽃길을 걷는 꿈”
“우아. 우리 결혼하는 거야?”
결혼이란 생각은 해본적도 없지만
정신이와 만난 건 운명이라 믿으며 지내왔다···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았고
옆에 앉기만 해도 설렜고
같이 걸으면 마치 내 여자 같았다.
지켜주고 싶었고, 한 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었던 너···
“그냥 스쳐갈 인연은 아닌 거 같아. 분명··· 특별해... 나에게 너는···”
“야, 최대. 선수네 선수. 묘하게 사람 흥분시키네”
“나 지금 진지해. 자꾸 그렇게 놀리면 집에 간다”
토라진 내 모습에 정신이는 환한 미소로 날 쓰다듬어 준다.
“나 집에 데려다 줘”
처음이었다.
항상 내가 집에 데려다 줄 땐
미안해하고, 이제 데려다 주지 말라며
날 말리던 정신이었는데
처음으로 먼저 말했다.
집에 데려다 달라고···
“그래. 가자”
난 먼저 일어나 정신이의 손을 잡아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악수처럼
또다시 짜릿한 전율이 몸속에 퍼졌다.
식당 문을 열고 나서니 매서운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 눈 온다. 히힛. 아, 따뜻해”
정신이는 슬며시 내 팔을 감아 팔짱을 낀다.
택시를 잡으러 갈 때도
택시를 타기 직전까지도
정신이는 내 팔에 꼭 붙어있었다.
팔짱을 낀 채 날 올려다보는 정신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추운 날이지만 정신이가 있기에 전혀 춥지 않았다.
아. 팔짱···
이거 꿈에서 본 장면···
지금 이게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정말 예지몽이 맞아떨어지는 건가
엉겁결에 고백은 했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때마침 택시가 도착했고
우린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기사님, 마포에 진심아파트로 부탁드려요”
정신이가 다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꿈같던 일이 하나둘씩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정신이가 내 어깨에 살짝 기대며 입을 열었다.
“최대”
“응”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이 길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겠지만
같이 한번 가볼래?”
“난··· 가보고 싶어. 너랑 손잡고···”
내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어깨에 기댄 정신이에게 들릴 정도로
매우 크게 뛰고 있다.
정신이와 내가 만들어 가는 길
그 길의 끝
그곳은 분명 천국일 것이다.
꼭 그렇게 만드리라 다짐하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넘고 있는 선.
지금 잡고 있는 손.
아무한테도 들키지 마”
“절대로··· ”
들키지 않을게
그리고 놓치지 않을게
택시가 한참을 달리는 동안에도 우린 서로에게 기댄 채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택시가 어느덧 정신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하였고
아쉬움을 남겨둔 채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에이. 벌써 다왔네”
“그러게··· 춥다. 조심히 들어가”
“나야 뭐 이미 집에 왔는걸. 최대가 조심히 들어가야지”
“알았어. 조심히 갈게. 어서 들어가.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갈거야”
정신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저기 최대. 아니 자기야”
“어?”
자기야···
정신이의 입에서 자기야 라는 말이 나왔다.
내가 정신이의 자기···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순간
정신이가 내게 안겨 입을 맞춘다.
쪽
첫 키스···
정신이가 내게 준 올 한해 최고의 선물.
아··· 쓰러질 것 같다.
“도장 찍었다.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최대. 그런 줄 알아!”
“정···신아···”
“나 들어갈게. 자기도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사라지는 정신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미 출입문으로 들어가 정신이가 안보이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기···
내가 정신이의 자기···
정신이가 내 꺼··· 내 여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난 제자리에 서서 꿈속을 헤맸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서 정신을 못 차리던 그 순간.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뒤를 돌아보니 30대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잘 빼입은 정장 코트에 어울리지 않는 라면박스 하나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날 부른 건가?
“저요??”
“아, 네. 지나가다 우연히 봤는데 왕비랑 무슨 사이세요?”
“왕비라뇨?”
“아, 왕비라고 하면 모르시나?
아까 택시에서 같이 내린 여자요. 김정신이요. 김정신 또라이”
왕비? 또라이?
이 새끼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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