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그리고, 인생 첫 데이트] 2

* * *
노랗게 물든 숲 속의 어느 오르막길. 막사 밖으로 나온 이리곤과 바실리아가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분명 폐하께서 저를 이 직책으로 추천하신 거겠죠.”
나긋한 목소리로 이리곤이 말하자 그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보좌관을 정하는 일은 폐하께서만 할 수 있습니다. 군단장부터 저 같은 부장의 인사에 관련해서는 폐하의 말이 절대적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연히 폐하께서 저를 추천한 게 되는 겁니다.”
“아, 그런 거였군요. 그래서 저를 따로 부르지 않고 회의에서······.”
이리곤은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가 맡은 일은 사령관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힘들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예? 정말로 그런가요?”
“일을 떠넘기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지요. 예를 들자면, 폐하의 신임이나 명성 같은 겁니다.”
“......”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신임과 명성이 뭐에요?”
“네?”
“부, 분명 배운 단어이긴 한데, 어떤 상황에서 쓰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아······.”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바실리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임과 명성은 앞으로 천천히 쌓아나가실 거니 의미도 천천히 배워가면 되겠죠.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저 앞에 있으니까요.”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절벽 앞. 절벽 끝에 서서 바라본 풍경에는 평지 위에 커다란 성 하나가 있었다.
“저 앞에 있는 성이 바로 ‘신(新)미케네’ 입니다. 혹시, 보고 받은 내용과 다른 점은 없습니까?”
“그런 것 같진 않아요. 듣던 대로 견고한 성이군요.”
“긴산이 군대를 정비하는 기간 동안 예상보다 빠르게 물자를 모아 두어서 내부는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배는 견고할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며칠 안에 돌파 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고, ···겨울까지 시간을 끌었다가는 적의 지원군이 우리를 역으로 포위하는 상황에 처해지거나 물자 부족으로 군단이 해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4달 안에 성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는 거죠.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따로 생각해본 해결책도 있고요.”
이리곤은 그녀의 ‘해결책’이라는 말에 의외라는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성벽을 돌파할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성 외부에서 할 수 있는 공격은 전부 시도해 볼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와 마주 보며 말했다.
“달릴 겁니다!”
* * *
첨벙 첨벙.
수심이 낮은 개울가로 내려온 하림이 쪼그려 앉은 다음, 두 손으로 물을 가득 떠서 박박 세수했다. 그 다음에는 바지 까지 적시며 무릎 꿇어서 머리를 물속으로 풍덩 집어넣었다. ‘그릉 그릉’ 구슬 굴러가는 소리와 비슷한 물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미지근한 물 온도가 닫힌 눈꺼풀을 부드럽게 만지는 느낌에 눈을 뜬 순간, 어떤 이물감이 느껴졌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 밖으로 머리를 뺀 그의 눈에 개울가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
물에 비친 자신의 머리, 그 위에 하얀 꽃이 올라가 있었다. 손으로 떼서 자세히 보니 데이지였다. ······삐죽 삐죽 나있는 꽃잎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사랑스러움 뽐내듯이. 그 모습에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하림은 그 하얀 데이지를 꼭 쥐고, 온 힘을 다해 던져버렸다. 물론, 꽃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2미터도 못 날아가고 다시 개울가에 빠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서 수면 위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 뒀다.
“분명 피 냄새가 조금 나는데.”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피 특유의 쇠 냄새가 약하게 나마 났다.
고개를 돌려 상류 쪽을 본다.
개울가에 피가 섞였다면 상류 쪽에서 섞여서 내려왔을 것이 분명할 터. 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작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예상대로 물색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물속에는 더러운 찌꺼기 같은 것들도 피와 함께 떠내려 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걸어가자 어느 순간 핏물의 시작지로 보이는 하수 배출구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허리를 숙여서 들여다본 내부는 하수구답게 어둡고, 더럽고, 냄새났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다.
“이거, 내 몸이면 들어갈 수 있겠는데?”
하수구의 넓이와 높이를 가늠했을 때, 성인 남성이 들어가기에는 살짝 버거워 보였지만, 말했다시피 하림은 체격이 큰 편이 아니어서 엎드린 자세로 기어가면 원만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윽, 근데, 냄새가 너무 심하네.”
실시간으로 내장이 주륵 주륵 흘러내리는 배출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난 다음, 다리가 굳었다.
등 뒤에서 소리 없이 접근하는 존재. 뜬금없다. 네발짐승 같은 괴수.
살기. 그렇다. 살기가 느껴진다. 나를 죽이려고 등 뒤에서 엄습하는 빨간 외눈의 괴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지르는 소리인지, 괴물의 울음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나락 속으로 꺼져버리고 공포만 남은 시간에서 하림은 절망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배출구 안으로 몸을 던져서 필사적으로 기어 들어갔다. 계속해서 기어 들어가는 도중에 시선을 뒤집어서 뒤를 돌아봤다.
이명이 걷힌다.
“하아··· 하아···.”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슬 굴러가 듯, 흐르는 개울물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실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위협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핏물에 자신이 빨갛게 물들어 가는 건 상관없었다. 소년은 그저 더 깊은 곳을 갈망했다.
* * *
하림은 방금 전 일이 있고 나서 하수구 밖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무작정 안쪽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가축의 내장 냄새와 부패한 사체에서 올라오는 가스가 숨 쉴 때마다 목을 따갑게 했다.
고통에 흐느끼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코너를 돌자 저기 앞에,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는 빛줄기가 보였다. 열심히 기어서 다가가 보니 천장에 지상과 연결된 긴 구멍이 있었다.
“좀 높아 보이는데······.”
높이는 대략 10미터. 인간의 힘으로 올라가기에는 까마득해 보이는 높이였다. 하지만, 하림은 가스로 가득 찬 이 하수구를 더 기어갈 생각도, 다시 뒤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일단 등을 벽에 기대고, 팔을 양옆 벽에 밀착시켜서 몸을 지지한 다음, 발을 들어 올려서 앞쪽 벽에 댔다. 등, 팔 다리로 몸이 떨어지지 않게 강하게 지지하는 모습. 이 자세는 마치······ 그래, 목욕탕에서 뒤로 넘어져서 대야에 껴버린 모습과 비슷했다.
팔, 다리를 조금씩 움직여서 위로 올라갔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 * *
성 외곽의 어느 한 한적한 방목장. 능선에 엎드려서 주위를 살피던 분홍 머리의 여자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어나 달렸다. 울타리를 구르듯이 넘어간 다음, 질퍽한 땅에 슬라이딩─── 곧바로 풀을 뜯고 있던 암소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배를 쓰다듬으면서 조심스럽게 암소의 젖 위로 향하는 오른손. 여자의 청초한 미소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헤헷, 목이 너무 말라서 실례 좀 할게?”
능숙하게 젖을 쥐어짜며 떨어지는 우유를 입으로 받아먹는 그녀는 행복하다. 그런데 그때,
끼익─
“응?”
멀리 않은 곳에 있는 하수구 그릴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반응했다.
하림은 사각형 그릴을 살짝 들어 올려서 밖 상황을 살폈다. 일단,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이 솟아나 있는 성벽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도축장 같아 보이는 작은 집과 방목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마을······ 아니, 거대한 도시가 보였다.
“정말로 성 안으로 이어져 있군.”
하림은 구멍에서 나와서 그릴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다음에 재빠르게 작은 집의 벽에 붙었다. 등을 벽에 바짝 붙인 채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경계하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포치(현관 테라스)의 난간에 널려있는 로브를 슬쩍해서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갔다.
쫙 펼친 로브를 몸 전체에 둘러서 긴산의 복장을 가린 채로 도심 깊숙이 들어간다.
구유 안의 짚 속에 숨어서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여자가 손등으로 입을 닦는 순간, 참지 못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 * *
“어라? 이상하네.”
복슬 복슬한 초코색깔 머리카락, 황동색 눈동자,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꽂은 노란색 머리핀.
얇은 면옷 위에 사슬 갑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의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끔찍하게 죽은 아군의 시체. 그가 시체의 훼손 부위를 면밀하게 조사하며 혼잣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상처가 생길리가 없는데 말이야. 흠······. 설마, 이 근방에 뮤턴트가 있나?”
이미지로 상상한 괴물의 흉악한 입을 이렇게 저렇게, 두 손으로 흉내 내어 여닫는 시늉을 하였다.
“이렇게, 이렇게 두꺼운 이빨로 단번에 폐까지, 와와왕. ······진짜 이상하네. 이정도면 뮤턴트도 아니라 거의 공룡인데. ···음, 공룡 사냥 이라······.”
“튜로 부장님.”
어느 한 병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어, 왜?”
“사령관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다고 합니다.”
“어, 사령관? 새로 전임 온 사령관을 말하는 거야? 여기 오고 나서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그 사람?”
“네, 그렇습니다. 성함은 ‘바실리아 마브로스’라고 하더군요.”
“···바실리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 생각났다. 아마······, 5년 전이었나? 그 왜, 대신들이 회식하다가 술 취해서 말실수하는 바람에 깽판 났던 적이 있었잖아?”
“네, 알고 있습니다. 동서쪽 대신들이 왕궁에 모여서 회식을 즐기는 도중에 자신들이 저지른 여러 범죄행위를 술김에 말했다가 우연히 듣고 있던 귀족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전부 살해한 그 사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바실리아라는 이름과 무슨 상관입니까?”
튜로는 부검 도구를 챙기며 덤덤히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 ‘소악마’가 바실리아 마브로스야.”
“허? 그게 정말······ 아니, 애초에 그 사람이 살아있을 리가 있습니까? 무조건 사형 선고 받고 죽었어야 하잖아요?”
“마브로스는 희귀 성씨라서 동명이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어. 그리고, 새로 전임 온 사령관의 소문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겠지?”
“네, ‘태조의 환생이다’, ‘태조의 선택을 받은 자다’라고 떠들어 대는 소문이라면······, 설마, 정말로 그 사람이 태조의 환생이라는 겁니까?”
“태조는 남자고, 바실리아는 여자니까 환생은 아닐 수도. 그 190세까지 살았다던 할아범의 영혼이 여자아이한테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그런데······. 어?”
튜로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니 뒤에 있는 저 시체 있잖아. 아까부터 저기 있었나?”
병사가 뒤를 돌아보자 정말로 시체가 한 구 나뒹굴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체라면 이 주변에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어서······.”
주위를 둘러 본 튜로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뚜두두둑───
“크읏!?”
순식간에 달려든 괴물이 튜로의 사슬 갑옷을 물었다. 괴물에게 붙잡힌 튜로는 그대로 시야가 돌아가며 정신없이 괴물에게 끌려갔다.
“끄아악!”
나무에 등을 부딪히며 쇠사슬이 끊어져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튜로는 곧바로 일어서서 단검 형상의 쇠말뚝을 뽑아들었다.
깊은 숲속에서 혼자 자세를 잡고, 괴물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며 전의를 다진다.
수풀 사이에서 붉게 빛나는 외눈이 튜로를 차갑게 쳐다보며 마치 분쇄기와 같은 이빨에서 핏물을 뚝뚝 흘렸다. 그 흉측한 모습에 튜로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공룡 사냥은 처음인데, 쉽게 죽어줬으면 좋겠네.”
울음소리도, 발소리도 없는 네발짐승이 무자비하게 빠른 속도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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