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광의 야수] 18

* * *
구름이 해를 가려서 바람이 선선한 어느 날, 플라타리아 남쪽 해변.
마부가 창을 가져와서 개흙에 박힌 마차 바퀴를 지렛대의 원리로 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으읍······! 하······ 흐읍!”
마부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온 힘을 다해 바퀴를 빼내려고 했지만, 조금 들썩거릴 뿐 전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부는 창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며 넓게 펼쳐져 있는 갯벌로 시선을 돌렸다.
갯벌 전체에서 식어가는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불타버린 마차, 말과 사람의 시체가 100m 밖까지 펼쳐져 있는 새빨간 피와 검은색 진흙이 뒤섞인 살육의 현장.
하늘에서 내려온 저어새 두 마리가 엎어져 있는 시체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보며 고민하던 마부가 이내, 몸을 돌려 마차 승강문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부가 승강문에 노크를 하자 곧이어 창문이 내려가며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앳된 소녀의 목소리.
“무슨 일인가요?”
마부는 평민 특유의 느리고 촌스러운 인사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송구합니다만 마차를 빼내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힘으로는 꼼짝도 안 해서······”
“뒤로 잠시만 물러서세요.”
그녀의 명령에 마부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자 무언가 정리하는 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리고, 이내 승강문이 열리며 은발 소녀가 개흙 위로 군화를 신은 발을 내디뎠다. 얼굴은 진홍색 피로 칠해져 있고, 찰갑 갑옷은 진흙과 피로 물들어서 광택이 전혀 나지 않는 모습.
바실리아가 개흙에 박힌 앞바퀴에 다가가서 바퀴의 뼈대를 잡은 다음, 설인의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마치 잡초 뽑듯이 손쉽게 바퀴를 개흙에서 꺼냈다. 바로 그 직후, 바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마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부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당연히 됩니다요. 뭐가 궁금하십니까?”
“마부님이 이 근방에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네. 그랬습죠.”
“그럼, 방금 우리를 습격한 플라타리아 세력을 근방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바실리아의 말을 들은 마부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음······ 플라타리아에 대한 평가는 딱히 없지만, 그 우두머리인 설인에 대한 말은 많지요. 워낙 명성이 자자하니 말이에요.”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요?”
“뭐, 여러 가지로 예를 들 수 있지만, 모두가 입 모아서 말하기를 ‘빌어먹을 년’또는 ‘미친년’이라고 합니다. 성격이 악독해서 붙은 별명입죠.”
“······”
말을 끝마친 마부는 제 일을 하러 마차를 끄는 말에게 다가갔다.
바실리아는 뭔가에 홀린 듯이 아무것도 없는 빈 입안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승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털썩.
바실리아가 좌석에 앉으며 승강문을 닫았다. 마차 내부는 닫힌 창문의 조그마한 틈 사이로 들어오는 미량의 빛으로 간신히 실루엣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바실리아가 반대편 좌석에 앉아있는 이리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괜찮아지셨나요?”
마차 외부에서 채찍질 소리가 들려오고, 말들이 마차를 움직이는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같이 요동치며 이리곤의 허리를 비췄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의 허리에는 피가 흥건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솔직히 느낌이 좀 더럽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피똥이 나올 것 같군요.”
자기가 말한 농담에 후후 웃는 이리곤을 보며 바실리아도 마주 웃어 주었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부장님의 허리에서 피가 쏟아지는 걸 봤을 때는 내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시 보니까 그렇게 심해 보이진 않네요.”
“사실, 가장 걱정인건 감염 여부입니다. 나중에 비실비실 앓다가 갑자기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사령관님을 가르칠 시간이 남아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아니요. 부장님은 제 옆에 훨씬 더 오래 있어야 해요.”
바실리아에게서 뜻밖의 말이 되돌아오자 이리곤은 표정을 굳히며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저는 저에게 기대를 걸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런 사람이 있어야,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에요. 부장님은 절대, 절대 대체 불가에요.”
잠자코 말을 듣던 이리곤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긴산의 모든 사람들이 사령관님에게 기대를 품고 있는데, 저는 왜 대체 불가입니까? 제가 무슨 특별한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부장님은 제가 이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 등짝이 넓긴 합니다만, 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는 남자입니다. 제가 사령관님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적어도 저를 떠나지는 않을 거잖아요.”
“떠날지도 모르죠.”
“확신하지는 못하시네요.”
“......”
이리곤은 허리에 감긴 붕대 위에 오른손을 올려두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언젠가는 사령관님을 혼자 두고 가는 날이 올 겁니다.”
“그럼, 그 전에 제가 부장님을 버리면 되겠네요.”
“......후후, 저는 사령관님의 그런 이기적인 면도, 아이처럼 어른에게 기대는 면도 좋아합니다.”
이리곤의 말에 바실리아가 생긋 웃었다.
“누가 이기적이라는 거죠? 아내 셋에 자식을 여럿 두신 분이 저까지 얻으려고요? 제가 보기에는 부장님도 폐하 못지않은 욕심쟁이예요.”
바실리아와 마주 웃은 이리곤은 이내 무릎 위의 왼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사령관님은 자신을 위해 슬퍼해 줄 사람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저는 저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렇군요.”
대화가 끊겨서 생긴 찰나의 정적.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바실리아의 오른쪽 눈에서 빨갛게 충혈된 부분이 드러났다.
다시 대화를 시작한 사람은 바실리아였다.
“이리곤 부장님.”
“네?”
갑작스러운 호명에 당황한 그가 땅에 떨구고 있던 시선을 들어 바실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새하얀 피부에 인형 같은 표정은 언제 봐도 인상적이었다.
“앞으로는 군단장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편이 사령관님보다 어감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건 그렇긴 하군요.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그의 입에서 ‘군단장’이란 단어가 나오자 바실리아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많이 기대할게요.”
* * *
공중화장실에서 면도를 마친 하림은 세면대의 꼭지를 틀었다. 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돗물이 배수구로 흘러 들어간다.
긴산에는 세면 장치가 없기에 하림은 세면대를 흥미롭게 살펴보다가 배수구가 물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모습에 꺼림직함을 느끼고 급하게 꼭지를 닫았다.
세면대에 올려뒀던 면도날을 챙기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넓은 기차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세히 둘러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눈에 뜨인 익숙한 분홍 머리.
그녀도 하림을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기차를 가리켰다. 기차에서 만나자는 뜻으로 이해한 하림은 기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륵— 턱.
문을 열고, 원래 머물던 객실에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 구석에 웅크려 있는 사람은 사베트고, 데버리 야사는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었고, 핵사는 길거리에서 산 꾸러미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림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와, 많이도 샀네.”
“그래? 이 정도면 한 손에 다 들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되는데.”
“저번에 나랑 무기상점 갔을 때도 그렇고 씀씀이가 상상 이상이잖아. 대체, 무슨 돈으로 구매하는 거야?”
꼬치구이를 맛보던 그녀가 하림에게 미심쩍은 미소 지었다.
그 반응에 하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 너 설마 했는데 그냥 부자구나? 돈도 많은데 그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야?”
핵사는 하림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며 딴짓했다.
털컹!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놀란 하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에서는 아이카와 블랑이 헐레벌떡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카씨? 블랑?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쉿···! 조용히 있어라.”
문을 잽싸게 닫으며 들어온 아이카와 블랑이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며 구석에 앉았다. 그 둘의 반응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다른 이들도 구석으로 이동했다.
조용히 앉아서 앞칸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뭔가 큰 울림이 땅을 통해 느껴졌다.
‘발소리···? 왜 이렇게 발소리가 많이 들리는 거지?’
수많은 발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수십 명의 걷는 소리가 바닥의 울림을 통해 느껴졌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칸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침내.
철컥! 끼이이이이익······!
문에 열리며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검은 드레스의 여자. 그 여자가 역광 속에서 눈알을 굴리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일단, 키가 더럽게 크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키가 거의 190cm에 달하는 야사와 비슷할 정도로 장신이었다. 그리고, 두 청회색 눈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청회색 홍채에 점처럼 찍힌 검은 동공이 상대를 뚫어볼 듯한 압박감을 줬다.
객실 내부를 한참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겨울옷을 입은 무리가 말없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이 남자였고, 중간중간에 설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적잖게 보였다. 약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전부 입실하자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것이 단 10초 안에 일어날 동안 하림과 그의 일행들은 긴장감 속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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