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가 돌아왔다

‘..이런. 처음 봤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것 아닌가?’
[내가 처음 본 게 어때서! 그러니까 빨리 나 살린다는 셈 치고..]
‘어차피 그러지 않아도 갈려 했었는데, 왜 그리 호들갑이냐 이 말이다.’
[..으응? 그게 무슨 말이야.]
리암은 들러붙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트리암을 팔로 주욱 떼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내가 내 수호신의 말을 듣지 않을 리가 있겠나. 너의 말마따나 해야 할 것도 있고 아직 거기에 내가 필요한 존재들이 남아있어서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대체할 만한 존재는 없어 보이더군.’
리암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트리암에게 대답했다.
[..설마 나 일부러 놀린 거냐..?]
‘역시 똑똑하군. 이래야 우리의 수호신답지.’
리암의 웃음이 오늘따라 더 얄미워보이는 트리암이었다.
‘그래서, 안 보내주는 겐가? 나는 여기도 나쁘진 않아.’
리암의 미소에 트리암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것만 아니었어도 너랑 계급 떼고 싸웠을 거야. 가기나 해라.]
‘한번 붙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신과의 결투는 한번도 해보질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냥 빨리 가!!]
슈와아아악-
리암은 급격히 어딘가로 쏠려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트리암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흐음.. 현실에서는 지금쯤 다들 회복했으려나.’
리암은 빨려가는 와중에도 자신보단 자신의 주변에 있던 형제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뭐, 괜찮겠지.’
리암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한편. 병실에는 깊은 밤의 시간이었던 탓에 아무도 없었다.
움찔-
“..흠.”
리암은 오랜만에 느끼는 어색한 자신의 목소리에 헛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꼼지락-
“뭔가 감각이 이상하군. 이래서야 여기가 트리암과 있던 공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야.”
리암은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나 몸을 쭈욱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
“흐음..근육이 생각보다 많이 빠진 기분인데, 아무래도 꽤나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인가.”
리암은 홀쭉해진(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어보이긴 하지만) 자신의 허벅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시 운동을 하며 체력이랑 근육을 회복해야겠어. 일단..”
리암의 눈에 들어온 밝은 달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몰래 산책이라도 나가볼까.”
리암의 입가에 장난 가득한 미소가 품어졌다.
“흐아암..”
강북 지부 외부를 순찰하던 초소병 중 하나가 하품을 길게 하고 있었다.
“야. 뭐 재밌는 일 없냐?”
“딱히 없어. 지금 간부님들이랑 모두가 리암님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 뭐.”
“하긴, 그동안 우리에게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기다리는 게 정상이긴 하지.”
“나도 빨리 리암 대장 깨어나서 지난번처럼 막 전투하고 그러고 싶다..”
“야 인마. 넌 나간 적도 없잖아.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말이 그렇단 거지, 뭐 말도 못하냐?”
그들은 티격태격 거리며 밝게 뜬 달 아래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하아.. 얼른 깨어나셨으면 좋겠다.”
그들이 말하려던 그 순간.
샤샥-
“..응?”
“어라? 방금 저거.. 뭐냐.”
그들의 주변에 있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주변이 긴장으로 감돌았다.
“너도 봤지? 방금 움직이던 거.”
“그래. 나도 봤는데.. 이거 신고해야하는 거 아니냐? 혹시라도 적들이 들이닥치는 거라면 우리만으로는 안 될텐데..”
그들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선 채로 천천히 수풀을 향해 걸어갔다.
꿀꺽-
그들의 침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로 크게 삼켜지며 점점 호흡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흐아!-”
후웅-
초병들은 근처에 다가감과 동시에 창을 내려꽂았다.
팍-
“..어라?”
그러나 드러난 수풀 속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두 개의 창만이 바닥을 찍고 있었을 뿐.
“..뭐지. 방금 우리가 확실하게 본 거 맞는 거 아니냐?”
“그랬지. 방금까지만 해도 우리가 움직이는 걸 봤는데..?”
바스락-
“으..으아아아!!”
“지원!! 지원 불러와!!”
그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창도 회수하지 못한 채 본부를 향해 뛰어갔다.
파스락-
“..이런, 이래서야 기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은 조금 무리겠는걸.”
수풀 사이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리암이었다.
“거기다 자신에게 있어 목숨같은 무기들도 여기에다 다 버려두고 왔단 말이지..”
리암은 창들을 회수한 다음 다시 나무를 타며 올라갔다.
“안되겠다. 내일이 오기 전에 잠시 교육 좀 시켜줘야겠어.”
리암의 입가에 싱글 생글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기입니다!! 여기에..”
잠시 뒤, 보초병들을 포함한 이삭과 정훈이 밖을 나와 리암이 있었던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영준이 주변의 수풀들을 헤치며 뒤져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저희가 진짜로 본 거라니까요?”
“너희 여기서 자다 걸린 거 아니냐? 아니면 뭐 동물이라던지. 사람이 여기서 돌아다녔다면 어떠한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정상인데 여긴 아무것도 없다.”
이삭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보초병들을 나무랐다.
“너희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한 수색을 하고 심지어 새벽에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것도 모자라 무기를 잃어버리기까지 해버렸다. 어떻게 책임-”
쐐애액-
카앙!-
“흠?!”
그 순간 이삭을 향해 날아온 창이 조리악의 도움으로 막혔다.
“흐음.”
조리악은 땅에 박힌 창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이거 참.. 아무래도 보초병 형제들에게 벌이 아닌 상을 줘야 하겠는데.”
조리악은 붉은 두 눈을 빛내며 수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스칼.”
“응?”
“추격한다. 따라와.”
타앗-
조리악은 모두가 말릴 틈도 없이 도약하며 수풀 사이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라스칼 또한 속도를 높이며 그의 뒤를 밟았다.
“..흐음.”
이삭은 땅에 떨어진 창을 줍더니 보초병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희 둘 중 하나의 무기는 돌아왔네. 이러면 헛수고한 것은 아니겠다. 어차피 추격은 저 둘이 갔으니까 안심해도 될 거야.”
“진짜 있었는갑네.”
영준은 혀를 내두르며 놀란 표정의 보초병들의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춥다.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지부 안 입구를 향해 들어가며 지부의 문을 닫았다.
쾅-
한편, 그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은 채 의문의 존재와 치열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콰직!-
“이번에도 안 맞은 거냐!!”
조리악이 날린 도끼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의문의 괴한이 보라는 듯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더욱 깊이 들어갔다.
“라스칼! 양동 작전이다! 찢어지자고!”
“알겠다!”
타탓-
둘로 나뉘어진 전사들의 압박이 강화되자 의문의 존재 또한 그것을 의식한 듯 나무 사이를 타던 것을 멈추고 뛰어내리며 수풀 사이로 숨었다.
“이런!”
촤르르르-
라스칼이 리암의 쇠사슬을 이용해 나무를 타고 내려오며 추격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 보게.”
두 형제를 따돌리려던 리암은 자신의 쇠사슬이 라스칼에게 가 있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내 물건을 가져가서 그렇게 냅다 써대고 있단 말이지?”
리암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우리 형제들에게도 제대로 된 추억을 선사해줘야겠군.”
리암은 그렇게 말하며 도망가는 것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라스칼!! 저 녀석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필요하면 우리 쪽에 영입해야해!”
“말 안해도 그런 것 알고 있다고!”
촤르르르!-
“이런. 조심해야지.”
팍-
라스칼의 손에 들린 쇠사슬이 사납게 날아가며 리암의 뒤통수를 노렸으나, 말도 안 되는 반사신경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대체 어케 되먹은 놈이야? 이걸 피하다니..”
라스칼은 쇠사슬을 회수하며 급히 리암의 뒤를 추격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은 나름 나와 오랫동안 살아온 사이가 아닌가? 왜 나라는 것을 인지를 못하는 것 같지..”
리암은 추격을 따돌리던 중 갑자기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헉..허억! 저 개자식 왜 저렇게 빠른 거냐..! 리암이 전력으로 질주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 속도잖아..?”
조리악은 힘이 받치는 듯 경이로운 속도에 감탄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라스칼!! 어떻게든 녀석을 붙잡아야 한다!!”
“야 인마!! 네놈이 나보다 더 체력이 좋다고 할 땐 언제고 먼저 지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어쩐지 시작부터 빠르게 달린다 했다!”
라스칼은 조금씩 멀어지는 조리악에게 신랄하게 쏘아붙이며 리암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흠..”
리암은 멀어진 조리악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나중에 돌아가면 조리악은 나랑 같이 훈련을 좀 해 놔야겠어. 어떻게 된 게 내가 있었을 때보다 훨씬 체력이 안 좋아졌냐 저 녀석은.”
“흡-”
파앙!-
그러고는 던지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창을 조리악을 향해 날린 뒤 그대로 뒤를 쫓아오던 라스칼에게 돌진했다.
“뭐.. 뭐야!?”
라스칼은 추격하던 것도 멈추고 순간 당황한 채로 리암을 맞이했다.
“리..암?”
파앙!-
두 사내가 서로 부딪히며 수풀 사이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크으..! 내가 잘못 본 건가?”
라스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으나, 이미 리암은 다시 도망친 이후였다.
“뭐야. 놓친 거냐?”
그의 옆에는 어느 새 호흡을 회복한 조리악이 창을 흔들며 다가와 있었다.
“그래. 조리악 네 녀석이 냅다 지치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잡을 만 한 정도였다고.”
“어쩌겠어. 난 리암을 간호해주느라 체력이 많이 빠진 것을.”
조리악은 끌끌 웃으며 라스칼과 함께 복귀했다.
“..생각해보니 저 녀석, 리암을 닮은 거 같았어. 아까 나한테 돌진해오던 모습이 진짜 비슷했다니까.”
“리암은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데 대체 어떻게 할 수 있겠냐..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그런 농담은 좋지 않아 라스칼.”
“진짜라니까..!”
“그래그래. 진짜라고 믿어줄게. 정 그러면 내일 일어나자마자 가서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나.”
“에이 진짜라니까..!”
라스칼과 조리악이 티격태격 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리암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슬슬 들어가 볼까. 지금이 아니면 들어갈 타이밍도 잡기 힘들어지겠어.”
탓-
그렇게 밤의 작은 소동은 끝이 났다.
다음날 아침. 리암의 병실 앞은 매우 소란스럽게 북적이고 있었다.
“비켜봐! 확인할 게 생겼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지금 들어가셔도 딱히 뭐 없다니까요? 대체 왜 그러시는지-”
병실 앞에서는 조리악과 라스칼이 의료진들을 뚫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 애를 쓰고 있었다.
콰앙-
“내 형제를 내가 보겠다는데 대체 무슨-”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엎어진 그들은 고개를 들어 리암의 병상을 쳐다봤다.
“뭐야. 없잖아..!”
“뭐?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없으면 안 되는데..?”
그 말을 들은 규호가 서둘러 들어와 주변을 파악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군. 형제들은 병상만 보는 건가?”
“..어라?”
그들은 모두 눈을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다.
“음.. 다들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보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데 말이지..”
창문의 위, 정확히 말하자면 창틀 밖 테라스에서 햇빛을 쫴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거한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리암..님?”
“리암? 진짜 깨어난 거냐? 진짜로?!”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 테라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래. 너희들의 대장이자 족장인 리암이 돌아왔다.”
햇빛에 반사된 리암의 미소가 더욱 빛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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