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6화
"비고! 비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공간에 번져 나갔다. 사랑에 빠진 요정은 약자였다. 필레우스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감정에 젖은 목소리는 모르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했는데 권속으로 부릴 수 없다는 불안감이야? 요정들 간의 서열과 무리 생활에 대한 논문을 쓰면 좋을 것 같아. 혼자서 오랫동안 있었던 외로움이 이상한 행동을 일으키게 한 것일지도 몰라.’
여러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듯, 그중에는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도 있다.
"너는 어쨌든 이 녀석과 함께하고 싶다는 거지?"
"비고! 비고!"
비교의 요정은 한 손을 들며 고개를 위아래로 연속으로 흔들었다.
"'던전 마법과 신생 요정 탄생의 관계 분석'에 따르면, 던전 마법으로 요정이 탄생한다고 해. 생성된 존재는 오랜 세월과 변화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하더군. 그 특별한 존재를 '요정'이라고 지칭하는 거야. 처음에는 골렘에 불과했을지라도, 지금은 요정으로 진화한 듯 싶어."
***
필레우스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였다. '던전 마법과 신생 요정 탄생의 관계 분석'의 저자는 필레우스에게 조언을 얻었다.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나무가 되어주었다.
"식사 중이시네요? 역시 논문을 어떻게 발전시키는가를 주제로 말하면서 먹는 것이 맛있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군요.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주무시기 전에 이 논문들은 훑어보세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논문이 승인된 결정을 듣자마자 축하의 말까지 해주었다.
"축하해요! 마탑의 일원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지식을 탐구해봐요!"
마탑은 일정 수준의 실력과 논문이 있어야 정식으로 일원이 된다. 그 과정이 힘든지 알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런데 야반도주하였다.
지금도 왜 도망을 갔는지 모른다.
***
"논문 중에 '요정의 진화 사례 연구: 던전 마법 진화 이론과 자연 생성 진화 이론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어요. 대부분의 요정은 자연 친화적인 존재죠. 던전 마법으로 탄생한 요정들은 소수고요. 아무리 소수라고 하더라도 그들도 엄연히 요정이에요. 그 소수는 던전 마법의 제약이 아닌,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어요."
***
그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요정의 진화 사례 연구: 던전 마법 진화 이론과 자연 생성 진화 이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도 필레우스의 손길이 닿았다. 논문을 쓰던 중 저자가 다른 분야로 전과를 해버렸다. 공동 1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 망할 녀석아! 넌 정말 사람이야? 짐승이지! %(^&^(&%$#$#$%$%^%^&%&^*&^78]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했다. 논문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터. 게다가 연인과도 헤어졌다고 한다.
"연인과 데이트라니 정말 좋네요. 사랑하는 상대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특별히 엄선한 논문들을 토대로요."
"설명이 얼마나 걸리나요?"
"마법의 기초부터 알려드려야 하니까.... 가볍게 8시간 정도 같이 들어요."
편지를 받고 얼마 뒤에 그 마법사는 연인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1년간 주 3회의 데이트에서 서로 굳건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탑의 강의실에서 두 사람을 앉혀놓고 칠판에 이론을 적었다.
"이렇게 데이트를 주 3회씩 할 수 있다니 축복이죠."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강제로 강의를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상대가 필레우스를 배려하려고 해도 극구 사양하는 태도를 보였다.
"슬프게도 이제는 데이트를 줄여야 해요. 서로를 위해서 서로에게 맞는 강의를 들어야 마땅해요."
마탑 마법사와 일반인 연인의 수준 차이가 너무 났다. 두 사람의 데이트 시간을 빼앗아 각자 수준에 맞는 강의를 했다. '선의'다. 바쁜 마탑 마법사인 연인의 마음을 이해해 주길 원했으니까. 누구보다 두 사람이 잘 되길 바랐다. 아쉽게도 현실은 시궁창이다. 성격 차이는 사랑만으로 부족한 모양이었다.
참고로 여자 쪽은 내가 추천서를 써줘서 마법 칼리지에 입학시험을 봤다. 연인과 헤어졌지만, 진로를 마법 쪽으로 잡게 되었다.
***
비고?
비고의 요정이 좌우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만들어진 골렘으로 '재물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였겠지. 그러나 지금은 진화했어. 자아가 생긴 주체적인 존재가 돼서 동등한 관계가 됐어. 계약 당사자 양쪽이 서로 의무를 져야 해. 재물의 주인인 사람도, 비고의 요정인 너도 피할 수 없어. '재물'을 지키는 목적에 서로 충실해야 해."
필레우스의 눈높이까지 날아와서 주변을 둘러봤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비고! 비고! 비고!"
기분 좋아졌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벤시를 따라갈 수 있는 기분. 문밖의 인간들은 침입자가 있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비고의 보물'을 지키는 의무를 방치하는 것이다.
"한 번 나태해진다고 해서 계약 파기는 안 돼. 여러 번 시도해봐야지."
비고의 요정이 빤히 그를 쳐다봤다.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한··· 백 번 정도만 계속 일어나면 자동으로 관계가 해지될 것 같은데?"
라이카가 입술을 떨리게 하며 말했다. 알지만, 간절히 외면해보려고 한다.
"그 백 번은 누가 하는 것이죠?"
"응?"
비고?
비고의 요정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린 바라본 곳에는 라이카와 동료들이 있었다.
비고?!
마치 '네놈들이 있었는데 내가 잊고 있었구나!' 하는 듯싶었다. 그가 망가트린 인지능력이 복구되지 못한 탓이다. 골렘은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필레우스가 눈을 찌푸렸다.
"당연히 여러분이 해야죠."
"저희가요?"
라이카의 눈동자가 자리를 못 잡고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네. 계약 내용에 쓰여 있잖아요."
레이첼이 라이카의 팔을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식빵! 무슨 헛소리야. 지금 죽을 뻔한 거 보이지 않아?"
얼굴이 붉어졌고 생고생으로 부었다. 터질 것만 같은 호빵 같았다. 분노한 그녀를 보고도 그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용병은 원래 위험한 직업이에요. 게다가 내가 의뢰한 내용은 파샤 왕국 동쪽 끝의 비고까지 탐색 동행 및 대기인데 뭐가 문제죠? 의뢰 등급도 S급으로 올렸어요."
그들은 용병 보호법에 따른 의뢰 내용 확인 절차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절차를 생략한 것은 거금을 줬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문제로 삼으면 이것부터 문제가 된다.
엔달프가 힘든 와중에도 억지로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목숨을 거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용병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죽지 않을 것인데 무슨 문제인가요? 체력과 상처는 최상급 치료 포션을 드릴게요."
우르스의 동물귀가 바짝 세워졌다.
"최상급 치료 포션이고 나발이고 간에 못 합니다! 차라리 배를 째세요!"
필레우스는 고민이 들었다. 진짜로 배를 째면 의뢰를 계속 맡겠다는 뜻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뛰어난 실력의 증명이 용병의 배를 째는 것일 수 있지 않은가. 용병 업계의 관습일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었다. 심각한 갈등 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고 눈치가 없어도 이건 아니겠구나 싶었다.
미노스가 뒤에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우리는 책임져야 할 동족들이 많소. 우리가 없다면 굶주려 죽게 될 운명일 터 제발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주시오."
필레우스가 라이카부터 다른 이들까지 그 얼굴을 살폈다. 골렘들의 공격으로 찢어진 의복, 상처로 흐르는 핏줄기까지 정상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의 상태를 보면 돌아가는 것이 맞겠지요."
'비고의 요정'의 얼굴에 붙은 두 개의 보석이 붉게 빛났다. 듣자 듣자 하니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수천 년 수절하듯이 살아온 인생이다. 장밋빛 인생을 가져보려고 하는데 하찮은 놈들이 방해다.
자유의 몸이 되어서 어여쁜 존재의 곁에 있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바닥의 모래들이 천장 쪽으로 떴다. 일부가 뭉쳐서 형태를 만들었다.
[나를 돕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살기가 하찮은 침입자들을 향해 뻗었다. 필레우스는 제외였다. 그는 침입자가 아니라 벤시를 소개시켜 준 주선자였다. 귀한 은인에게 살기를 갈길 수 있겠는가. 잘 구슬려서 좋은 관계를 만들고 아름다운 존재와 이어져야 한다. 비고의 요정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그 배려 덕분에 필레우스는 살기를 느끼지 못한 채 팔짱을 꼈다. 앞으로 몇 발짝 걸었다가 뒤로 몇 발짝을 걸었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꺾어보기도 하고 왼쪽으로 꺾기도 했다. 목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아직 학회에서 밝혀내지 못한 상형문자들이 있네? 무슨 뜻인지 알려줄 수 있어?"
마법사는 지식을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한다. 알아내는 과정도 결과도 기대한다. 상형문자 해독이 완료되면 고대 마법 연구가 더 나아질 것이다. 필레우스의 눈빛이 다부졌다. 마법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 1%와 흥미 99%가 합쳐졌다.
비고?
비고의 요정이 귀엽게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귀여움과 별개로 살기는 꾸준히 용병들을 향했다. 그는 찬찬히 과거를 떠올려봤다.
인간들이 찾아와서 비고에 재물을 쌓아 올렸다.
인간들이 찾아와서 특별한 물질의 보관 방법을 알려줬다.
인간들이 찾아와서 저장한 재물을 꺼낸다.
비고?!
그는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한 번도 글자를 인간들에게 써본 적이 없다. 처음에 만들어졌을 당시만 제외하면 말이다.
"너에게 고맙다고 카드도 준 적이 없어? 고맙다는 말은? 진짜 그 많은 재물을 지켜주는 너에게?"
필레우스가 자기 손으로 눈을 매만졌다. 손바닥에서 약간의 물이 생성되고는 얼굴에 붙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정말 너를 도구처럼 대했구나."
비고의 요정에게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굴 부분은 붉어졌다. 평소와 달리 욱하게 되었다. 필레우스가 인지능력을 교묘하게 망가트린 덕분이다.
'자기들은 부려 먹기만 하고 선물 하나 준 적도 없는 것들!'
비고의 요정이 욕을 하든지 말든지 필레우스는 여유로웠다.
필레우스의 손바닥 위로 마나가 모였다. 찰흙을 빗는 것처럼 뭉치며 눌렸다. 곧 형체를 만들어졌다. 그것은 의자였다. 비고의 요정이 앉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여기에 앉아서 쉬어."
비고의 요정이 씩씩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그 누구도 의자에 앉으라던가, 쉬라든가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 중 오직 하나였다. 비고의 요정에게 필레우스는 개념이 있는 올바른 인간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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