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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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씨···! 그게 내 잘못이냐???"
태식이 겨우 욕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이다.
"아니···. 멍청한 놈아, 좀!"
"니가 말을 그렇게 막 하니까 그렇게 나오지!"
그러나 태식의 분노와는 달리, 친구들은 낄낄낄 웃어대면서 말한다. 마치 '맞어, 너는 거기서 참을 놈이 아니지'라는걸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식은 신나게 웃어대는 친구들이 조금은 얄밉긴 했지만, 괜스레 화가 풀리고 표정이 밝아졌다.
태식이 술잔을 꺾으며 짜증을 내는 이유. 다름아닌 직장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 서류란 것을 작성해 보고 직장을 얻어 일을 다니게 됐을 때는, 자랑할 것 없는 본인을 받아주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끔 사람들이 말하는 ‘직장 스트레스’는 그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나, 근성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불평 정도로 치부했다. 본인 역시 사회 초년생으로서 직장에 적응해야 하는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그 이유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업무량은 넘쳐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야근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피로하게 했다. 거기에 상사와의 관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퉁명스럽게 투덜대는 모습, 이해 못 할 기괴하고 늙은 농담, 자신의 일을 떠넘기기는 기본, 본인이 가르치지 않아 막내가 저지른 실수를,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모습까지. 인터넷에서나 보던 ‘썩을 상사’ 그의 눈앞에, 그것도 상사로 있던 것이다.
“할 만하다며.”
“내가 그랬어? 그럼, 그때의 나를 죽이고 싶다!”
“킥킥킥. 됐어! 한잔해!”
그렇게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 폭발할 때쯤, 항상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져 해소했다. 오늘은 무려 상사에게 대들어 버린 이야기다. 그 썩을 놈의 비아냥에,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해, 크게 짜증 내며, 말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멍청하긴. 내일부터 어떻게 얼굴을 보려고 그래?”
“몰라!!”
“으이구, 태식아. 너 성격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그 앞뒤 안 가리고 한 마디 내던져 버리는 거. 그것 좀 관둬라.”
“맞어. 내일부터 안 나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주제에! 큭큭큭.”
“야, 야! 늬들 같았어도 화냈을 거야!”
태식이 술기운에 화를 내며 친구들의 말에 반박해 보려 했지만,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뛰쳐나가 다른 회사를 다니겠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
고졸에, 특별하게 배운 것은 없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한 적도 없었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잠시 그림을 그려본 적은 있지만 금방 포기했다. 요리사가 되겠다는 생각에 잠깐 요리학원을 다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은 넘쳐났지만, 막상 시작한 일은 쉽게 관두기 일쑤였다. 일을 벌이다가도,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스스로 재능이 없다며, 온갖 핑계로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그것조차 힘들어졌다. 나이는 점점 들기 시작해 주변에선 ‘아직도 공부하고 있냐.’ 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고, 몇몇 동창은 승승장구하여 어디선가 잘나가고 있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날이 기울어져만 가는 집안을 세우기엔 당장 무엇이든 일을 해야 했다.
"태식아! 큭큭... 그래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친구 중 한 놈이 씩씩대는 태식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놈도 재작년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더니 표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
"그러게, 태식아, 나도 그래. 하하···."
딴 친구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 친구도 작년부터 일을 다니더니 얼굴빛이 많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그래···. 하···.”
“요샌 진짜 그냥 일 다니는 기계인 거 같다···. 돈 때문에 미치겠어! 아주."
또 다른 친구가 말한다.
"그래···. 돈."
네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지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야 근데 태식아! 너 돈 벌어봤자 현질 하는 거 아니냐?!"
한 놈이 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낄낄대며 말한다.
"아니! 진짜 헛소리하지 마! 집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요샌 현질 안 한다고!"
태식도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 얼른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올! 태식이 철 좀 들었는데!"
딴 놈이 낄낄대며 이야기하자 또 딴 놈이 말을 이어간다.
"아니, 근데 태식이. 아직 애들 같은 거 보잖아."
“참 나! 만화 좀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태식이 부끄러운 듯 살짝 발끈하며 대답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느끼고 있던 감정, 얼마 전 이대로 나이만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들킨 것 같았다. 그러나 술잔은 끊임없이 기울여지고, 어느새 술에 취해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져갔다.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남긴 배웅 메시지가 몇 개 남아 있었다. 만취 상태에서 인사까지 했다니, 술에 취해 또 실수를 저질렀을까 봐 걱정이 앞섰다.
태식은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곤 묵묵히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그저 또 한 번의 무의미한 하루가 끝나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어느 정도 술이 깼을 즈음, 머릿속은 다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떠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나이만 들어가는 자신이 점점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 스며들고 있었다.
직장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이대로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병신같은 회사···. 그만두자니 배운 것은 없고, 이제는 나이만 들어간다는 생각에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라고 말하지만, 태식에겐 그 ‘기술’이란 단어조차 멀게만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돈을 모으라는 조언도 그저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망할···. 모이기는 개뿔, 집에 당장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큰데···.”
“.......”
“커허헣!”
혼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주변에서 본다면, 술에 취한 놈이 혼자서 길을 걸으며 불평하는 모습이 얼마나 추해 보일지 생각하니 더 튀어나왔다. 독립하겠답시고 혼자 살기 시작한 이래, 그의 혼잣말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항상 이렇게 취한 와중에도 집은 잘 찾아왔다. 그리곤 익숙한 동선으로 옷을 집어 던지며 화장실로 향했다.
“암! 나갔다 왔으면 샤워는 해야지!"
혼자 사는 집. 취기에 젖어 그 누구도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노래까지 불러대며 샤워했다. 언제나 몸은 깨끗이. 그리곤 대충 몸을 닦고서 침대로 몸을 던져버린다.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서둘러 잠을 청해야 했다. 벌써 11시가 넘었고, 태식은 내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지쳐갔다. 내일도 어김없이 출근해야 할 테니, 지금이라도 얼른 잠들어야 조금이라도 덜 피곤할 것이라는 현실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정신 나간 놈들! 일요일에 만나자니···.”
"에이···. 얼른 자자."
혼자 궁시렁대며 눈을 감았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느낌이 기분 좋다. 취기도 제대로 올라 세상모르게 잠이 들것이다.
눈을 감는다.
그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태식이 하루를 마감하는 날. 그날 무슨 일이 있건, 항상 잠들기 전에 하는 것이다.
그저, 잠들기 전까지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었다. 현실 속에선 이리도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이었지만, 상상 속, 판타지 세상에서의 자신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모험가가 돼보기도 했으며
용사가 되어, 사악한 자들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주변의 일을 멋지게 해내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미녀들에게 인기도 많은···. 그런 흠집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지금의 삶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일까.
아니면 자신감 넘치던 스스로가 그리워서였을까.
확실한 건 태식은 지금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얼굴, 머리, 몸. 그리고 재력.
무엇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태식은 그렇게, 언제나 자기혐오에 빠져들며 잠에 들었다.
삐 비비비 비비빅
듣기 싫은 알람에 눈이 떠지는 아침이다. 찌뿌드드하게 눈을 뜨며 그가 느낀 유일한 감정은, 그저 또 하루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으으... 오늘도 출근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아니, 지난주에 대들었던 상사와 일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넸지만, 상사는 마치 태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는 고개를 돌려,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나가버렸다.
“어우! 망할 놈, 저거···.”
그런 상사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에휴! 저런 놈 만난 것도 못난 내 잘못이지!”
태식은 자신을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이젠 익숙하다. 어쩌면 자신이 더 나았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일을 혼자 했는데 더욱 빨리 끝난 것일까. 상사가 하루 종일 그를 무시하며 지나갔기 때문일까? 맞아, 그 덕분에 일이 더 순조롭게 흘러간 것 같았다.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니···. 태식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정시 퇴근이 이리도 행복할 줄이야. 자신의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온 태식은 언제나처럼 또다시, 혼자만의 조촐한 연회를 가지기로 했다. 맛난 배달 음식을 시키고, 어느새 캔 음료수보다도 싸진 막걸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흐흥~ 흠 흠 흐음~ 어?! 아! 뭐 하는데 정신 못 차리나 태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쁜 마음에 풀어진 것일까. 한창 샤워를 즐기던 중, 갈아입을 속옷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다 씻을 때까지 모르다니. 괜스레 혼잣말로 스스로를 꾸짖는다.
“에이씨! 그냥 나가야지 뭐”
물기를 닦으려면 방안 쪽까지 뛰어가야 한다. 알몸으로 집안을 뛰어다니게 생겼지만 혼자 사는데 못 할 것 없지. 알몸으로 후다닥 화장실을 나오려던 태식은 느닷없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마치 연극 배우처럼 화려한 동작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야 할, 거실의 탁자 앞에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어?!"
태식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자연스럽게 나온 외마디 비명이었다. 태식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좁은 방 하나짜리 집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탁자에, 누군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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