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알투스 대륙은 마법과 정령이 난무하는 세계다. 필레우스는 나르시스 왕국에 살았다.
마탑은 마법사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연합이자 근거지다.
나라마다 하나만 있었다. 나르시스 왕국의 마탑은 넓은 호수 옆에 성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마탑에 필레우스라는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어느 괴짜 마법사의 제자였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괴짜니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남들과 다른 점이 딱 하나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하고 태어난 이유는 묻지 마라. 이유를 몰라서 대답해 줄 수 없다.
마법이 없는 세계의 삶은 그에게 중요한 가치를 심어줬다.
그것은 자유다. 계급에 억눌린 삶이 주는 억압을 깨닫게 해줬다. 물론 마법사가 되면 기존 신분은 사라진다. 신분이 '마법사'가 된다. 상류층 평민과 중상층 귀족 사이가 마법사였다.
마법만 연구하고 자유를 누리며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자네의 황당한 이야기는 더는 들어줄 수 없군. 당장 마탑에서 나가게."
"세실리아 마탑주님! 제가 왜 나가야 합니까?"
허리를 굽신거리던 필레우스가 외쳤다. 붉은색의 더벅머리가 늘어졌다.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마탑주가 손을 이마에 두고 한숨을 쉬었다. 마탑주는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주름진 여인이었다.
"엘프, 수인, 드워프를 아인종이 아니라 사람으로 분류해야 한다던가. 몬스터로 분류된 고블린, 오크가 사람이라던가. 마탑을 망칠 주장을 하지 않는가!"
'마탑주'인 세실리아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아인종, 몬스터로 분류된 지성체들이 정말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불임이어야 합니다. 남자 쪽은 확실하게 불임이어야 해요."
엘프, 드워프 등이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는 이종교배의 산물이다. 종 간의 염색체 차이로 아기는 불임일 확률이 높았다.
"제 논문을 보셨으면 아실 겁니다. 제가 마물인 섀도 타이거 암컷과 파이어 라이언 수컷을 교배한 실험이요."
그는 푸른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 마물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는 '섀도 파이어 라이거'라는 학명으로 발표할 생각입니다. 하여튼 라이거끼리는 번식이 불가능했습니다."
전생의 기억과 이곳에서 실험 결과를 근거로 보면 같은 결론이 나왔다.
"수컷은 100% 불임이었고 암컷은 다른 종과는 낮은 가능성으로 새끼를 잉태했습니다. 그러니까"
"닥치게!"
마탑주의 주변으로 거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짜증이 났으니까. 필레우스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바닥에 뒀다.
"그러니까... 조사한 혼혈인 356명 모두 남녀 간의 불임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혼혈인끼리의 번식도 정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었다. 논문은 확인된 사실을 근거에 따라 주장해야 한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였다.
"인간의 '종'에 대한 분류를 다시 해야 한다고......"
"제발 그 입을 다물게!"
불꽃이 날아가서 벽에 부딪혔다. 금이 간 벽의 일부가 떨어졌다. 마탑주가 하얀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저음으로 말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주장을 하는 것인지 아는가!"
마탑주의 분노는 타당했다.
각 나라의 마탑은 여러 지원을 받는다. 가령, 왕실의 지원, 상단들의 지원, 마탑 소속의 원로 마법사들의 기부가 있다.
이 마탑에 이딴 논문을 내미는 마법사가 있다. 이게 알려지면 마탑의 지원이 끊어질 것이다.
그의 논문은 왕실과 종교 모두를 건든다.
왕실의 입장에서 필레우스는 '인간'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친 왕실을 비판한다.
만약 몬스터로 규정된 그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을 사냥해서 얻는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 세금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논문을 쓴 거냐."
교단의 입장에서는 인간과 아인종을 신의 자식으로 인정한다. 그 외의 지성체는 몬스터다.
그들은 성서에 나온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 안에 어떤 해석도 없다. 만약 몬스터로 규정된 존재들이 인간이라면 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녀가 자기 머리를 잡아당겼다. 붉어진 얼굴로 필레우스를 노려봤다.
"자네 논문 하나에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위험해질 수 있는지 아나?"
"정치적 성향도 이단적인 내용도 전혀 담기지 않은 논문입니다."
"아니. 누구보다 정치적이었고 이단적이야."
세실리아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논문은 삭제하면 될까요?"
필레우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논문뿐 아니라 관련 연구 자료 및 시설도 없앨 거다."
"시설도요? 그러면 저는 연구를 어디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지금 목숨이 걸려있는데 그딴소리가 나와."
마탑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팔과 다리가 저릿했다. 젊은 시절에 전장에서 공훈을 세워 훈장을 받은 분다웠다.
살기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붉었던 그녀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제 마탑주와 마탑의 마법사가 아닌 스승과 제자로 이야기하자. 내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 기른 것이냐?"
마탑주는 막내 제자인 필레우스를 아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온순하고 평화적인 성향이었으니까.
"스승님. 다시는 이런 주제로 실험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너를 마탑에서 아예 제명할까 하다가 참았어."
"죄송해요."
필레우스가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는 떨려왔다. 마탑주가 어깨를 주물렀다. 몸에 힘을 줬는지 어깨가 굳었다.
"논문을 지워버렸다고 해도 혹시 모를 일이야. 그러니 마탑을 떠나라."
"스승님! 저는 여기에 있고 싶어요."
스승님이 그에게는 어머니였다. 스승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에게 누나이고 형이었다. 가족을 떠나서 홀로 어찌 버틸까.
세실리아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두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마탑주인 나를 떨어뜨리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너를 건들 수 있어."
마탑주는 마탑의 왕이다. 마탑에는 왕좌에서 왕을 끌어내리려는 마법사들이 숨을 죽이고 기회를 노렸다.
"마탑에서 소유한 땅 중에 버려진 토지가 있다. 거기에서 몇 년 조용히 있거라. 때가 되면 부르마."
"스승님...."
"잘 지낼 수 있지?"
그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물었다.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는 그의 손으로 옮겨갔다.
그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등을 토닥였다.
"연구만 한다고 밥 굶지 말고, 조금 아픈 기색이 느껴지면 바로 치료 포션을 먹으렴."
"스승님이 부르실 때까지 잘 지낼게요."
그가 나가고 방은 조용해졌다. 그녀가 작게 혼잣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 잘 지내야 할 것인데....."
***
필레우스는 봉투를 꺼냈다. 읽어 내려갔다.
"임명서:마탑의 부설 아카데미 건설 총책임자. 지역은 루체.... 뭐지?“
지명이 luce에서 뒷부분이 뭉개졌다. 그래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루체오구나!
원래 가야 할 곳은 루체(Luce)다. 임명서를 작성할 때 글자 하나를 더 넣은 탓에 짓눌러서 지웠다. 루체오(Luceo)로 오해한 경위였다.
***
마탑의 안내 데스크에 여러 안내서가 비치되었다. 그중에 하나를 꺼내서 읽었다.
"세상은 위험이 도사리는 곳. 연약한 마법사여. 모험가, 용병을 고용하여 안전을 도모하자."
모험가는 던전을 탐사하고 아이템, 마석을 모으거나 한다. 던전에 관한 의뢰를 받는다.
용병은 의뢰받은 일만 하는 존재다. 의뢰 없이는 나서지 않는다. 대신에 던전과 무관한 일도 의뢰로 받는다.
그는 안내서 뒷면에 마탑과 연계된 모험가 알선소와 용병 알선소를 확인하였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 생각이 짧았다. 논문 하나로 마탑의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 이번만큼은 자신도 잘해보려고 한다.
***
용병 알선소로 걸어 나갔다. 마탑과 연계된 곳이다. 그곳의 문을 열자,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쳐다봤다.
필레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고 들었다. 그 순간, 노란 머리카락의 실눈 사내가 달려왔다.
"의뢰하시러 온 건가요?"
"경호 의뢰를 하려고요."
"원하시는 용병단이 있으실까요? 아니면 저희가 이동 경로, 기간 등을 확인해서 추천해 드릴까요?"
사내는 손을 파리처럼 비벼댔다.
"마탑의 마법사입니다. 혹시 괜찮은 용병이 있을까요?"
입꼬리는 점점 올라가더니 웃음꽃이 피었다. 필레우스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한 사람의 뒤태가 있었다. 잿빛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져서 작게 흔들거렸다.
용병 알선소 직원이 움직여서 앞을 가렸다.
"놀먼입니다."
"놀먼..... 실제로는 처음 봐요."
'놀'은 늑대 머리를 한 몬스터다. 인간처럼 두 발로 섰고 무기를 쓸 줄 안다. 인간보다는 조금 낮은 지능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놀먼은 '놀'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몸을 기울여서 '놀먼'을 관찰하였다. 마법사의 호기심 탓이다.
늑대의 털이 난 손과 날카로운 손톱이 인상적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옷으로 가려졌다.
"그런데 용케 용병하네요?"
"부모 중 하나는 인간이니까요. 인간 부모가 '거주권'을 요구하면 받을 수 있어요."
왕실이 놀먼을 인간으로 여겨서가 아니다. 혼혈의 전쟁 인력으로 쓰고 싶어서였다.
혼혈들은 아인종, 몬스터의 장점을 가지며 인간 사회에 융화되었으니까. 여러모로 좋았다.
"왜 나만 달라!"
놀먼이 용병 알선소 직원에게 소리를 질렀다.
"용병님이 인간도 아니고 '놀먼'이잖아요. 알선 수수료를 남들보다 더 받아야죠. '놀먼'을 용병으로 받도록 저희가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아세요!"
"그 의뢰는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내가 받았던 건데 너희가 무슨 노력을 해!"
그가 알선소 직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직원의 발이 떠졌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용병들이 일어났다.
"인간도 아닌 놈이 의뢰를 줬으면 감사한 줄 알아야지."
"이래서 몬스터 놈에게 거주권을 주면 안 된다니까."
한 용병이 놀먼의 배에다가 주먹을 박았다. 충격에 몸이 기울어졌다.
그 틈에 다른 용병이 그를 발로 찼다. 여러 용병이 동참하였다. 놀먼은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필레우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하네요?"
"놀먼들은 '거주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람을 다치게 하면 거주권 박탈 혹은 사형입니다."
아무리 몬스터의 혐오와 아인종을 향한 우월감이 남발하는 세계라도 선을 넘었다. 왕실로부터 정당한 '거주권'을 받지 않았는가. 거주권 안에 있는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
"다른 알선소로 가고 싶네요. 용병의 돈을 뜯어먹는 알선소잖아요. 용병들이 열심히 일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 말에 실눈의 직원이 두 손을 저었다.
"아이고! 오해입니다. 저희 직원이 실수한 모양이네요."
마법사는 용병 알선소의 큰손이다. 한 번 의뢰에 지불하는 금액이 컸다.
일반 마법사도 그러할진대 무려 상대는 마탑의 마법사다. 놓칠 수 없었다.
실눈의 금발 머리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삿대질하며 외쳤다.
"너희 뭐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그리고 너는 알선소 기준에 맞게 제대로 해."
용병들이 놀먼을 때리던 것을 멈췄다. 실눈은 알선소의 책임자였다.
용병들이 알선소와 척을 져서 좋은 것이 없었다.
그들이 의뢰를 중개해 주지 않으면 용병은 굶어 죽는다. 나라의 법 때문이다. 용병 의뢰는 알선소를 통해서 받아야만 한다.
금발 실눈이 손바닥을 비벼대며 물었다.
"의뢰 금액은 대강 얼마로 책정해서 오셨나요?"
필레우스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꺼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알선소의 책임자가 주머니 안을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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