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열] 15

객실 번호 162.
팔다리가 결박된 하림은 화장대 의자에 앉아있었다. 머리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배가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린다.
등받이 의자에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여자는 아까 전에 화장실에서 한바탕 싸웠던 그 사람이었다. 구두는 한쪽 굽이 부러져서 짝짝이고, 머리카락은 홀딱 젖었지만, 눈빛만은 또렷하게 살아있는 모습.
하림은 후환이 두려운 마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상처 없이 깨끗한 모습에 살짝 안심했다.
“먼저 얼굴부터 공략하는 게 낫겠어요. 코부터 도려낼까요?”
여자가 호신용 검을 뽑아 들며 섬뜩한 말을 하자 안심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의도가 그런 거였다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서 빨리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침대 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은빛 단발머리 소녀, 하림이 기억하기로는 아이카라는 이름의 제1군단 궁수부 부장에게 호소했다.
“부장님, 이건 분명한 오해입니다.”
“그건 내가 판단한다. ···블랑, 시작해.”
단호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짝짝이 구두를 신은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급해진 하림의 말이 빨라졌다.
“일행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어요. 저는 그저 탈영병일 뿐이고 부장님을 따라서 따라서 배에 탑승한 것이 아닙니다.”
“일행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데버리 마을의 521명······ 그 사람들이 내 위치를 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아나? 그러니,”
여자가 하림의 어깨를 ‘탁’ 소리 나게 붙잡았다.
“네 입을 통해 그 사람들이 성지를 떠나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전부 알아내야겠지.”
“움직여도 소용없어요, 순식간에 잘릴 테니까.”
“자··· 잠깐······!”
입에 거즈가 억지로 쑤셔 넣어지고, 칼날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림자가 눈앞까지 드리운 그다음 순간───── 하림은 빨간 외눈을 통해서 162번 객실의 문 앞을 보았다.
똑. 똑. 똑.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곧이어 들려오는 여성의 산뜻한 말소리.
“들어가겠습니다~.”
그 직후, ‘콰드득’ 하는 소리가 나면서 원형 문손잡이가 통째로 뽑혀 사라졌다. 장금장치가 문손잡이와 함께 사라진 객실 문이 저절로 열린다.
“흠흠~ 모두 안녕?”
노크한 여성의 모습이 드러나자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녀는 무언가의 등에 타고 있었다.
네발짐승의 형태를 한, 빨간 외눈을 가진 괴물의 위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는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핵사.
그녀는 실로아의 등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새빨간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입술과 양팔을 부르르 떨어서 그 자극적인 맛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하림을 고문하려던 두 여자는 석상처럼 굳어서 미동도 없이 핵사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핵사?”
거즈를 바닥에 뱉은 하림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언제나 그렇듯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핵사가 입을 열었다.
“실로아가 어딘가로 가길래 따라와 봤는데······,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아, 그게 조금 오해가 생겨서. 별일은 아니야.”
하림은 일단 상황을 완만하게 풀고 싶었기에 아이카가 한발 물러설 것이라 예상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너는 누구냐.”
아이카가 핵사에게 권총을 겨누는 바람에 헛수고가 돼버렸다.
핵사는 실로아의 등 위에서 내려오며 아이스크림 컵과 스푼을 양손에 든 채로 양팔을 높이 들어서 항복 의사를 보였다.
“저건 너의 사역마인가? 저 괴물을 이 방에서 나가게 해!”
아이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실로아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은 핵사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얘를 따라왔을 뿐이라니까?”
“뭐? 그럼 사령술사는 대체··· 설마······!”
아이카는 자신의 머리에 스치듯이 들어온 안 좋은 예감에 고개를 돌려 하림을 보았다.
“······!”
그녀가 바라본 그의 두 동공에는 금빛 안광이 감돌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본 순간, 네발짐승을 닮은 그것이 천장에 닿을 듯이 높게 뛰어올라 아이카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이카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바닥을 굴러서 공격을 회피했다. 탄환은 실로아의 다리에 맞고 도탄 되어 천장에 박혔다.
아이카가 권총을 바닥에 내던지고, 벽에 세워져 있던 세이버를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블랑, 뒤로 물러나!”
바닥에 착지한 실로아와 눈이 마주친 블랑이 주춤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는 블랑의 모습에 기세등등해진 실로아가 입을 열어서 흉측하고 인위적인 치아로 블랑을 위협했다.
실로아의 흉측한 치아를 보고 기겁한 블랑이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뭡니까, 저건···! 저런 게 사역마라고요?”
하림이 일어나서 뒤로 묶인 손을 실로아의 입으로 가져다 대자 강철 치아가 회전하며 줄을 잘랐다. 억압 해방된 하림은 고마운 마음에 실로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에 닿는 순간, 정신이 고양되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실로아와 함께 있을 때면 의식이 날 선 칼처럼 날카로워지고 사고 회전이 빨라지는 것이 체감되었다.
하림이 실로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내리자 실로아는 다시 블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실로아가 천천히 다가오자 블랑이 불쾌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내, 블랑은 극심한 두통과 구토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블랑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모습을 본 아이카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다만 사기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하림에게 물었다.
“구토감까지 들게 만들다니, 정신 공격 계열이면, 간부급 뮤턴트를 사역마로 부리는 건가?”
아이카의 말투에서 그녀가 싸울 의지를 잃었다고 판단한 하림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신속히 상황을 종료시켰다.
“총소리가 났으니 곧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오해를 풀기 전에 상황을 먼저 정리하는 게 좋겠군요. ······무기를 내려놔 주세요.”
* * *
철컥.
아이카가 객실문을 닫으며 숨을 푹 내쉬었다. 하림은 그 한숨이 분노의 한숨이라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어떻게 됐습니까?”
“대충 실수였다고 잘 설명했으니 걱정마.”
아이카가 자리로 돌아와 등받이 의자에 앉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너, 제1군단에서 기마부 공병이었지? 삶의 강에서 전투할 때 너를 봤었던 것 같아서.”
하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너가 누구였던지 간에 지금부터는 너를 이름으로 부르겠다. 너도 나를 존칭으로 불러주면 고맙겠군”
“그편이 나으시다면.”
하림이 침대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는 핵사에게 말을 시작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먼저, 하림이 어떻게 탈영하게 됐는지부터 얘기하자면, 그건 나 때문이야. 내가 하림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준다고 아문센 사막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본 멋진 광경이 부대로 돌아가서도 잊히지 않은 거지. 그 후로 탈영하기로 마음먹은 거고.”
“아니, 그건 아니야.”
“그래서 탈영한 게 아니야?”
“······아니야.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고작 축제 때문에 도망칠 리가 없잖아.”
“어떻게 탈영하게 됐는지는 상관없다. 그냥 왜 데버리 마을 사람들이 전부 이 배에 타고있는 지 부터 설명해.”
아이카의 명령 핵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런 극비를 허락 없이 말하면 안 되겠지만, 뭐, 딱히 상관없으려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주, 또는 피난이야. 너도 귀족이니까 성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지? 카다릭이 서 성지를 공격할 군사와 물자를 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데버리는 명령을 거부해서 찍혔어. 그 때문에 보급도 안 오고, 국경 수비대도 데버리에서 철수해서 민병대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데, 오아시스라는 황야 민족이 땅을 빼았으려고 날뛰니까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렇군······ 오아시스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어서 납득은 하겠다. 하지만, 안심은 못하겠군.”
아이카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턱을 괴다가 하림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림, 너는 앞으로 어디로 갈 계획이지?”
“음···, 정확한 목적지는 없지만, 블나시아로 갈 예정입니다.”
“블나시아? 너도 이주를 하려는 거냐?”
“아니요.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다.”
“말은 못하겠다는 건가. 사람이 원체 비밀이 많은 생물이라고는 하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군. 너희가 나에게 적대적이었다면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서 나를 붙잡았을 테니 일단은 믿겠어. 그리고, 제안을 하나 하겠다.”
뜻밖의 말에 하림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제안 말입니까?”
“정확한 사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도 블나시아에 볼일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긴산 사람이 블나시아에 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가짜 신분증을 하나 구했는데, 영 믿음이 가지 않아서 불만이거든. 입국 심사원이 눈썰미가 좋으면 걸릴지도 모르지. ······그래서, 새로운 신분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도, 너희와 같은 이주민 신분으로 말이야.”
핵사가 아이스크림 컵의 바닥을 수저로 긁으며 말했다.
“즉, 데버리 마을 사람 인척 연기하겠다는 거야?”
“그렇다. 블나시아는 이민자 입국에 대해 관대하니까 가짜 신분증보다는 나아. 물론, 데버리 사람들에게 보수는 제공하겠다.”
“그러면 위험이 너무 크잖아? 하얀 머리카락만 발현된 설인이라고 해도 의심받을 학률이 높은걸?”
설인은 백발, 검은 눈동자, 거뭇한 손톱 이 세 가지 중 하나 이상은 무조건 가지고 태어나는 인종이다. 전 대륙에서 대부분의 설인은 긴산에서 살고 있고, 세 가지 특징을 전부 가지고 있는 설인은 긴산에만 존재한다.
설인이 대부분 긴산에 있는데, 긴산과 적대적인 블나시아에 설인이 간다는 것 자체가 의심받기 딱 좋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제 의견도 같습니다. 설인이라는 인종이 긴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데버리 사람들은 조금의 위험도 만들기 싫어할 겁니다.”
핵사와 하림의 우려하는 말에도 아이카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쩨쩨한 거 아냐? 나는 아직 보수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 갑판에 오를 때 보니 꼴이 말이 아니더군. 맨몸에 나무 껍질이라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흙바닥에서 구르던 내가 봐도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보수’라는 단어에 입을 달싹이던 핵사가 살짝 떠보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정확히 얼마를 줄 건데?”
“그건 마을 지도자와 얘기할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대화의 마무리는 하림이 매듭지었다.
“야사에게 한번 말해보긴 하겠습니다. 제가 마을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사령술사인 만큼 발언은 할 수 있습니다.”
“야사라는 사람이 지도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이카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보았다. 이미 해가 다 져서 어둑한 밤하늘이 보였다.
“날이 어두워 졌으니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도록 하겠다. 내일 아침에 갑판에서 보도록 하지.”
“뭐야, 벌써 해산하는 거야? 모처럼 또래 네 명이 모였는데 야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던가, 불 꺼진 선체 내부에서 담력 체험을 하는 건 어때?”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핵사의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며 작별 인사한 하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실로아가 뒤를 따랐고, 핵사는 평소와 똑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일어나 마지막으로 퇴실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아이카가 뒤늦게 희망 사항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객실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앞까지 걸어간 다음, 그대로 몸에 힘을 빼서 침대 위에 엎어졌다. 꾸물꾸물 움직여서 제자리를 찾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다음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곧이어 화장실 문이 열리며 블랑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문틀을 붙잡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지만, 눈빛만은 똘망똘망 했다.
“뮤턴트의 정신 공격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네요.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다지만, 잠깐 같이 있었다고 구토를······ 헤헤, 역시 사령술사는 대단해요.”
블랑은 체력이 소진된 몸을 이끌고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랜턴을 하나씩 끄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안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침대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아이카의 옆에 새우 자세로 누웠다.
선체가 파도에 출렁이는 감각만 느껴지는 고요 속에서 블랑이 말문을 열었다.
“······아이카님.”
“왜.”
“솔직히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요? 이런 위험한 작전에 프란체 가문의 아이카님이 뽑힌 건 정부의 음모인 것 같은데요. 집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약속도 구두로 한 거라서 신뢰가 안 되고요.”
“······”
아이카는 대답하기를 꺼려하며, 몸을 돌려서 블랑을 등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토 냄새나니까 입 다물고 잠이나 자.”
“넵.”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