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에서 로봇개와 함께하는 여행은 기적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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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두유
작품등록일 :
2024.04.08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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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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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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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전설] 11

DUMMY

“핵사? 너가 왜 여기 있어?”

“나야 당연히 여행하러 왔지! 겸사겸사 일도 좀 하고~”


어쩐지 신나 보이는 핵사가 하림 주위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며 말을 계속했다.


“시기를 잘 맞추면 황무지를 건너는 운송 일을 얻을 수 있어. 이곳 사람들이 폐쇄적이라서 무역을 잘 안 하고 애초에 황무지를 건너는 게 어려운 일이라서 받는 금액에 비하면 경쟁률이 낮아서 단번에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이번 건은 아문센에서 키탄으로, 키탄에서 데버리로 이동하는 경로라서 데버리에 온거고.”


핵사는 말하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의식하고 있었다. 동물의 모피처럼 포근해 보이는 머리카락에 이끌려 본능대로 손을 올린 거였지만, 자신이 쓰다듬고 있는 하림과 눈이 마주치자 느낀 감정은 뭔가 새로웠다.


남자라기엔 작은 키에 수염 하나 자라지 않은 앳된 얼굴.


핵사는 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너는 데버리에 왜 온 거야? 혹시, 탈영?”


정곡을 찔린 하림은 입을 열지 못했지만, 핵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방안에 가득한 오래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하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알을 굴리다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푹 쉰 다음, 도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핵사의 등에 툭 내뱉었다.


“네 알 바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하림의 시선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아까부터 계속 벽에 부딪히고 있는 ‘실로아’에게 향했다.


쭈그려 앉아 그녀의 시야를 가리던 이불을 걷어내자 빨간 외눈과 시선이 교차한다.


특징이라고는 없는 연갈색의 평평한 철판 위에 찍혀있는 빨간점 하나. 흉측한 입만 닫고 있으면 어딘가 엉뚱한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얼굴이다.


‘실로아’라는 이름은 그녀가 바닥을 발로 긁어서 적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인지하고 글자로 쓸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웬만한 개보다도 똑똑하고 귀여운 면도 있는 실로아가 처음 만났을 때는 왜 그렇게 사납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배가 고팠던 걸까.


마지막 서랍까지 뒤져본 하림은 이 방에도 자신의 장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문밖으로 향하며 말했다.


조금 뾰로통한 말투로.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 네 그 모험이라는 거, 잘 됐으면 좋겠네. 저번처럼 사막에서 쓰러지지 말고.”

“아, 하림.”


도망치듯 말하며 방을 나서던 하림을 핵사가 불러 세웠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그녀는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로 같은 도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핵사와 마주 보지 않고 대화하는 상황이 낯설었던 하림은 괜스레 긴장하며 표정을 굳혔다.


“방 오른쪽에 있는 문 보이지? 거기가 주방과 연결돼 있어. 한, 스무 명쯤 될 거야.”


조심스럽게 도자기를 내려놓고 하림이 말한 대로 방 오른쪽 끝으로 가자 정말로 문이 있었다. 벽지를 붙일 때 문도 함께 덮어져서 가까이 가서야 움푹 들어간 문손잡이가 보인다. 문손잡이를 잡으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능숙하게 미소를 만들어냈다.


문을 열자


곳곳에서 표정이 풀리며 안도하는 얼굴들이 보인다.


“언니–!”

“누나!”


가장 환하게 반겨준 건 마을 아이들이었다. 가끔 모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어린아이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 다행히 취향에 맞았나 보다.


“핵사양, 무사하셨구먼!”

“정말 반가워요, 아가씨.”

“아가씨, 밖에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기고 있지요?”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을 토해냈지만, 핵사는 방 중앙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모발이 흰머리로 가득한 노파가 물었다.


“핵사양,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여기는 우리 스무 명이 전부라서 더는 없는데······”

“사라라는 애가 분명 여기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아요. 혹시 죽었나요?”


핵사의 말에 노파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어떤 사령술사가 도와준 덕분에 죽은 사람은 없어. 근데 방금 사라라고 했나? 그 애는··· 어머나!”


노파가 펄쩍 뛰며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그 애 부모가 전부 전투에 나가 있었지 참.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그럼, 사라는 혼자 남겨진 건가? 아무리 급해도 부모가 애를 혼자 둘리가 없는데······ 어째서, 왜?”


순간 노파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길어지는 말,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는 손.


의구심을 말했을 뿐이었지만, 노파는 자신이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두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기나긴 침묵이 찾아왔다.


정말로 10살짜리 여자애가 왜 어른 없이 혼자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까.


가만히만 있어도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편리한 상황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질병과 기아와 전쟁의 시대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이들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침울하게 입을 꾹 닫고,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서 있는 자신이, 눈을 들지 못하는 자신이────


그러니까


“아가씨, 그 애를 찾으러 갈 거면, 나도 같이 찾으러 가자고.”


문밖으로 나가려던 핵사를 60대 중후반의 남자가 불러 세웠다.


“나, 나도 같이 갑세다. 우리 마을 사람을 모른척할 수가 있나.”


그렇게 용기 있는 몇몇 어른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뭐라도 시도할 수 있을 만한 인원이라고 핵사는 생각했다.


네 번째 사람이 나왔을 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핵사는 하려던 말을 시작했다.


“시간도 없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일단 집과 광장 주변을 흩어져서 각자 찾아보는 게 최선인 것······.”


갑자기 밖에서 들린 소란 때문에 핵사는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소리 같은데,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이라 그런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몸을 돌려 방에서 나온 다음, 거실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가는 중에 집안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하림은 집 밖으로 나간 걸까.


정문에 다다라서 문을 살짝 열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마당은 아까 본 것과 다른 부분이 없어 보였지만, 문틈으로 밀려든 재 냄새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나와 내려다본 언덕 아래의 마을. 거기에 활활 타오르며 눈길을 끄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방 안에서 들었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불이 이쪽 외벽에도 달라붙었어! 사람이 더 필요해!”

“다들 물러나! 기둥이 무너진다!”


뿌연 연기를 흩날리며 들보에서 떨어지는 나무 파편. 붉은 열기를 뿜어내는 불길.


마을에 남은 경비병들이 창고에 난 불을 진화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불길에 완전히 잡아먹힌 창고가 재로 변해가는 걸 막을 방도는 없어 보였다. 그저 옆집에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물로 불길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목재창고에 불이······ 이것도 오아시스 놈들이 한 짓인가?”

“창고야 다시 지으면 되지만, 우리 할 일은 따로 있지 않은가. 빨리 움직일세.”


핵사를 뒤이어 마당으로 나온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중심까지 침입한 적들, 불타오르는 창고, 사라진 여자아이. 혹시나 하는 최악의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핵사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을 따라 나온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작전은 이렇게 해요. 사라의 집과 광장을 중심으로 흩어져서 꼼꼼히 찾아보고, 사라를 찾게 된다면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 없이 빠르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사라를 꼭 이곳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핵사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타닥 목재 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지하 땅굴 내부. 불타 무너진 잔해가 입구를 막고 있어서 보이는 불빛은 오로지 잔해 사이에서 들어오는 빨간 열기뿐인 차갑고 어두운 지하 통로다.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진동. 음습한 땅굴이 진동에 울릴 때마다 잔해 조각의 하얗게 타버린 끝부분이 흔들리며 하얀 재 가루를 떨어뜨렸다.


쿵 쿵 쿵


이윽고, 들려오는 충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입구를 빼곡히 막은 나뭇조각들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콰직’ 거리며 무너지는 잔해 벽. 그다음 순간, 파편들이 비산했다.


막혔던 입구가 뚫리면서 유입된 산소로 인해 개화하듯 몰아닥치는 불길.


불길 사이에서 단거리를 순식간에 도약하며 나타난 것은 차가운 빨간 외눈을 가진 비생물이었다.


빨간 외눈이 음침하고 축축한 땅굴을 둘러보더니, 자신의 생체 모방 눈알의 구조를 변화시켜서 작은 불빛으로도 어두운 땅굴 내부 전체를 환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넓이는 성인 남성 두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이고, 높이는 똑바로 서서 걸으면 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인 아담한 공간의 굴.


실로아가 고양잇과 맹수처럼 뛰어올라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숨겼다.


* * *


정신을 잃은 소녀가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오른쪽 눈꺼풀을 서로 붙어버리는 바람에 왼쪽 눈으로만 간신히 이 어두컴컴한 장소를 인지했다.


이 어둡고 축축한 공간은 공기조차 희박해서 정신을 몽롱하게 하지만, 아까 전에 도망치려고 저항하다가 머리를 맞은 뒤로는 생각할 의지조차 없는지라 그저, 속에서 올라오는 구토의 고통을 잊게 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목에서 올라와 입안을 가득 채운 분비물이 목구멍을 완전히 막으면 숨 막혀 죽겠지. 분명 위험한 상황이지만, 한참을 버둥거리느라 기침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자신의 호흡 소리를 자장가 삼아, 점점 몸을 감싸는 깃털같이 편안한 감촉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눈물로 흥건한, 반쯤 떠진 왼눈을 움직여 바닥을 보았다. 물기로 차가운 바닥에는 나를 끌고 온 남자의 발자국과 끌려오면서 생긴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여기서 시선을 조금만 더 들어보니 거대하고 끝없는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헷갈릴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


이 넓은 검은색 바탕에 핏방울 하나가 똑 하고 떨어지듯이




빨간 점이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은은한 빛깔의 새빨간 광점이 느닷없이 허공에 나타나, 나와 눈을 마주쳤다. ·········쓸쓸하다.


슬프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질투.


머리가 쥐어짜이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눈깔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었다.


포로를 줄로 엮어서 끌고 가던 남자가 잠깐 휴식을 취하려고 걸음을 멈췄을 때, 그가 땅을 통해 전해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온몸에 부상이 심하고, 혼자 살아남은 터라 사기는 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재로 검게 물든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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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Brain dead] 36 25.01.01 11 0 13쪽
35 [Brain dead] 35 24.11.29 13 0 10쪽
34 [Brain dead] 34 24.11.16 15 0 11쪽
33 [Brain dead] 33 24.11.04 16 0 12쪽
32 [Brain dead] 32 24.10.23 18 0 10쪽
31 [Brain dead] 31 24.10.11 22 0 11쪽
30 [Brain dead] 30 24.09.15 29 0 11쪽
29 [Brain dead] 29 24.09.05 34 1 12쪽
28 [Brain dead] 28 24.08.12 34 0 12쪽
27 [무광의 야수] 27 24.07.12 43 0 11쪽
26 [무광의 야수] 26 24.07.08 36 0 13쪽
25 [무광의 야수] 25 24.07.04 39 0 12쪽
24 [무광의 야수] 24 24.07.01 34 0 14쪽
23 [무광의 야수] 23 24.06.28 32 0 10쪽
22 [무광의 야수] 22 24.06.27 33 0 11쪽
21 [무광의 야수] 21 24.06.26 37 0 11쪽
20 [무광의 야수] 20 24.06.25 40 0 13쪽
19 [무광의 야수] 19 24.06.24 43 0 13쪽
18 [무광의 야수] 18 24.06.23 37 0 10쪽
17 [예열] 17 24.06.21 34 0 11쪽
16 [예열] 16 24.06.20 38 0 10쪽
15 [예열] 15 24.06.19 33 0 14쪽
14 [예열] 14 24.06.18 37 0 12쪽
13 [예열] 13 24.06.14 48 0 12쪽
12 [예열] 12 24.06.11 37 0 14쪽
» [오래된 전설] 11 24.06.10 38 0 11쪽
10 [오래된 전설] 10 24.06.07 40 0 12쪽
9 [오래된 전설] 9 24.06.02 4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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