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열] 13

싹둑—
가위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가위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짧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풍경은 해가 거의 다 저물어가는 때의 숲속 마을. 높은 언덕 위에 앉아 모든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사치를 즐겼다.
하림은 어제처럼 사슬에 구속된 채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것이 아닌, 마을에서 손님으로서 대접받으며 이발하고 있었다.
상황이 달라진 경위는 이렇다.
하림은 나무껍질 전사들이 가져갔던 자신의 칼과 활을 챙기고 조용히 떠나려고 했지만, ‘사라’라는 이름의 소녀가 나무창고 안으로 끌려가는 것을 집에서 창문을 통해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소녀를 도와주고 싶은 하림의 마음을 실로아가 알았는지, 그녀는 납치범을 따라 불타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후에는 정말로 사라를 구출해냈다.
그런데, 실로아가 사라를 구출하는 도중, 골목에 숨어서 실로아를 기다리던 하림을 핵사가 발견해버렸다.
핵사와 더 이상 엮이기 싫었던 하림은 은근슬쩍 도망치려고 했으나, 핵사가 육탄 공세로 막아서는 바람에 그녀의 품 안에 붙잡혀버린 하림은 결국 순순히 손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림이 핵사를 꺼려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와 같이 있으면 해를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핵사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위험천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꾸며낸 거짓 미소는 미지의 동굴과도 같았다. 거대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음침한 동굴 같은 그녀의 꾸며진 표정은 하림에게 생리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저번에 마을 축제에 갔을 때는 둘이서 재밌게 놀았지만, 그때는 핵사가 하림을 많이 배려해준 것이리라.
만약, 아까 전처럼 하림이 도망치는 것을 막겠답시고 애착 인형처럼 껴안는 짓을 한 번 더 하면 그때는 진짜 못 참을 수도 있다.
“후·········.”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나서······”
이발사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었는지 캐묻지 않고, 조용히 손거울을 꺼내 하림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이발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야가 탁 트이네요.”
“그럼, 이제 빨리 들어가서 저녁 드세요. 식기 전에 먹어야 하잖아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아주머니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한 다음, 문 앞에 섰다.
전통적인 미닫이문을 열고, 신발장에 신발을 벗은 다음,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령술사 왔는가! 머리를 깎으니 확실히 인물이 사네.”
하림을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데버리 야사라는 중년의 남자였다. 우락부락한 근육과 온몸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신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바짝 자른 머리털과 수염,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윗옷을 안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손님들과 함께라서 그런지 누런색 면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하림씨는 여기에 앉으시면 돼요.”
하림에게 친절하게 자리를 알려준 이분은 데버리 부인이다. 그녀는 20대만큼 젊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야사와 동갑이라고 한다.
이 방 안에는 하림을 포함해서 4명이 있었는데, 두 명은 데버리 부부이고, 나머지 한 명은 익숙한 분홍 머리의 그 여자였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은 핵사가 잔에 담긴 것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그만, 곁눈질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마시던 것을 입꼬리로 흘리면서 눈웃음을 보내오는 그녀에게 겁먹은 하림은 최대한 눈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사령술사. 혹시 불편한 대라도 있나? 다른 음식을 원한다면 눈치 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주게. 자네는 손님이니 요구는 최대한 들어주겠네.”
“아, 아니요. 음식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 순간, 잔을 따라주던 데버리 부인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혹시 사람이 불편하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하림은 애써 침착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야사는 의문을 품었다.
“흠········· 자네를 처음 봤을 때는 어떤 상황에도 겁먹지 않는 순수한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약간 다르군.”
“그때는 정신이 없었어서 제가 왜 그랬는지 저도 잘······”
“음, 그렇군. 어쨌든 자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네. 무슨 일이 생겼으면 이런 자리도 없었을 테니 말일세.”
말을 마친 야사가 태평한 얼굴로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먼저,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하도록 하겠네. ‘마법사’ 핵사와 ‘사령술사’ 하림, 외지인 임에도 데버리를 위해 오아시스에 맞서 싸워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네. 두 사람 덕분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으니, 이 은혜는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꼭 갚도록 하지. 부디 편하게 즐겨주게나.”
핵사는 정신없이 먹느라 손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하림만 야사의 말에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하림은 방금 야사의 말에서 핵사가 마법사라는 것을 처음 알았지만, 몇 시간 전에 핵사가 기이한 적색 입자로 사라를 치료하는 과정을 목격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한지라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식탁 위에 차려진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보였다. 대부분 근처에서 자라는 나물로 만든 요리였지만, 식욕을 돋우는 색깔로 양념이 잘 되어 있어서 맛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삭한 식감의 콩나물, 간이 세고 달콤한 고기.
식탁 위의 반찬들을 이것저것 먹으며 맛을 즐기고 있자니 서서히 포만감이 느껴지며 아늑한 분위기에 취하게 됐다. 다만, 잠깐이라도 실수로 핵사와 눈이 마주칠 때면 등골이 오싹해 진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하림은 최대한 고개를 들지 않고, 먹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사령술사, 자네는 이 마을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나? 어제 이곳에 처음 왔을 텐데, 혹시 둘러보고 싶은데 라도 있다면 안내해 주겠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딱히 궁금한 점은 없습니다.”
식사 전에 이발하느라 마당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더니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우물, 가택, 광장, 목책 등등.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딱히 신기하거나 관심을 끄는 장소는 없었다.
“저요! 저는 있습니다.”
말 한마디도 없이 계속 밥만 먹던 핵사가 말문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핵사양이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니, 신기하군. 핵사양은 이제 데버리 사람 다됐지 않은가?”
마시던 잔을 끝까지 다 비운 핵사가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취기 오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을 정문에 들어섰을 때부터 거리가 휑하고, 경작지도 관리 안 된지 오래돼 보이고, 사람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고. 뭔가~, 뭔가 먹구름이 내려앉은 느낌이란 말이죠. 원래 데버리 마을은 아침이면 노동가를 부르고 저녁이면 모닥불에 둘러앉는 활기 넘치는 마을인데, 오늘은 분위기가 뒤숭숭해 보인단 말입니다.”
말을 잠시 멈추고, 다시 채운 잔을 홀짝인 다음 말을 이어갔다.
“......혹시, 마을을 떠날 건가요?”
핵사는 말을 끝마치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잔을 홀짝였지만, 하림은 핵사의 마지막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다. 다리가 시릴 정도로 대기가 차갑게 내려앉는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뜨는 하림의 눈에 점점 초조함이 드러났다.
곧이어, 잔을 들어 목을 축인 야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 하! 핵사양은 우리와 오랜 친구고, 사령술사, 자네는 핵사양의 친구이니 내가 말하지 못할 건 없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이 땅을 버리고 블나시아로 이주할 계획이라네. 한달전에, 내가 영주가 내린 동원령을 거부하는 바람에 지원이 끊겨버려서, 오아시스의 공격을 막기에는 이젠 한계거든.”
“동원령을 거부했다는 게 무슨 뜻이죠?”
하림의 물음에 핵사가 대답했다.
“성지 동쪽의 카라딕 영주가 성지 서쪽을 공격하려고 명령을 내려서 군사와 물자를 모으고 있는데, 그 명령을 데버리가 거부했다는 거야.”
“성지 동쪽과 서쪽은 서로 동맹 아니야? 왜 전쟁이 일어나는데?”
“카라딕이 권력을 잡고 나서 성지를 하나로 통일하겠다고 선포했어. 제대로 된 영토 구분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나라끼리 갑자기 전쟁을 하겠다는 게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여서 반발이 많긴 하지만, 카라딕의 무력이 막강해서 말릴 수가 없는 거지.”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긴산 보다는 ‘마녀’의 영향권 안에 있는 성지가 더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곳도 분쟁이 많이 일어나는구나.”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녀는 다른 외세가 쳐들어올 때만 나타나고, 내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더군. 마녀가 과거에 성지에 살던 사람이라서 여덟씨족을 30년 동안 외세로부터 지키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씨족들끼리 싸우는 건 상관하기 싫어하는 것 같네.”
마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하림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까, 블나시아로 가는 길은 긴산이 점령하고 있지 않나요? 다른 길은 마녀가 지배하는 방사능 지대뿐인데, 어떻게 블나시아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오제라 호수에서 배를 타고 아우구스타로 넘어간 다음에 아우구스타에서 블나시아 국경을 넘을 걸세.”
그때, 데버리 부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시, 사령술사씨도 우리랑 같이 가실래요?”
“네?”
데버리 부인의 뜬금없는 의견에 모두가 놀라 행동을 멈췄다.
“사령술사씨는 탈영병이니까 잡히면 사형이잖아요. 차라리 우리랑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해서요.”
“긴산의 군법상 잡힌다고 사형당하지는 않지만··· 아니, 뭐··· 사실, 가는 길이 겹치기는 하네요. 저도 블나시아로 가거든요.”
하림은 말을 끝마치고는 물을 마시려고 컵을 잡았지만, 고막을 울리는 야사의 웃음소리에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 하! 하!!! 그런가? 자네도 블나시아로 가는군. 그거 좋은 소식일세. 음!”
야사는 단번에 잔을 비워버리고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하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긴 여정은 중간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사람을 최대한 많이 모으는 법이지만, 사령술사가 함께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 자네를 홀대한 잘못을 몇 배로 갚고, 식량과 금화도 넉넉히 줄 테니 우리와 함께 배를 타는 걸세, 사령술사!”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핵사가 분위기에 올라타서 선언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공짜로 아우구스타에서 블나시아까지 풀코스면 저도 동참하고 싶어요!”
“안 그래도, 핵사양에게는 당연히 제안하려고 했다네. 마법사가 두명이라면 정말 두려울게 없지.”
“그럼, 근무 환경이랑 급여 협상부터 할까요?”
“아하하! 역시, 그런 쪽으로는 득달같군.”
“일단 주 20시간 근무에 월 500에서 시작 할게요.”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겠구먼.”
핵사와 야사가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에 하림은 잔을 들어 첫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하림이 술이라고 생각했던 이 음료에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모금 마셔보니 확실해졌다. 이건 그냥 물이다.
하림은 고개를 들어 핵사를 보았다.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혀가 조금 꼬인 것 같은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음, 잠시 사고가 정지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답은 간단했다.
데버리 부인이 핵사에게만 술은 준 것이 아니라면, 연기를 하고 있거나, 물을 마시고 취한 거겠지.
하림은 몸을 살짝 기울여서 데버리 부인에게 귓속말했다.
“저기, 핵사가 지금 마시고 있는 게 뭔가요?”
“그냥 물이에요. ···저희도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답니다.”
“아, 그렇군요.”
하림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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