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광의 야수] 20

다른 객실 안에서 어른들이 랜턴과 담뱃불을 포함한 모든 불을 전부 끄고 최대한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최대한 창문에서 떨어뜨려 놓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서로 무기와 탄약을 공유했다. 모든 준비가 고요한 혼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승강문이 열리며 백발 소녀가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카는 방한 조끼 내부에 버려진 철판을 넣어 방어구로 개조한 갑옷을 원피스 위에 입고,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사냥용 석궁으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아우구스타 북쪽 언어로 말했다.
“정찰이 먼저 올 겁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확인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정찰이 왔을 때는 탄약을 아껴야 합니다. 탐지되는 간부급의 수가 너무 많아요.”
아이카의 하얀 머리카락을 보고 그녀가 설인이라는 것을 확신한 한 남성이 입을 열었다.
“설인, 당신은 열차 중앙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계속해서 놈들의 정보를 알려주십시오.”
남자의 말에 아이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설인과 마법사는 뮤턴트가 뿜어내는 마력을 피부를 통해 느낄 수 있다. 간부급 뮤턴트는 전방위에 정신계열 마력을 뿌리기 때문에 쉽게 탐지된 것이다.
닫혀있는 창문을 향해 총구를 두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열차의 중간 지점에 도착한 아이카가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소총 또는 도끼로 무장한 사람들과 겁먹은 아이들이 울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부모들만 있었고, 다가올 전투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공습이 임박했다는 걸 느낀 아이카가 침을 삼키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텅—
올빼미를 닮은 뮤턴트가 소리 없이 날아와 인간과 맞먹는 체중으로 지붕을 울렸다.
정찰형 뮤턴트가 지붕 위를 거니는 소리가 고요한 객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뛰어난 청력으로 지붕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는 행동이었다.
지붕 위에서 들려오는 조류의 걸음 소리를 시선으로 쫓던 아이카가 습관대로 명령조를 사용했다.
“한 마리밖에 없어. 이건 쏴도 돼.”
“제가 하겠습니다.”
아이카의 말에 대답한 남자가 총구를 천장에 겨누었다. 이내 화약 접시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발포된 납탄이 굉음과 함께 천장을 뚫고 나갔다.
다시금 찾아온 고요. 발걸음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이카는 뮤턴트가 있던 자리를 경계하다가 어깨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어깨를 톡톡 친 구식 군복 차림의 남성이 손짓으로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한 발 더 쏴보자는 건가. 정찰형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면 한 발 정도는······.’
아이카가 남성에게 허가 사인을 보내려는 순간, 자신의 뺨을 붉은색으로 비추는 섬광에 놀라 고개를 돌려 붉은빛이 쏟아지고 있는 창문을 보았다.
“어······?”
하늘 위에 피어난 해바라기들이 반짝반짝. 정확히는 폭발의 불꽃인 그것의 중심에서 나타난 은빛 비늘을 두른 포탄이 시속 1000km의 속도로 날아왔다.
그 직후, 날아든 포탄은 창문을 깨고 들어와 사람 두 명을 형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찢고는 반대쪽 벽을 관통하여 나갔고.
콰아앙!
엄습하는 충격에 사고가 정지하고 시야가 뒤집힌다. 심장 고동이 갈비뼈를 압박하고, 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검게 변해가는 시야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까마득한 공허 아래로 사라져 가는 세계뿐이었다.
잊고 있던 호흡을 불규칙한 박자로 내뱉자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급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피로 물든 객실 내부, 일그러진 열차의 외골격, 혼란에 빠진 사람들.
하늘에 나타난 섬광은 총 다섯 개였다. 그렇다면 포탄도 다섯 개 일터.
아이카는 어지러움을 느끼는 상태로 중얼거렸다.
“기관··· 기관실만은 무사해야······!”
아이카가 기관실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다가 바닥에 고인 피를 밟을 때 즈음, 정신을 완전히 바로잡고 사람들 사이로 뛰기 시작했다.
* * *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길쭉한 어류가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나무 사이를 매끄럽게 내려와 지정된 위치에서 멈췄다. 이내 가슴지느러미를 튕겨서 100m 높이까지 텀블링 하듯이 도약한 뮤턴트는 몸속 온갖 혈관을 빨갛게 달궈서 스스로를 폭발시켰다.
해바라기 모양으로 터진 폭발을 추진력으로, 은빛 포탄이 높은 열차를 향해 날아갔다.
* * *
패닉이 와서 말을 잃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고, 가벼운 몸놀림을 이용해 뛰어넘었으며, 도저히 피해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어깨로 밀며 지나갔다.
기관실까지 단 한 칸밖에 남지 않았을 때, 또다시 하늘에서 해바라기 폭발이 번쩍 피는 것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육박한 포탄이 또다시 굉음을 내며 열차의 벽을 뚫고 지나간다.
아이카는 열차 전체에 울리는 진동에 약간 주춤했지만, 엎드린 사람들 위를 이 악물고 뛰어서 운전실 문 앞에 도달했다.
벌컥!
“하아··· 하아······.”
벽쪽에 생긴 커다란 구멍. 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기관사와 부기관사.
기관사 두 명이 모두 죽은 관계로 아이카가 직접 기차를 움직여야 했다.
숨을 고르고, 야수처럼 고개를 흔들어서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운전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아, 제길.”
모르는 것, 모르는 것, 모르는 것, 전부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당연하다면 존나 당연하지만, 더럽게 이가 갈린다. 그때, 벽이 찢어져서 생긴 구멍 너머에서 키가 큰 회색 머리의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운전실 내부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잘 돼 가고 있어?”
평온하게 한마디 하는 하다키의 태도에 아이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부는 문제없어. 기관실이 괜찮은지나 확인해줘.”
“어, 그게.”
하다키는 엔진과 보일러 등, 중요한 부분이 있는 기관실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뒤에서 뭔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바꿨다.
“괜찮지 않을까?”
하다키는 승강문을 열고 운전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등으로 기대어 막았다. 이어서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굉음. 하지만, 승강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뮤턴트가 입을 뻐끔거리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미는데도 하다키는 어렵지 않게 버텼다.
조종석을 앞에서 고민하던 아이카가 말했다.
“어떻게 조종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해.”
아이카가 레버를 하나씩 당겨보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있는걸 당겼다가 왼쪽에 있는걸 당겼다가 중계기를 확인하는 것을 반복했다.
끼이익—!
찢어진 벽 너머에서 인간형 뮤턴트가 테두리를 손으로 붙잡으며 손톱으로 벽 긁는 소리를 내었다. 운전실 안으로 넘어오려는 것이었겠지만, 어림도 없다.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놈의 머리가, 눈깔을 번뜩이며 권총을 뽑아든 아이카에게 조준되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폭발음.
총구에서 화염과 연기가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뮤턴트의 머리에 구멍이 났다. 놈은 몸부림치며 턱을 달달 떨었다.
완전히 무력화되지 못한 모습을 본 아이카가 시선을 돌려 문 위에 있는 비상용 양손 망치를 포착했다. 모자란 높이 때문에, 점프해서 잡아들고 착지. 양손으로 든 망치를 높게 들어 올리고, 박력 있게 내려찍었다.
푹.
뇌가 있는 곳을 정확히 타격당한 인간형 뮤턴트가 곧바로 축 늘어졌다. 양손 망치를 한 손으로 고쳐잡은 아이카가 왼쪽 벽 너머에서 흘러져 나오는 진득한 마력을 느끼며 고민하다가 이내, 포탄 구멍을 통해 지붕으로 도망치려고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아이카의 행동에 하다키가 참견했다.
“지금 밖에 나가면 위험해.”
아이카는 그녀의 충언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기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강력한 빛이 순식간에 온 세상을 하얗게 덮자 아이카는 깜짝 놀라 뒤로 뒷걸음질 치며 팔로 눈을 가렸다.
“뭐지? 빛?”
“응, 빛이야. 아까 신경 써서 준비해 뒀지.”
열차로 접근하던 인간형 뮤턴트들이 전방을 환하게 비추는 빛 때문에 감각기관을 손으로 가리며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 * *
맨 마지막 화물칸 지붕 위에 쌓여있는 다량의 금속 가루가 발광하고 있었다.
화물칸에 적재된 여러 발광 물질을 지붕 위로 옮긴 다음, 핵사가 마법으로 연소시켜서 빛에 민감한 인간형 뮤턴트들을 몰아내는 것이 하다키의 작전이었다.
하림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핵사, 빛이 줄어들고 있어!”
“나도 알아! 눈 감고 마법 쓰는 게 너무 어렵다고.”
핵사는 눈 보호를 위해 벨트를 안대로 쓰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하림은 실로아 뒤에 숨어있었다.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이유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예민해진 것도 있지만, 금속 가루가 연소하는 소리 때문에 서로 잘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제일 큰 이유였다.
“하림, 근데 너는 내려가도 되지 않아? 마법을 쓰는 건 나잖아.”
“야사님이 나도 사령술을 쓰는 마법사니까 남아서 도와주라고 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사령술밖에 못쓰잖아. 나를 도와주려면 화염계 마법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너는 모든 마법을 다 쓸 수 있다며? 나도 마법사니까 어떻게든 될 줄 알았지. ”
“마법사라면 모든 계열의 마법을 다 쓸 수 있는 게 정상이야. 너는 이상한 거고.”
“내가, 비정상이야······?”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며칠 전에는 평범했던 사람이 이상한 동굴에 들어간 뒤부터 사령술을 쓸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또 있던가? 애초에 긴산에서 살던 사람이 마법사가 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마법을 사용하는데 집중하던 핵사가 뭔가 생각난 듯이 ‘아.’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림, 실로아한테 도와달라고 해줄 수 있어?”
“어, 응. 잠시만.”
말뜻을 알아들은 하림은 집중을 통해 실로아의 시야를 빌렸다. 실로아가 보는 세상은 밝기가 수십 배는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좋아. 잘 보여.”
“나 잘하고 있어?”
“어, 지금은 잘하고 있어.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해.”
“알겠어. 응원 부탁할게.”
하림은 얼떨결에 무슨 응원을 할지 고민하다가 광휘를 뚫고 나타난 한 무리의 생명체들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도마뱀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등에 물갈퀴가 달린,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뮤턴트였다.
“온다···! 실로아, 오늘도 부탁 좀 할게.”
하림은 적들을 주시하며 과도를 꺼내 들었고, 실로아는 하림의 의지대로 마법을 쓰느라 바쁜 핵사 앞에 조용히 섰다.
그때, 기차 내부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명령 소리.
“준비!”
기차에 탄 퇴역 군인들 중에서 비교적 계급이 높은 몇몇 사람들이 창문 너머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보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명령에 따라 해머를 당기고, 창문에 거치한 총구를 적들에게 조준했다.
아우구스타의 사냥용 소총의 사거리는 보통 100m가 최대. 섣불리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놈들의 구강이 보이는 거리까지 가까워진 순간,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하는 말소리를 묻는 굉음을 내며, 기차의 모습을 감출 정도의 연기를 뿜어낸 일제사격. 일제사격의 포화와 함께 둥근 납탄 수백 개가 일제히 날아가 놈들의 연약한 가죽을 뚫은 다음, 신경계를, 순환계를, 소화계를 짓이겼다.
단 한 번의 사격으로 적들 대부분이 무력화됐지만, 살아남은 뮤턴트들은 계속해서 기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적들의 진격속도에 사람들은 허둥지둥 저마다의 검날을 세웠다. 아직 모두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놈들이 하얀 연기를 뚫고 나타나서 반쯤 열려있는 창문을 부수며 기차 내부로 발톱을 들이댔다.
도마뱀을 닮은 그것은 마치 사냥개처럼 짖어대고 옷자락을 물었다. 총검에 찍힐 때는 대량의 피를 분출했지만, 생명력이 끈질겨서 잘 죽지 않았다.
단검 같은 이빨은 다리의 동맥을 단번에 절단할 만큼 치명적이었고, 발톱은 사람의 등가죽을 뚫고 들어가 빠지지 않았다.
인간들은 총검, 식칼, 도끼 등 다양한 날붙이로 저항하며 괴물들에게 맞섰다. 독성이 다소 있는 뮤턴트의 피가 얼굴에 튀어도 주춤하지 않고 오히려 눈알을 부라리며 씹어먹을 기세로 덤벼들었다.
인간과 괴물이 서로를 쑤시고 찌르는 패싸움이 격렬해질수록 피가 바닥을 적시고, 천장을 칠하고, 창문을 빨갛게 가렸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