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6. 양아치의 제보
12시가 되어가는 늦은 밤이었지만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게 무슨 말이시죠? 또라이요?”
남자의 쓴 웃음이 보였다.
“음··· 그냥 모른척하고 갈까 하다가, 또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올 것 같아서 말이죠. 느낌이 싸해서”
“그쪽은 누구신데 이런 얘길 늘어놓는 거죠?”
남자는 들고 있던 라면박스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그년이 날 갖고 놀면서 몰래 빼돌린 내 물건이거든요. 수첩, 개인 서류··· 심지어 지갑까지 훔쳐가 날 뒤지고 이렇게 버린 거예요···. 약점 하나 잡으면 미친 듯이 공격하고 물어뜯는··· 하··· 좀비 같은 년!”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고 있었다.
혹시 이 놈이 정신이가 말한 술집 놈?
“자꾸 년년 하시는데 말조심하세요. 듣기 불편하네요”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목소리에 코트남은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아, 미안요. 정신이 좋아하시는구나?”
“그쪽이 전에 정신이랑 만났다던 술집 하는 분인가요? 정신이 협박했다는?”
“푸핫! 협박이요? 크크크. 왕비가 그러던가요? 내가 협박했다고?”
“죽인다고 했다던데?”
“아이고··· 말 지어내는 건 여전하네요. 내가 술집 하는 건 맞는데, 협박은 내가 당한 겁니다. 돈 갚아라, 당장 안 갚으면 죽인다 라고요. 내가 당했다고요. 내가!”
거짓말. 술집 양아치의 헛소리.
정신이를 입에 담는 저 더러운 입을 닫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피하자네 당했네 하는 건 오버 같네요”
냉소한 내 반응을 본 양아치는 예상이나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럼 알아서 잘 해보세요. 하···. 또 하나의 피해자가 나와버렸구나··· 아이고”
양아치의 비꼬는 태도가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정신이 집 근처에 왜 있는 거죠?”
“내 물건 찾으러 왔다고요. 왕비랑 겨우 연락돼서 물건 내놓으라고 했더니. 지네 쓰레기 장에 버려놨다고 찾아가라 하더군요. 크흣. 잘 해보세요. 이렇게 버려지지 마시고요. 훗. 갑니다”
양아치남은 다시 라면박스를 툭툭 정리하며 등을 돌려 걸어갔다.
뭐야? 저놈?
갑자기 나타나서 알 수 없는 헛소리나 늘어놓는
네놈이 또라이 아닌가?
유유히 걸어가던 또라이 놈이 갑자기 등을 돌려 소리쳤다.
“저기요! 나중에 제우스 한번 오세요. 남자가 오는 술집은 아닌데. 필요할 때 오세요.
아무래도 제 도움이 필요할 걸요? 큿. 강남 제우스 유명하니까 금방 찾을 거예요. 굿 럭!”
그럼 그렇지··· 미친놈이 확실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지가 하는 가게 영업을 끝까지 해대는 놈···
저런 놈의 말을 잠시나마 듣고 있었던 내가 한심했다.
잠깐만···
어? 제우스?
제우스 삼천만원?!
순간 정신이의 노트에서 봤던 메모가 불쑥 떠올랐다.
정신이가 권이사에게 당한 다음 날.
빈 사무실에서 홀로 정신이의 흔적을 찾으며 우연히 봤던 메모···
“저 잠깐만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다는 듯 양아치는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삼천만원이 뭡니까?”
“와··· 그것까지 얘기하던가요? 대체··· 하··· 진짜 알 수 없는 정신세계네. 캬”
양아치는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굳이 이런 놈에게 설명하긴 싫었지만 삼천만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혹시나 정신이가 어떤 약점이 잡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뇨. 아뇨. 들은 게 아니라 제가 우연히 메모를 본 거예요. 노트에 적혀 있길래···”
“아까 말했잖아요. 돈 안 갚으면 죽인다고 했다고요. 그거예요. 3천만 원”
“정신이한테 돈 빌리셨어요?”
“이걸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나도 이제 사모님들 모시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양아치는 코트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내게 명함을 건넸다.
“빌린 게 아니라··· 하··· 결국 빛으로 둔갑하긴 했는데. 이 얘기를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이제 가게 피크시간이라 가봐야 해서··· 어? 택시!!! 어이. 여기요!”
때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양아치는 서둘러 잡았다.
뒷좌석에 몸을 안착시키곤 창문을 열어 남은 말을 던졌다.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해요. 밤에 해야 돼. 밤에. 낮에는 내가 자니까”
손님을 태운 택시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
요란한 소음을 내며 출발했다.
양아치는 그런 택시안에서 고개를 내민 채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 여자 말 믿지 마세요. 다 거짓말이니까”
고약한 매연 냄새와 양아치의 더러운 미소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문제는 있는데 결론이 없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수법이다.
양아치는 혼자 횡설수설하다가 떠나버린 게 아닌가?
올해 가장 아름다웠던 마지막 밤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꽉 쥐어진 주먹엔 받았던 명함이 찌그러져 있었다.
강남 최고 호스트바 제우스
“더러운 양아치 새끼. 어디서 감히 입을 놀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과 함께 택시에 올랐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저런 놈을 왜 만난 거니··· 정신아.
저 양아치한테 얼마나 시달렸을까··· 그러니 니가 아플 만도 하지···
이제 넌 다른 남자 못 봐
내가 네 옆에 꼭 붙어있을 거니까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너의 손.
「국민 여러분. 1999년.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는 훌훌 털어버리시고
국민 여러분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겠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안에서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준다고?
나와 정신이의 새로운 출발도 응원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걷게 될 새로운 길을 모두가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만들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바람이 부는 데로 물이 흐르는 데로
그저 따라만 갔을 뿐이다.
내가 간 것이 아니라
운명이 온 것이다.
늦은 시간 덕분에 택시는 뻥 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렸고
집에 도착하니 화진이와 은아는 거실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난 이들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며 생각했다.
나의 새로운 시작은 그동안 지켜왔던 두 여자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걸 알지만 나의 새로운 운명을 거부할 수도 없다.
정신이와 우리 가족. 화진이 은아를 모두 지키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절대 들키지 않는 것뿐···
나의 사랑을 위해 난
완벽해져야 한다.
철두철미하게.
1999년 새로운 아침이 떠올랐다.
정신이와의 연애를 약속한 후 신정이 금요일에 걸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사흘의 연휴를 집에서 보내게 되어 화진이와 은아를 계속 마주해야 했다.
“떡국이네”
“응. 떡만둣국. 당신 좋아하잖아요. 오랜만에 집에서 보내는 연휴인데 따뜻한 거 먹으라고.
새해이기도 하고”
“그러게. 오랜만에 연휴네. 1월부터 바로 일이 시작될 거 같아”
“벌써요? 수원 프로젝트 마무리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바로 일이 시작돼요?”
“왜요? 바로 일 시작되면 좋은 거 아닌가요?”
난 일을 핑계로 화신이에게 밑작업을 깔아보았다.
“아니, 일이 많으면 좋은 건데. 난 당신 프로젝트 끝난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집에서 좀 쉴 수 있겠구나 생각한 거지. 그동안 계속 늦었으니까···”
“왜 안 쉬고 싶겠어. 나도 남들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사업을 막상 해보니 이게 만만치가 않아. 들어가는 고정 비용도 꽤 나오고. 사무실 임대료며 세금. 뭐 이것저것 참 많더라고”
“당신만 너무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거 같아서 내가 맘이 안 좋아”
“괜찮아.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거야.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지금 안주할 때가 아니라서. 일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생활이 안정될 거 같아”
사업을 시작하기 전, 에이앤건설 재직할 때부터 언제나 난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나의 모습을 활용한다면 정신이와 함께 있는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시작되는 지 물어봐도 돼요?”
화진이는 만둣국을 먹는 둥 마는 둥 애꿎은 숟가락만 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아마 지방이 될 거 같아. 부산이나 제주 쪽”
디테일 한 프로젝트는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최대한 먼 지역을 둘러댔다.
어차피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
“흐엑, 너무 먼 거 아니야?”
화진이가 너무 놀라는 모습에 나 역시 속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히 대답해줬다.
“원래 우리 쪽 일이 그렇잖아. 건설이라는 게 지방 사업이 많고. 특히나 나 같이 대기업 외주업체들은 지방 출장이 많더라고”
“아··· 그럼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어요?”
“상황에 따라서는··· 어쩌면 한 달 정도 숙소를 잡고 일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이 말은 즉흥적이었다.
처음부터 숙소 얘기는 생각지 않았지만
화진이가 받아들이는 분위기상 숙소를 잡고 일을 해야 한다는 좋은 핑계가 생각났다.
“너무 고생이다. 당신이···”
나의 즉흥적인 핑계를 화진이는 고생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미안한 감정을 이용하는 전략.
언젠가 협상의 기술이란 책에서 본 내용이다.
“올해 내 목표는 안정이야. 가족의 안정. 나 돈 열심히 벌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응. 고마워. 그래도 당신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나는”
오케이. 기준제시가 통했다.
제대로 식사를 못한 화진이를 다독이며 아침을 마무리했다.
정신이와 같이 있는 시간은 달리기 하듯 가슴 뛰게 흘렀는데
집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는 너무 무료하고 길기만 했다.
그렇게 느리게 흘러갔던 사흘을 겨우 보내고
드디어 정신이를 만날 수 있는 월요일이 되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정신이었다.
정신이와 함께 하는 진짜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영하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따스해 보였다.
출근길이 이렇게 설레고 아름다웠던가?
사무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계단으로 올라가다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 꽃잎들이 보였다.
웬 꽃잎이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천사가··· 여신이 서 있었다.
“정신아···”
“자기 왔어? 헤헷”
정신이는 매력적인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짧은 블랙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신님은 첫날부터 날 환상으로 밀어 넣었다.
“이 꽃은 뭐야? 옷은 왜 이렇게 춥게 하고 왔어? 감기 걸리는데”
여신이 한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어 준다.
“오늘부터 우리 그거잖아. 1일”
우리의 시작.
우리 둘만의 첫날.
“난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어떡하지”
정신이는 준비한 꽃을 내게 안겼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리시안셔스”
“리시안셔스···”
매력적인 향기가 코끝으로 흘러 들어왔다.
“꼭 기억해. 앞으로 나한테는 이것만 준비해주면 돼”
“꼭 기억할게. 리시안셔스”
“꽃 길 걷는 꿈 꿨다며. 그거 만들어 준거야”
그러고 보니 사무실 바닥엔 꽃잎들로 만들어 놓은 꽃 길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꽃 길은 사무실 현관에서 회의실까지 이어져 있었다.
예지몽···
정신이와 내가 걸었던 꽃 길···
그 꿈을 정신이가 만들어 주고 있다.
내 꿈속의 여인이었던 정신이가
내 현실의 여자가 되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꽃 길을 따라 여신은 회의실로 우리를 이끌었고
회의실 테이블엔 새하얀 생크림 케익과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와. 이건 또 뭐야. 케이크. 설마?”
“새벽부터 만들었어. 나 요리 잘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프로젝트 업무를 같이 준비할 때
정신이의 준비성에 항상 감탄하곤 했는데
나를 위해 이렇게 준비한 정신이의 정성이
나의 심장을 마구마구 흔들어댔다.
“촛불 불자”
정신이는 준비한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고
샴페인을 따른 술잔을 내게 넘겼다.
“샴페인 잔까지 준비한 거야?”
“당연하지. 난 어설프게 안 해. 하려면 제대로 하지. 자, 짠”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난 샴페인 한 잔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빈 속으로 타고 들어오는 샴페인은
비록 한 잔이었지만 나의 흥분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어머. 자기야. 그걸 한 번에 마시면 어떻게. 나눠서 마셔야지”
“어··· 긴장돼서···”
“우리 자기 더 흥분될 텐데”
“어?”
정신이는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무릎 위에 올라타 앉았다.
“저···정신아”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날 끌어안고는 귓속말을 전했다.
“보고 싶었어. 자기야”
“나도··· 죽을 뻔했어”
“그리고”
“어··· 그리고?”
“나 엄청 야해”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의 고동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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