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태신교 정복기(완)

“..자네 혼자만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꽤나 위험한 것 아닌가.”
“제가 그런 보험도 들어놓지 않고 온 거겠습니까. 발밑을 봐 주시면 이해가 되실 텐데요.”
리암이 그의 말을 따라 자신의 발밑을 쳐다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폭탄들이 통으로 이뤄진 유리바닥 밑으로 잔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아무리 당신이건 뭐건 살아남기도 힘들 겁니다. 그리고 리암 당신의 팔을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꽤나 남은 시간이 없다구요.”
리암은 자신의 팔에 보이는 푸른 자국들을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이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네. 물론 지금 머리가 살짝 멍해지긴 했다만.. 너를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이 되질 않아.”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리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을 유념하시죠.”
멈칫-
사내의 목을 향해 다가가던 두꺼운 손이 교주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리모콘을 보며 멈췄다.
“..꽤나 영리한 전략을 세웠군. 일부러 이렇게까지 해서 날 기다린 건가?”
“물론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 겁니다. 예상은 했지만 저 아이가 저희를 배신할 줄이야.. 바이사께서 많이 슬퍼하시겠군요.”
교주의 말에 사내가 뒤집어쓴 로브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것이 대체 뭐지? 그런 게 없다면 이렇게까지 우릴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사실 제가 온 것에는 총 두 가지의 이유가 있긴 합니다. 첫째는 아까 말한 저 아이의 배신 유무이고..”
교주의 눈이 가늘어지며 리암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저희 교단에서 제일 유능한 아이로 손꼽히던 중혁이를 데려간 것. 그 아이를 돌려받으려고 협상테이블을 준비한 건데요.”
“정작 그 주인공은 당신의 기지 본부에 있으니 아쉬울 수밖에.”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제가 모르는 게 있겠습니까.”
탁-
사내는 발걸음을 옮기며 조금 전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말하는 것을 하나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보는데 말이죠.”
“그게 뭔지를 말해라. 시덥잖은 내용이라면 내가 폭탄들을 다 터트려버릴 테니까.”
리암은 발밑에 보이는 수많은 폭탄들을 가리키며 사내를 노려봤다.
“이거 참..무서운 말들만 하시면 제가 겁먹고 도망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소파 옆에 놓인 책상에 있던 커피잔을 들어 올린 뒤 그대로 한 번에 삼켰다.
“크..역시 이런 건 한 번에 마셔줘야 좋단 말이죠. 한 잔 드시렵니까?”
“난 됐다네. 그보다 빨리 계획이나 말하는 게 좋다고 보는데, 내 형제들도 지금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려 하거든.”
리암은 움찔거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경련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 팔, 제 제안에 응하신다면 제가 치료제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즉시 이 한국이라는 땅에서 물러나도록 하죠.”
“그래서 그 제안이 뭐란 말인가.”
리암의 눈빛이 점차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단순합니다. 저희의 인원들이 전부 모여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이곳이 당신의 구역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저희도 여기서 철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대로 가다간 다 멸망할 것 같으니까..”
사내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 하더니 이내 원래의 미소를 유지하며 돌아왔다.
“아무튼, 그것이 제 제안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
사내는 폭탄으로 가득 찬 바닥을 발로 톡톡 쳐대며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정말 그것 말고는 없는 겐가?”
“제가 말하는 것은 절대로 지키는 편인지라. 일단 여기 해독제부터 받으시죠.”
휘릭-
텁-
“...”
리암은 자그마한 병에 담긴 하얀색의 알약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혹시 약의 성분을 의심하는 것이라면 안 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제가 다 먹어본 것들이라서요. 마찬가지로 지금도 먹는 중이라.”
사내는 자신의 손에 리암에게 건넨 것과 같은 알약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
“리암 당신이 맞은 것은 제 피입니다. 특이하게도 제 피와 음식물들을 섞으면 마비독으로 변하더라고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질 모르겠지만..”
“덕분에 전 매일 약을 달고 살기 때문에 걱정 안하셔도 괜찮단 말입니다.”
꿀꺽-
리암은 그의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은 채 약을 삼켰다.
“오,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의심도 안하고 삼키신 겁니까?”
“네놈의 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절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지. 덕분에 몸이 나아지는 기분이군.”
리암은 약을 먹자마자 퍼지는 안정적인 기운에 꽉 붙잡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제 제안은 만족하시는지?”
“만족이고 뭐고 할 것이 없다. 내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만 그런 게 존재하지 않으면 된다는 게 내 입장이니까 말일세.”
리암은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럼 악수라도 해주시렵니까. 저희의 제안이 확실하게 통했다는 것을..”
“아쉽지만 자네의 손에 달린 그 자그마한 바늘들을 뺀다면 악수를 해줄 수 있었을 거라네.”
“..이런.”
리암은 손가락을 가리켜 사내의 장갑의 손바닥 부분에 있던 바늘들을 보며 웃었다.
“이런 식으로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이 흔하진 않았던 건가? 꽤나 익숙하게 물어보는군.”
“원래 이런 세상이지 않습니까. 살아남으려면 제가 어떠한 방법을 불사해서라도 저희 교를 위해 지켜야 할게 많은지라.”
사내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리암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젠 볼 수 없겠군요. 저희가 신속히 떠날 시간들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오히려 나야말로 자네들을 너무 없에고 다닌 것이 아닌지 미안해지는 기분이로군.”
“그럴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모두 바이사께 원하는 대로 올라갔을 테니까요.”
왜인지 모르게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사내는 손뼉을 치며 그들의 있던 공간의 한켠에 마련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 같이 가실 거면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희가 가는 길이랑 리암 씨 당신과 같은 길을 가긴 해야 하니까요.”
“사양하도록 하지. 나는 여기서 조금 할 일이 생긴 기분이라서.”
“원하신다면야.”
사내는 통로를 향해 걸어가던 중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참고로 그 폭탄들은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다 제거도 해놨으니 큰 문제도 없을 거고요.”
“그럼 이만.”
뚜벅- 뚜벅-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통로를 지켜보던 리암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제 우리도 시작하지.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여기에 필요한 동력원이 있다고 했지?”
“예. 맞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가주셔서 다행이지만.. 제 실험실이 위험한데요..”
사내는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의자와 책상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넓은 공간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찾아다니던 그들의 눈에 뭔가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이거..아무래도 뭔가 나만 이상함을 감지한 게 아닌 기분이로군.”
그들은 점차 범위를 좁혀가며 하나의 지점에 모이게 되었다.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다 싶더니만..”
모두가 모인 곳은 다름 아닌 사내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
“..근데 여기로 왜 모이신 겁니까?”
오직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만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리암 일행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곳이 뭔가 이질감이 들질 않나? 이렇게 넓은 곳 중에서 오직 여기에만 가구가 있다는 게 말이야.”
“단순한 걸 좋아했던 게 아닐까요..?”
“그런 거라면 애초에 평범하게 했겠지. 그런 것 치고는 너무나도 의도적인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걸 제외하면 많은 동력원을 숨겨놓을 만한 곳이 없다네. 분명 이것 안에 뭔가 장치가 있을..”
주변을 살펴보던 리암의 눈에 이채가 감돌며 미소가 떠올랐다.
“빙고.”
끼리릭-
즉시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돌린 그 순간.
쿠웅!--
“뭐..뭐야?!”
당황한 얼굴의 사내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예견이라도 한 듯 평온한 얼굴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천천히 관람했다.
“오호..이렇게 변하는 거였나. 꽤나 신기한걸.”
리암조차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안의 구조를 쳐다보며 순수한 감탄을 흘렸다.
“심지어 이 폭탄들이 모두 가짜였다는 건 너무나 충격적인데. 이 녀석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둔 건가?”
라스칼은 통유리로 된 바닥의 밑에 보이는 거대한 전선들을 쳐다보며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애초에 놈의 손에 들려 있던 리모콘에서는 불빛이 나질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 녀석이 건네주는 해독제를 위해 장단에 맞춰준 것이고.”
리암은 침착한 모습으로 바닥에 쇠사슬을 칭칭 감은 손을 가까이 댔다.
“흡-”
콰앙!-
곧이어 유리가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의 유리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의 족장이로군. 한 방에 이정도로 박살을 내버릴 줄이야.”
조리악은 순수한 감탄을 흘리며 리암이 박살을 낸 유리들의 위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이걸 부수면 되는 거겠지?”
“그래.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잘 아는군.”
“..저게 뭐 하시려는 건가요? 굳이 위험하게 저기로 가시는 이유가..”
리암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에게 말했다.
“아, 자네에게 말해야 할 게 있었군. 이미 라스칼은 눈치를 챈 것 같네만...”
리암은 사내를 붙잡으며 덧붙였다.
“이제부터 충격에 주의하게. 꽤나 흔들릴 테니까.”
“예? 그게 무슨-”
쿠웅!-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조리악이 힘차게 뛰어올라 그대로 체중을 실어서 금이 간 곳을 내려찍었다.
“..어라?”
쩌어억-
“우리가 생각한 게 이 결과라네.”
리암의 미소와 함께 그들이 있던 공간의 유리가 완전히 박살나게 되며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하!! 재밌잖나 이거!”
“마치 예전에 협곡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로군!! 최고잖아!!”
-끄아아아아아아아!-
단 한명을 제외한 채 모두의 텐션이 잔뜩 올라간 채로 밑으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한편, 약한 전등 불빛 아래를 걷던 정장을 입은 사내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비쳤다.
“..결국 그들은 밑으로 갔나 보네요.”
“예. 방금 들려온 진동소리와 그런 것들을 미루어 볼 때 확실한 것 같습니다.”
“분명 저 밑에 여기의 동력원이 있었죠?”
“예. 하지만 교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단 심문관들 또한 거기에 배치해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교주의 발걸음이 더욱 산뜻해졌다.
“좋아요. 아주 좋아.. 바이사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먼저 간 저희 형제들도 기뻐하겠네요.”
그는 손을 마주잡은 다음 희미한 전등에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도 못 들을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린 뒤 기도를 마쳤다.
“이제 이동하죠. 저희도 그들이 시간을 벌어줄 동안 이동은 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
“흐아아아아악!!!”
“흐음.. 떨어지는 것인줄은 알고는 있었다만.. 이렇게까지 많이 갈 줄은 몰랐는데.”
리암과 나머지 일행들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끝없이 나오는 공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리암. 이대로 가다간 내려가자마자 온몸이 망치에 깔린 제국군 놈들마냥 으스러지겠어.”
“흐음..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누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의견 가진 사람 있나?”
리암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 작가의말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수로 시간을 잘못 설정하고 올렸네요..진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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